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지 중에서 오지인 첩첩산중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는 집에서 10리 길로 차 한 대가 겨우 다닐 만한 신작로를 걸어서 다녔다. 할머니는 멀리서도 손자 모습이 보이는 모실방우까지 자주 마중 나오셨다. 손자가 할머니를 발견하고 뛰어오면, 자세를 낮추어서 껴안고는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며 “아이고! 내 강생이가 핵교 다녀왔구나!” 하고 기뻐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로부터 60년이 흘렀다.
내게는 초등학교 2학년인 손자와 그보다 네 살이 어린 손녀가 있다. 손자가 태어나던 날, 병원에서 아이를 유리창 너머로 보았다. ‘생명의 탄생’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내 자녀가 낳은, 나의 대를 이을 나의 분신이라는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손자(손녀)가 태어나면, 보고 싶을 때 보고 만지고 싶을 때 만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사람마다 집집이 손자(손녀) 키우는 방법이 다를 줄 안다만, 아들 내외가 맞벌이하느라 처가댁 가까이 살면서 외가에서 키우고 돌보고 있는 처지라 그건 언감생심이었다. 2~3주에 한 번꼴로 데리고 온다지만, 그게 성에 찰 리 없었다.
유치원에 들어간 손자에게는 식사를 같이하는 외조부모는 가족이 되어있었고 우리 내외는 타인이었다. 위로해주는 사돈 말씀, “사돈, 걱정 말아요. 애들이 크면 자기 핏줄 찾아 간대요. 외조부모는 나중에는 허당이래요.” ‘글쎄 그럴까’ 뭔가 씁쓸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누군가 말하듯 ‘이 시대는 새로운 모계사회로 돌아간다.’라는 억장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손자가 초등학생이 되고부터는 한 달에 한번 보기도 어려워졌고, 목소리도 듣기 어렵다. 가끔 전화를 하면 “할아버지, 지금 숙제 중이거든. 내가 시간 나면 전화할게요.”라고는 끊어버린다. 아쉬움과 서운함이 남아있었는데, 사돈 내외가 12일간 유럽여행을 떠나면서 우리 부부가 돌보게 되어 실상을 알게 되었다.
아내는 5일간(1박 2일이 두 번), 내게도 이틀이 배정되었다. 손자가 보여주는 일과표에는 학교에서 학원으로 잠시 집에 들렀다가 다시 학원으로 가는 시간표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과외가 다섯 개나 되어서 토요일까지도 짬이 없었고, 5시쯤 집에 도착하면 어린이 프로를 보거나 숙제하기에 바쁘다. 손자(손녀)는 언제 어디에 있는 간식을 몇 개나 먹어야 할지도 줄줄이 외우고 있었다. “왜 그렇게 많은 학원엘 보내나?” 하니 아들 말로는 “애가 좋아하고 다른 애들도 그러니까….”라고 한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손자에게 전화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 같다.
손자는 제일 먼저 도서관에 가서 책을 봐야 한다며 8시 20분에 집을 나가고 손녀와 둘이 남았다. “어떤 장난감을 좋아하는지 한번 볼까?” 양팔을 까짓것 벌리고는 “안 돼, 내 거야!” 한다. “할아버지 물건은 마음대로 만지고 고장도 냈잖아.” 하니,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알았어. 마음껏 하세요.” “아니야, 남의 물건을 만지려면 허락을 받고 만져야 한다. 알았지?” 마지못한 표정으로 그런다. “알았어요.”
전에나 지금이나 손자(손녀)가 집에 온다면, 만사 제쳐 두고 마루를 쓸고 닦고 난리를 친다. 애들이 집에 도착할 때쯤이면 아파트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다가 현관을 들어서면 나는 두 팔을 벌리고 “아이고! 내 손자(손녀) 왔구나.” 하고 끌어안는다. 마치 내 할머니가 나를 끌어안고 그랬던 것처럼.
세상이 바뀌고 또 바뀌어도 가족의 내리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세대는 그렇게 계속 이어지는 게 아닌가! 손자(손녀)를 안을 때마다 할머니가 생각나는 것은, 할머니의 손자사랑이 고스란히 내 손자에게 전해지는 것 같고, 그때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빠져든다.
글 / 사외독자 이성재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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