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이 찡해지는 아침이다. 아직 가을을 제대로 느껴 볼 새도 없었는데, 기온은 급강하했다. 겨울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어도 비집고 들어오는 찬바람을 막을 수 없다. 얼굴에 닿는 공기가 어제와는 사뭇 다르다. 이렇게 갑자기 추워지고 나면, 엄마는 김장 생각이 가장 먼저 나는 것 같다. “올해는 한 30포기 정도는 김장해야 할 텐데...” 그도 그럴 것이, 시골에 살 때는 추위가 일찍 찾아오기 일쑤라 도시에서보다는 김장을 서둘러 하곤 했다. 물론, 그때는 엄마가 한창 젊으셨을 때라, 혼자 100포기의 김치도 다 해내곤 하셨다. 배추를 절이고, 김치 속을 만들고, 일일이 속을 넣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철인에 가까웠다. 그때는 우리는 어렸던지라, 김장을 돕기보다는 엄마가 해놓은 김장김치를 먹는 데 재미를 붙였다.
그나마 김장을 도와드리면서 재미있게 끝마쳤던 때는 군대 가기 전이었던 것 같다. 당시 우리 집은 정육점과 식당을 같이 했다. 식당을 하다 보니 김장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는데, 밑반찬으로 김치가 나가야 해서 100포기 이상을 담가야 했다. 식당을 하면서 알게 된 동네 아주머니 두 분이 와서 도와주셨다. 나도 김장을 돕는다고 큰소리를 쳤던 터라 김장이 끝날 때까지 함께하게 되었다. 주로 힘을 쓰는 일을 했다. 강판으로 간 무만 해도 20여 개가 족히 넘었고, 절인 배추를 꺼내는 일도 도맡아 했다. 조심한다고 했었지만 사방팔방으로 물이 튀는 바람에 장화를 신고 앞치마를 둘렀음에도, 양말이며 바지며 흠뻑 젖었다. 김치를 하면서 바지를 두 번 갈아입었다.
장시간 계속되는 노동에 어깨도 아프고 허리도 저리고 손목도 시끈시끈 했지만, 엄마와 두 분 아주머니 이야기를 듣는 게 재미나서 꾹꾹 참을 수 있었다. 수다는 이럴 때 꼭 필요하구나! 마음속 깊이 느꼈다. 밤늦도록 김장은 계속되었다. 이왕 시작한 거 끝을 봐야 한다는 말씀에, 나만 슬쩍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빨갛게 묻은 속이 먹음직스럽게 버무려지고, 잘 절인 배추 속에 끼워 넣자, 근사한 포기김치로 탈바꿈했다. 김장 숙련공들 아니랄까 봐, 준비 과정은 길었지만 김치로 만들어지는 속도는 무척 빨랐다. 뚝딱뚝딱하면 김치 하나가 완성되었으니. 김장이 거의 마무리가 되어갈 때쯤, 엄마는 부엌에서 한참 끓여 낸 아롱사태를 꺼내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이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다. 듬성듬성 썰어낸 고기 한 조각에, 배추에 김치 속을 얹어 먹으니 그 맛이 꿀맛이었다. 제일 좋은 암퇘지의 사태 살이라는 것을 엄마는 강조하셨다.
그날의 특별했던 김장은 잊을 수가 없다. 김장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배웠던 것 같다. 이제는 김장을 그렇게 많이 하지는 않는다. 식구도 많지 않을뿐더러 김치 냉장고 덕분에 한꺼번에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이번 김장은 그 즐거웠던 추억을 상기시킬 수 있도록, 가능한 여러 명을 모아서 함께하는 김장으로 만들어 볼 생각이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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