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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일상다반사

[에피소드] 장롱이 잘못이야

by 앰코인스토리.. 2025. 7. 10.

사진출처 : freepic.com

아들이 손자손녀를 데리고 왔다. 가까이 살아도 내 집에 온 것은 오래간만이다. 아이들은 도착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심심하다를 연발하더니 어른이 들기에도 무거운 바둑판을 두 손으로 질질 끌고서 작은방 베란다에서 거실까지 옮겨다 놓는다.

 

몇 달 전부터 바둑학원에 다니고 있으나 걸음마 단계고, 바둑알 까기는 고수의 반열에 올랐다. 여러 번 다섯 알 씩을 가지고 겨룬 결과, 가족 간의 서열은 정해졌고 쉽사리 바뀔 것 같지도 않다. 나와 아내는 적수가 되지 못해 2대 5. 손자가 2알이면 우리는 5알을 가지고 겨루어야 비등해진다. 아들은 1대 2정도고 사위는 대등하다. 그래서 항상 마지막으로 겨루게 되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옆에다 점심상을 차리는 데도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아내가 몇 번이나 이름을 불러서야 마지못해 일어난다. 다과를 마치고는 다른 게임을 원하는 눈치라 “할아버지가 주연으로 나오는 동영상이 있는데 같이 볼까?”라고 했다. 러시아 여행에서 아마추어 사진사인 친구가 찍은 동영상을 보내왔다. 3분쯤 보더니 “볼 게 없잖아.”하면서 자리를 뜬다. 따라쟁이인 손녀가 같이 가는 것은 예견된 상황이다.

 

큰방에서 몇 번이나 볼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번에는 ‘아주 큰소리구나.’하는데 손녀가 눈물을 닦으며 달려나온다. “왜 동생 쪽으로 공을 차서 울리냐?”며 아들이 방으로 향하는데, 손녀가 양팔을 벌리며 앞을 막는다. 울먹이며 “오빠가 잘못한 게 아니란 말이야. 장롱이 잘못해서 맞았거든. 어린이를 봐주어야지! 아빠는 나쁜 사람이야!”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그게 헷갈린다.

피곤해서 방에 들어가니 장롱에 ‘장농이 잘못아야.’라고 유치원에 다니는 손녀가 삐뚤삐뚤하게 쓴 종이가 스카치 테이프로 붙어있다. 침대에 누워있는 10여 분 동안, 손자손녀의 해말간 웃음보따리가 연거푸 터진다. ‘내가 꿈꾸어 왔던 이상향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하면서 시나브로 낮잠에 빠져들었다.

 

글 / 사외독자 이선기 님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