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친구가 부탁을 했다. “오는 길에 우유 좀 사다 줘. 대신 흰 우유는 빼고. 내가 흰 우유는 먹지 않아.” 재택근무를 하는 친구라 집 밖을 나서기가 무섭다나 어쨌다나. 밖에서 봐야 할 일도 있고 수고비로 1,000원짜리 한 장을 얹어준다는 말에 승낙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친구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편의점에 들렀다. 넓은 매장 안에는 여러 가지 우유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딸기, 바나나, 초코, 블루베리, 그리고 흰 우유가 있었다. 흰 우유를 쏙 빼고 고르려니 미안해서 오랜만에 흰 우유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한 봉투에 모두 집어넣기는 했지만 오는 길에 흰 우유만 집어서 가방에 넣었다.
친구에게 우유를 전달하고 집에 와 짐을 풀었다. 냉장고 안에 있었던 우유라 우유 팩 밖에는 금세 물기가 생겼다. 가방에 물기가 떨어질세라 서둘러 흰 우유를 꺼내 들었다. 예전 같으면 팩을 열고 바로 마셨겠지만, 최근 들어 컵에 따라 먹는 버릇이 생겨 투명한 유리컵을 부랴부랴 찾았다. 한 팩을 탈탈 터니 유리컵 가득 채워졌다. 하얀색으로 변한 유리컵은 보기만 해도 예뻤다. 잠시 실온에 우유를 놔두었다. 그냥 마시기에는 너무 아까워 보였다. 소금도 설탕도 없는 그냥 무미건조한 맛의 흰 우유를 마시기 시작했다. 시원하고 고소하고 부드러웠다.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자연의 맛을 그대로 흡수한다는 게, 꽤 기분이 좋았다.
부모님이 목장을 하던 시절에 갓 짜온 우유가 문득 생각났다. 참 맑았다. 하얀 빛깔에 다른 색을 섞지 않았던 우유를 엄마는 냄비에 담아 끓였다. 3~4분 지나 우유가 끓기 시작하면 소금으로 간을 하고 식기를 기다렸다. 우유는 단백질이 풍부한 식품이라 배운 적 있는데, 끓여낸 우유가 식고 나면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얇은 막이 우유 위에 생기고 나면 그냥 먹어도 상관없다는 엄마의 말을 믿지 못하고 젓가락으로 그 막을 건져낸 후 투명 유리컵에 따르곤 했다. 티끌 없이 맑았던 우유는 소금간으로도 참 맛있는 음식이 되었다. 진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그 추억이 강렬해서였을까. 학교를 들어가면서 급식으로 가끔 접하던 흰 우유는 맹물처럼 느껴졌었던 때도 있었다.
한참 바나나 우유가 선풍적인 인기를 타고 팔릴 때, 시험 삼아 바나나 우유를 먹었다. 삼각형 모양의 비닐 팩으로 초코우유가 등장했을 때에는 그 모양 자체가 너무 좋아서 시간 날 때마다 사 먹기도 했었다. 딸기즙이 듬뿍 들어 있다는 말에 딸기우유를 한참 사 먹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랜 방황은 있었지만 우유 하면 흰 우유를 선택하곤 한다.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으면서 옛 추억에 대한 애착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저것 섞고 짬뽕이 되는 것보다는 뒷맛이 깔끔하고 담백하고 단순함이 진정 나에게 맞는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었다. 그 본연의 맛과 색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 나의 마음을 끌게 된 모양이었다.
3분의 1 정도 남았던 흰 우유를 입 안에 다 털어 넣고 나니 불끈불끈 힘이 솟는 느낌이 든다. 한참 동안 우유가 완전식품이냐 아니냐 논쟁을 벌인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나에게는 완전식품으로 굳어가는 느낌이 든다. 매일 먹을 수는 없지만 활력소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 흰 우유를 찾아 벌컥벌컥 마시고 커다란 힘을 내보고자 한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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