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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일상다반사

[에피소드] 양복점

by 앰코인스토리 - 2020. 1. 2.

 

집으로 돌아가는 길 땅거미가 내려앉으면서 가게들의 간판에도 불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나의 눈을 사로잡는 간판이 하나 보였다. 양복점이었다. 아직도 양복점이 남아있다는 게 신기했을뿐더러 수많은 외래어 간판 속에서 토속적인 냄새가 쏙 밴 양복점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게 가슴을 설레게 했다. 양복점을 대신할 만한 고급스러운 단어가 왜 없지라는 물음표를 떠올려 보기도 했지만, 양복점의 의미를 그대로 전달하기에는 많이 부족할 거 같다고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금방이라도 양복점 문을 열고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은 충동을 간신히 참고 양복점 안을 들여다보았다. 잘 정돈된 원단 하며, 탁자와 가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양팔에 토시를 한 주인장이 도수 높은 안경을 콧잔등 아래까지 내리고 나서 “어떤 양복을 주문하시겠어요?” 하며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다. 가게 안은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성복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왠지 맞춤복은 낯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처음 건물 주인이 되던 때가 있었다. 부모님의 열정과 열의, 그리고 피땀 어린 노력으로 3층짜리 상가주택을 살 수 있었다. 1층에 3개의 가게 자리를 가진 건물이었고 장사 잘되는 가게가 들어오기를 많이 기원했었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입주시킨 업종이 바로 양복점이었다. 첫인상이 참 편안해 보였던 양복점 주인장은 말솜씨 또한 뛰어났었다. 30년 양복점 노하우까지 겸비하셨다는 말에 크게 성공하길 많이 기원했었다.
건물주로 첫발을 내딛는 양복점 주인장을 위해 뭘 해줄 수 있을까 궁리 끝에 나와 아버지는 양복을 맞추기로 했었다. 말로 듣던 주인장의 실력을 검증할 기회도 될뿐더러 상인들에게는 마수걸이가 중요한 만큼 첫 스타트를 빨리 끊어주고 싶었었다.
난생처음 맞춤복을 맞추기 위해 양복점을 처음 들어서는 순간, 그 기분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전혀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면서 맞닥뜨리는 하나하나에 설레고 불안했던 그 기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양복점 밖에서 보던 양복점 안의 모습이 양복점을 들어서는 순간이 너무도 달랐다. 따스하고 온화한 엄마의 품속에 안기는 듯한 기분이 피부로 느껴졌다. 평소 세상 얘기 좋아하고 술 좋아하며 실수도 가끔 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직업정신으로 똘똘 뭉쳐진 주인장의 비장한 눈빛마저도 낯설 지경이었다.
기다란 줄자를 능숙하게 움직여 가며 치수 하나하나를 재는 모습 속에서 30년 양복점의 장인정신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치수를 받아 적는 연필의 사각거림마저도 열의와 열정으로 느껴졌었다. “처음 입어보는 양복이라 최고로 멋지게 만들어 볼게.”라는 다짐을 듣고 나서는 더더욱 신뢰가 쌓였었다.
옷이 다 만들어지기까지 1주일이 걸렸다. 청바지만 입던 나에게 양복이 과연 어떻게 다가올지 긴장과 설렘이 공존하는 시간이었다. 양복을 입고 번듯한 직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셨던 부모님의 소원이 반은 이루어진 것이었으리라.
나에게 꼭 맞는 옷을 입는다는 것은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입어 보고 나니 금방 알 수 있었다. 행동하는 데 있어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큰 키가 아니다 보니 청바지를 살 때면 수선의 번거로움을 늘 달고 살았던 나에게 끌리지는 않는 바짓단을 경험한다는 것도 큰 행복이었다. 큰일이 있을 때면 항상 꺼내 입었던 그 양복은 나의 참 좋은 친구였었다. 멀어져 가는 양복점 간판 속에서 양복점에 대한 좋은 추억은 기억 저 멀리 사라져 간다. 하지만 꼭 기회가 된다면 솜씨 좋은 양복점 주인장 손을 빌려 나에게 꼭 맞는 양복을 다시 한번 맞추고 싶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