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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일상다반사

[에피소드] 벽지

by 앰코인스토리 - 2020. 9. 29.

 

고시원 선배의 호출이다. 같이 도배 좀 하자는 것이었다. 점심으로 짜장면을 곱빼기를 사주겠다는 꼬임에 넘어갔다. 조금 비싼 것을 부를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오는 사람도 많이 줄었다는 볼멘소리에 차마 탕수육까지는 얘기를 할 수 없었다.
실내화를 신고 사무실에 들어서자 방 안에는 벽에 바를 풀과 솔이 놓여 있었다. 마음먹고 도배를 해볼 모양이었다. 여러 개 방을 전체적으로 다 하지는 않는다는 말에 다소 위안을 삼고 선배를 따라나섰다. 여러 사람이 드나들다 보니 몇 개월에 한 번은 손을 봐줘야 한다고 한다. 사람이 많았을 때 하지 못한 일을 기회 날 때 해치운다는 설명까지 보탰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방이 여러 개 비어 있는 모양이었다. 선배는 도배지를 원하는 크기로 자르고 나는 대야에 도배지 풀을 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맡아 보는 풀 냄새였다.

내가 어린 시절에도 도배는 따로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 특별한 기술은 없었지만 가족 모두 달라붙어 손을 보탰다. 더러워진 벽지를 뜯어내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었다. 칼을 하나씩 받아 들고 벽지를 한쪽 모서리부터 뜯어냈었다. 풀이 덜 발라져 있는 곳은 쉽게 뜯겨 나갔지만, 벽에 밀착되어 있기라도 하면 한참을 벽지와 씨름해야 했다. 엄마는 밀가루와 물을 큰 솥에 넣고 휘이 저어가며 풀을 만드셨다. 걸쭉하게 만들어진 풀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올 때면 그 냄새가 사방으로 퍼지곤 했는데 그게 좋았다. 그래서일까. 도배를 금방 마친 곳을 가게 되면 한동안 눈을 감고 그 향을 음미하곤 한다. 어느 정도 식은 풀을 미리 잘라 놓은 벽지 위에 바르는 것도 도배하는 데 있어 큰 재미였다.
하지만 풀은 금방 마르기 때문에 손이 빨랐단 아버지가 큰 손을 이용해 순식간에 발랐다.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모서리를 주로 담당했다. 풀이 먹여진 도배지는 위쪽은 아버지가 들고 아래는 우리가 잡고 재빠르게 벽으로 이동했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는 천장 모서리를 맞추었고 마른 수건으로 벽지를 쓸어내렸다. 벽지 안으로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신속하게 벽지를 붙여 나가셨다. 벽지 한 장을 붙인 것이었지만 온 방 안이 화사해지는 느낌마저 들었었다.

선배가 불렀다. 풀을 다 풀었으면 벽지에 발라 달라고 했다. 만들어진 풀이다 보니 직접 만드는 수고스러움이 없었다. 도배지 솔로 쓱싹쓱싹 풀질을 했다. 그리고 풀이 마르기 전에 선배의 손에 건네주었다. 부분 도배이다 보니 처음 시작이 중요했다. 선배가 생각한 곳에 벽지를 붙이기 시작했다. 선배의 손도 민첩하게 움직였다.
벽지 한 장의 힘은 놀라웠다. 조금 전과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작은 방이라서 벽지 두 장으로도 훌륭한 변신을 가져올 수 있었다. 풀 냄새는 방 안에 골고루 퍼졌다. 선배의 눈썰미 탓에 남겨지는 풀 없이 벽지를 다 바를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도배를 한 방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벽지 모서리가 떠 있지는 않는지, 공기가 들어가 벽지 모양이 보기 싫지 않은지를 최종 점검에 나선 것이다. 다행히 선배의 솜씨가 좋아서였는지 벽지가 우는 것은 없었다.
참 오랜만에 해보는 경험은 옛 추억을 떠올리게 했고, 그리웠던 향을 다시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누군가가 도배하기 위해 오라고 전화를 한다면 한달음에 달려가야겠다. 잘할 자신은 없지만 벽지의 촉감, 도배지의 풀 향, 도배지 솔의 부드러움을 다시 한번 느껴 보고 싶어서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