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모니카 소리가 생각나면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그림부터 떠오른다. ‘화창한 봄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만발한 꽃에 벌과 나비가 날아다니는 뒷동산에 철수와 영희의 정다운 모습이 보인다. 철수는 다리를 꼬고 누워서 하모니카를 불고 영희는 오른팔로 얼굴을 받치고 부러운 듯이 철수를 바라본다.’ 그 당시 도회지로 유학 갔다가 일요일을 맞아 찾아온 고등학생 형이 하모니카로 교과서에 실린 동요를 부르면 달달 떨리는 반주에 반해서 꼬마들이 따라다니곤 했다. 어머니를 졸라서 자그마한 연습용 하모니카를 손에 쥐었지만 워낙 음정에 대한 재능이 부족해서 연습만 하다가 그만둔 것도 기억난다.
지난번에 온 손자가 “할아버지, 친구 집에서 하모니카 불어봤다. (양손을 좌우로 움직이면서) 이렇게 잡아서 숨을 내불고 들이마셨더니 재미있는 소리가 났어.”
‘요즘 애들은 영특해서 말은 안 하지만 이게 사달라는 표현이구나.’
손자를 보내놓고는 새로운 건수가 생긴 기쁨에 인터넷 서핑을 했다.
별 것 아닌 줄로만 알고 있던 하모니카가 종류만 해도 200여 개가 된다고 하는 소개 글에 기가 죽었다. 한 구멍에서 내불고 들이마시기 편하도록 출시된 단음의 다이어토닉과 한 개의 구멍에서 동일한 2개의 음이 울리는 복음 하모니카를 두고 저울질하다가, 오래전에 딸에게 사준 것이 기억나서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20년이 넘은 물건이지만 쓴 적이 거의 없고 Q마크를 획득한 데다 4,000원의 가격표도 그대로 붙어있는, 24홀의 복음, 즉 트레몰로 하모니카였다.
딸이 동요를 한 곡 불어보더니 별문제 없이 음이 나온다면서도 어린이가 쓰기에는 크기는 하지만, 중고품이니 연습용으로 쓰고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면 그때 새것으로 사주는 게 좋겠다고 해서 기꺼이 동의했다. 이번 방문은 하모니카 덕에 손자 입에서 심심하다는 말 한마디 안 들은 것만으로도 할아버지 역할은 다 한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손자는 고모가 가르쳐주는 대로 휘파람을 불 때처럼 입을 최대한 오므려서 내불고 들이마시면서 신나게 도레미~를 반복한다. 그런데 방해꾼이 나타나서 앞뒤로 몸을 흔들며 ‘푸푸’하고부터는 하모니카 소리 반, 울음 반이 되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자녀는 2~3년 터울을 가장 이상적으로 본다. 동생이 생기면 첫 아이가 퇴행현상을 보이거나 동생을 괴롭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첫째가 느끼는 불안감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동생과의 터울이 만 세 살 이상 돼도 이런 경향은 크게 줄어든다.’ 손자와 손녀는 3년하고도 9개월 터울인데 손녀가 도리어 첫째 역할을 하는 게 못마땅하다. 손자가 가지고 노는 것을 훼방 놓거나 빼앗아서 도망치면 손자가 울면서 막이 오른다.
손자는 ‘조금만 가지고 놀다가 동생에게 주라’고 하면 따르지만, 손녀는 가져가면 주는 법이 없다. 손자의 안타까움을 보다 못한 할머니가 빼앗으면 손녀가 우는데, 이런 행동이 반복된다. 손자는 길게 울지만 손녀의 울음소리는 짧은 게 특징이고, 오빠의 등을 두들기면서 “오빠! 울지 마, 울지 마”로 한 막이 끝난다. 동생이 가진 것을 뺏거나 울리면 안 된다고 교육받은 것을 고수하고 있는 손자가 받을 스트레스가 안타깝다.
새로운 것은 집으로 가지고 가는 게 정상인데도 “하모니카는 할아버지 집에서만 불 거야. 아래층에 호랑이 할머니가 시끄럽다고 올라와서 소리치고 야단이거든. 놀이터에서 만나면 도망치기 바빠.”
지난 일 년은 로봇에서 자동차로 변신하는 장난감을 12개나 사주었으니 앞으로는 조립용 레고를 사주기로 했는데, 간단한 악기류도 선물품목으로 보태야 할 것 같다. 무슨 악기든지 연습량이 많으면 많은 만큼 실력이 쌓이므로, 기초부터 꾸준히 연습해서 하모니카라는 악기가 손주들이 자라나는 정서에 긍정적으로 작용해서 생활의 즐거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오누이의 시샘과 갈등은 어떻게 조정할지가 가족에게 던져진 숙제이기도 하다.
글 / 사외독자 이선기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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