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감수성이 예민했던 필자의 중학교 시절, 할리우드 40~50년대의 황금기 영화들과 1960년 후반 불어닥친 할리우드의 대안적 문화운동의 상징이었던 아메리칸 뉴시네마 영화들, 그리고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그의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1992)에서 그대로 구성을 차용해 오마주를 바친 《용호풍운》(1987)과 같은 B급 홍콩영화에 열광하던 필자에게, 장뤼크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59)와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1959)와 같은 프랑스 누벨바그(새로운 물결)의 영화들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오기에 충분했습니다.
무엇보다 그 영화들에 내포된 사상적 의미와 구성의 미학에 대해 전혀 문외한이었던 필자와 같은 10대 소년에게 그 영화들이 다 이해될 리는 만무했지만, 그 영화들이 적어도 필자에게 다가온 영화적 감수성 또는 느낌들은 훗날 필자의 문화생활을 결정짓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만은 분명했지요. 그런 점에서 당시 1980~90년대 프랑스 누벨 이마주(새로운 이미지)의 기수 중 한 명이었던 레오 카락스 감독이 《퐁네프의 연인들》(1991) 홍보차 한국에 왔던 1992년 당시,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 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영화는 이성이 아닌 감성과 느낌이다.”
▲ 영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Ascenseur Pour L'echafaud)》포스터
각설하고, 그런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들에 한참 푹 빠져 어렵사리 고다르와 트뤼포의 영화들을 한두 편씩 구해보면서 영화적 문화적 식견을 쌓아가던 그때, 당시 필자의 인생에서 문화적 선배이자 문화적 대부로 추앙하던 한 지인을 통해 소개받아 우연히 시네마테크를 통해 관람했던 프랑스의 루이 말 감독의 데뷔작 《사형대의 엘리베이터(Ascenseur Pour L'echafaud)》(1957)는 그야말로 프랑스 영화만의 세련미와 형식과 내용의 절묘한 조화라는 등식 관계를 확실히 보여준 필자의 문화 인생의 사건(?) 중 하나였습니다.
▲ 영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Ascenseur Pour L'echafaud)》포스터
무엇보다 프랑스 누벨바그가 본격적으로 만개하기 전인 2년 전, 할리우드 필름 누아르의 기류를 프랑스식으로 절묘하게 버무려 미학적으로 ‘프렌치 누아르’의 태동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2년 후의 누벨바그의 탄생을 예견한 루이 말 감독의 비범한 연출과 이 영화의 히로인이자 이후 프랑스 누벨바그의 영화의 연인으로 기록되게 되는 잔느 모로의 연기도 일품이었지만, 이 영화의 누아르적 색채와 감성을 더욱 확고해 준 것은 바로 영원한 재즈계의 거성인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이었습니다.
실제로 골수 재즈 팬들 사이에서 이 영화음악에 마일스 데이비스가 참여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거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을 정도니까요. 그 이유는 바로 다름 아닌 마일스 데이비스가 이 영화음악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바로 너무나 기막힌 우연이었기 때문이지요.
1957년 당시 프리스티지 레이블 소속이었던 그가 CBS 레이블로 이적하기 직전, 프리스티지와의 계약상 남은 네 장의 앨범을 이틀간에 걸쳐 녹음을 끝낸 직후, 유럽 투어 및 휴식 차 들린 곳이 파리였고, 당시 마일스의 공연의 다큐멘터리를 기획했던 프로듀서의 소개로 루이 말 감독과의 만남이 성사되었습니다. 실제로 루이 말 감독 또한 이 영화의 촬영을 마친 후 마음에 드는 음악 스코어를 얻지 못해 노심초사하던 와중, 마일스와 조우해 결정적으로 마일스에게 이 영화의 음악을 맡기게 됨으로써 프렌치 누아르와 재즈의 이상적인 만남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역시나 많은 역사의 굴레바퀴에서 보았듯, ‘우연의 명과 암’이라는 것이 문화사적으로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이 영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를 보더라도 루이 말 감독과 마일스 데이비스라는 두 거장의 우연한 만남으로 영화사적으로나 재즈사적으로 영원히 기록될 ‘마스터피스’가 탄생한 케이스니까요. 물론 다행히도 이 지면을 통해 언급된 해당 케이스는 ‘명’의 경우지만 말입니다.
영화 오프닝에서 이 영화의 남녀 주연이자 극 중 불륜관계인 모르스 로네와 잔느 모로가 전화로 서로의 사랑을 속삭이는 도입부 사이로, 잔느 모로의 쌩얼을 그대로 클로즈업한 도발적인 촬영, 비 오는 날의 파리와 자신의 연인이 자신의 남편을 살해한 직후 엘리베이터에 갇힌지도 모른 채 파리의 밤거리를 유유히 배회하던 잔느 모로의 처연한 모습을, 그리고 라스트에서 사건의 모든 전모가 밝혀진 후 잔느 모로가 “나는 곧 늙겠지... 10년... 20년… 그러나 사진 속의 우리처럼, 절대 우리는 떨어질 수 없어.”라고 홀로 독백하는 장면에 슬로우 템포의 베이스와 촉촉한 브러쉬 드럼 반주 위에 흘러나오던 마일스 데이비스의 뮤트 트렘펫 선율이 없었던들, 쿨한 프렌치 누아르적 감성이 이렇게까지 절묘하게 영화와 합일이 이루어지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 마일스 데이빌스의 앨범
말 그대로 마일스 그 자신이 1949년 앨범 <The Birth of the Cool>에서 쿨 재즈(Cool Jazz)의 탄생을 직접 진두지휘하며 ‘Cool’이라는 유행어를 창조했던 것처럼, 혹시 이 영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의 영상과 음악의 최종 편집본을 본 그가 이렇게 혼잣말로 되뇌이지 않았을까요? “Cool…(죽이네.).” 만약 그랬다면 다른 이들에게는 민망한 자화자찬이었지만, 누가 마일스,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아마 제 주위에 그의 음악의 진가를 아는 분이라면 그럴 분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그의 상상 속의 자화자찬처럼, 이 영화 속의 ‘프렌치 누아르의 감성과 재즈의 이상적인 만남’이 바로 Cool, 그 자체였으니까요.
동영상 : JEANNE MOREAU IN LIFT TO THE SCAFFOLD (MILES DAVIS THEME) (2:15)
영상 출처 : 유튜브(https://youtu.be/1OKQdp6iGUk)
동영상 : MILES DAVIS ascenseur pour l'échafaud (2:52)
영상 출처 : 유튜브(https://youtu.be/2nAWGKhsTs4)
동영상 : Miles Davis - Dîner au Motel (3:58)
영상 출처 : 유튜브(https://youtu.be/zyVbGl-8oro)
동영상 : Ascenseur pour l'échafaud
영상 출처 : 유튜브(https://youtu.be/saG7EELIfMM)
동영상 :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예고편
영상 출처 : 다음tv팟(http://tvpot.daum.net/v/Kpf4xhzkjVc%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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