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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이야기] 채문희 蔡文姬

by 앰코인스토리 - 2018. 10. 16.

이번 호에는 지난 호의 내용과 시대적 배경이 같으면서, 잠깐 언급한 삼국시대 조조(曹操)와 관련된 인물이 있는데요, 여성으로서 당시의 사회 및 정치 상황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던 일종의 비극적인 삶의 서사가 있어, 인물 채문희(蔡文姬)에 관하여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椎髻空憐昔日粧 묶은 머리 여인 옛 단장 생각하니 부질없는 슬픔만
征裙換盡越羅裳 강남땅 비단 치마는 아예 나그네 옷으로 바꿔 입었네
爺娘生死知何處 아버지 어머니 생사 어느 곳에서나 알 수 있으랴
痛殺春風上瀋陽 끝없는 비통 안고 봄바람에 심양 땅으로 끌려간다네

위의 시는 명(明) 왕조가 멸망하고 청조 강희제(淸朝 康熙帝) 19년인 1680년 조선 숙종(肅宗) 때, 조선 사신이 청나라 수도인 북경으로 가다가 산해관(山海關, 명대 이후 군사 요충지) 인근 진자점(榛子店)이라는 객점 벽면에 새겨진 제벽시(題壁詩) 한 수를 발견하여 전한 것이다. 그 내용은 계문란(季文蘭)이라는 강남 여인이 왕조 교체기의 전란 중 포로가 되어 만주족(청나라)에게 팔려가는 중에 억울한 처지와 울분을 벽에 기록한 것이다.

[주석] 이등연, 이계연 《강남 여인 (季文蘭)의 제벽시(題壁詩)에 대한 조선 사행시(使行詩)의 관점 연구》, 중국학연구회, 2012, p.1.

 

1. 無辜犧牲 (무고한 희생)

 

채문희(약 177~249)로 말할 것 같으면, 중국 여류 인물 중에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라 말할 수 있는데, 그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녀의 생애 전반에 깔린 격동의 정치적 변화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동한 말기 한나라가 쇠락의 길을 걷고 있을 때, 동탁(董卓, 139~192)의 난이 일어난다. 동탁은 낙양에서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당시의 대학자인 채문희의 아버지 채옹蔡邕(133~192)을 정치적 위력으로 영입하게 된다. 물론 정치적 이유였지만 극히 존중하여 대한다. 하지만 동탁의 실정으로 말미암아, 한나라의 중신인 왕윤(137~192)은 자신의 수양딸이면서 당대 최고의 미녀인 초선(閉月 貂蟬)의 미인계를 활용하여 여포呂布(?~198)로 하여금 동탁을 제거하게 하는데, 이때 역시 채옹도 같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순식간에 고아가 된 채문희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주석] 邵丛敏 《蔡文姬的悲剧人生及其文学表现》, 延边大学碩士学位论文, 2007, p.5. 내용 약술.

 

그녀의 원래 이름은 채염(蔡琰)이며, 자가 문희이다. 한말 문학가 채옹(蔡邕)의 여식으로 건안 시기의 저명한 여류 시인이다. 《후한서ㆍ열녀전 后汉书ㆍ列女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박학다식하고 말솜씨가 좋으며 음률에 빼어난 재능이 있었다. 하동의 위중도에게 시집을 갔으나 남편이 사망하고 자식이 없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흥평에 있을 때, 천하가 전란에 휩싸이니, 이때 문희는 오랑캐에게 사로잡혀 남흉노 좌현왕에게 바쳐진다. 거기에서 12년을 보내는 동안 두 자식을 낳았다. 조조가 채옹을 잘 알기에 찾다가 적자가 없음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이에 사자를 보내어 백금을 주고 데려왔으며, 동사(董祀)에게 시집 보냈다. “博学有才辩, 又妙于音律。适河东卫仲道。夫亡无子, 归宁于家。兴平中, 天下丧乱, 文姬为胡骑所获, 没于南匈奴左贤王, 在胡中十二年, 生二子。 曹操素与邕善, 痛其无嗣, 乃遣使者以金璧赎之, 而重嫁于祀。”

[주석] 蔡荷芳, 《论蔡琰《悲愤诗》的女性意识》, 安庆师范学院学报(社会科学版), 2007, p.39.

 

위에서 살펴보았듯 채문희는 그녀의 생애에 있어 우리가 일생에 한 번 겪기도 힘든 고난을 연이어 겪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계문란 제벽시 내용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연약한 여인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무고한 희생의 풍파를 오롯이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전란이라는 정치상황에 맞닥트리는 아녀자의 삶이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특히, 그녀의 출신으로 말미암아 삶에 있어서 자의든 타의든 상관없이 세 번의 혼인은 당시 그녀가 정치적으로 적지 않게 이용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처음 위종도와는 정상적인 혼인관계라면,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타인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그 두 번째는 당시 불안정한 중원에 남흉노가 들이닥쳐 잡혀가서 좌현왕의 첩실이 된 것이었고, 세 번째는 조조가 그의 정치적 목적으로 만금을 주고 다시 데려와 결혼시킨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세 번의 결혼에 대하여 일부 조선의 문사 중에는 실절(失節)의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지만 중국의 사서에는 결코 그렇게 싣지 않고 오히려 열녀전에 당당하게 싣고 있는 것이 주목됩니다.

 

2. 圣洁的母性意识 (성결한 모성 의식)

 

채문희의 문학적 성과는 지난 호에서 잠깐 언급한 건안문학(建安文学)과 함께 상당히 큰 성과와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 연구 결과입니다. 여기서 그 부분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으므로, 그녀의 작품 중에 유명한 두 작품의 일부 내용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작품 중에 가장 연구가 많이 된 것은 바로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과 《비분시(悲愤诗)》 두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호가십팔박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호가(胡笳)라는 악기로 18박을 연주한다는 뜻인데, 자신이 태어나서부터 난리를 당하여 남흉노에게 잡혀가고, 그 이역에서 겪었던 고통과 또, 조조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오는 상황에서 겪는 자식들과의 생이별의 아픔을 잘 표현한 장편 시라고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비분시는 호가십팔박과 내용 면에서 서로 비슷하지만, 시기적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뒤돌아보면서 좀 더 세밀하게 묘사한 5언시의 걸작이라고 하겠습니다. 두 시의 내용에 모자간의 이별의 아픔과 함께 강한 모성애가 느껴지는 부분이 있어 그 부분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보면, 한이 멸망하고 조조가 득세하자 남흉노와 비등한 세력을 얻음으로써 일종의 정치적 계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잠깐 상술한 바와 같이, 이에 조조는 채문희를 만금을 주어 데려오게 하는데, 이때 채문희는 좌현왕과의 사이에서 얻은 두 자식을 함께 데려올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이 상황은 두 시에 비교적 자세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먼저, 호가십팔박의 13, 14박 언급 부분입니다.

“누가 늘그막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나를 안고 있는 가련한 아이들은 눈물이 떨어져 옷을 적신다. 한나라 사신이 나를 영접하는데 네 필이 끄는 수레가 위풍당당하나, 아이들이 울어 어미의 마음은 실성하였는데 누가 알 수 있는가? 어찌하여 하필이면 이때 우리 모자를 이별하게 하는가? (생략) 13拍은 현이 급박하고 곡조가 슬퍼, 간장을 휘저어 찌르는 것 같은데 어느 누가 알겠는가?”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아이들은 따라갈 수 없고, 마음에 걸리는 것은 늘 배고픔에 시달리는 것이다. (생략) 14拍은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떨어지고, 황하의 강물은 동쪽으로 흐르는데 모두가 아이들을 생각하여 흐르는 눈물이다.”

[주석] 번역문 인용.

 

두 번째, 비분시의 언급 부분입니다.

 

“우연히(고향 사람을)만나서 돌아가길 바라니 고향에서 나를 맞이하러 왔다. 나는 이제 풀려나지만, 응당 다시 아이들을 버려야 하는구나. (생략) 아이가 나에게 안겨서 묻기를 “어머니는 어디로 가려고 하나요? 사람들이 말하길 어머니는 당연히 가야 한다고 하니, 이제 다시 만날 때가 있나요? 엄마는 항상 어질고 상량하였는데 이제 와서 왜 다시 자애롭지 못하나요? 나는 아직 어른도 아닌데, 어찌 다시 생각해보시지 않는 건가요?” 이를 보는 내 오장육부가 무너지며, 정신이 아득하여 미칠 것만 같았다. (생략) 멀고 먼 삼천리 언제 다시 서로 만날 수 있겠는가? 내가 낳은 자식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찢어지는 듯하구나.”

[주석] 번역문 인용

 

위에 부분 언급된 두 시의 내용을 보면, 혈육 간 이별의 애틋함과 함께, 채문희가 왜 굳이 12년간의 생활로써 이미 다 적응한 변방의 삶을 자식들을 버리면서까지 떠나려고 했는지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개인적, 정치적 상황이 내재하여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상황은 실제로 겪어보지 못한 현재 우리의 일반적 상상의 범위로는 감히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요인이 뒤얽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외적 배경을 잠시 접어두고, 두 시 속에 표현된 그녀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인 채문희는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더욱이 그 결정으로 말미암아 죽을 때까지 흉금에 남아있었을 자식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은 어떤 표현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일종의 극한 고통이었을 것이라는 것도 쉽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반추하여 보면, 그녀는 발분(發憤)의 심정으로 이 두 편의 시를 써냄으로써 연약한 아녀자가 겪어야만 했던 그 시대의 처절한 삶의 행적을 조금이나마 남기고자 하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기억해두기

 

《단어》 

词语(어휘) : 發憤
拼音(병음) : fāfèn

 

《예문》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
fāfènwàngshí lèyǐ wàngyōu bùzhī lǎo zhī jiāng zhì。

 

발분이란 말은 원래 『논어』에서 나온 말인데,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에 관하여 물었는데, 자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이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그의 사람됨이, 발분하여 밥 먹기도 잊으며, 즐거워 근심을 잊어서, 늙음이 닥쳐오는 줄도 모른다. 이와 같을 뿐이다.’라고.”

[주석]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논어』, 믿음사, 1966, p.151.<술이편 7-18> 인용.

 

발분을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울분을 토해낸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어떤 억울함이 신변에 닥쳐왔을 때 그것을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입지를 세워서 더 큰 뜻을 이룬다는 의미로 많이 쓰이는 표현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그런 경우가 많이 있겠지만, 쉬운 예로 중국 전한의 사마천은 궁형을 받았으나 그 치욕을 감내하고, 감옥에서 『보임안서(報任安書)』를 써서 친구에게 자신의 의지를 피력하였으며, 결국에는 대역사서인 『사기(史記)』 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호에는 지괴소설집 《수신기》에 언급된 견우직녀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第三幅, 文姬別子 (두 아들과 이별하는 그림)


이제 떠나야 하는데, 큰아들은 어머니 옆에 서서 울고 있고, 둘째는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 엄마 품이 그립기만 하다.

 

第六幅, 母子重逢 (두 아들과 상봉하는 그림)


8년이 지난 후에 두 아들이 한나라로 와서 어머니를 만나는 모습, 사료에는 그 내용이 없지만 이렇게 해피엔딩이었길 바라본다.

 


문희귀한도 文姬歸漢圖

 



WRITTEN BY 송희건

“君子以文會友, 以友輔仁.”
“군자는 배움으로 친구를 사귀고, 그 친구로써 인의를 다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