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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conductor/스마트 Tip

[역사 속 엔지니어] 헤디 라마르, 할리우드 히로인, 무선통신 기술에 이바지하다

by 앰코인스토리 - 2015. 11. 11.


‘삼손과 델릴라(Samson and Delilah)’ 이야기를 아시나요? 기독교 경전인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로, 여기에는 머리카락에서 힘이 솟아나는 장사 ‘삼손’과 그를 유혹하는 여인 ‘델릴라’가 등장합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1949년 미국 할리우드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져 우리나라에도 종종 추억의 명화로 방영되곤 했었지요. 시각을 자극하는 영화에서는 주인공 삼손만큼이나 뇌쇄적인 외모의 델릴라가 중요했는데요, 이 델릴라 역을 맡은 배우는 헤디 라마르(Hedy Lamarr, 1914~2000)입니다. 당시 그녀는 영화 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성에 뽑히기도 했었지요.


거의 모든 분야가 그렇듯, 여성이 사회생활을 할 수 없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엔지니어는 남성들만의 직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번 소개했던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에이다 러브레이스와 같이 과학기술의 발달 이면에는 많은 여성의 공로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CDMA, 와이파이, 블루투스 등 무선통신 기술도 그렇습니다. 그 숨은 주인공, 헤디 라마르를 만나 보시지요. 과학기술을 떠나 무척이나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요염한 미녀


사진출처 : https://goo.gl/ZqYcZ9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에서 헤드비히 에바 마리아 키슬러(Hedwig Eva Maria Kiesler)라는 여자아이가 태어납니다. 이 아이가 훗날 헤디 라마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집니다. 소녀는 피아노와 발레를 배우고 10대가 되자 베를린의 막스 라인하르트 연기학교에서 연기를 공부합니다. 빛나는 외모와 재능으로 일찍부터 유럽영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지요.

1933년 헤디 라마르의 나이 만 18세에 그녀는 체코에서 제작된 영화 《엑스타제(Ecstasy, 영어명 엑스터시)》에 출연합니다.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호수에서 수영하다 숲 속으로 뛰어가는 모습이 그녀를 유명하게 만듭니다. 영화의 주연급 여배우가 전라로 연기하는 최초의 사례로 기록되기도 했지요. 여배우가 노출하고 성적인 연기를 했다는 것만으로 대서양 이편과 저편이 떠들썩했습니다. 혹시나 기대하지 마세요. 요즘 기준으로는 전혀 야하지 않습니다. 아름답지만 위험해 보이는 얼굴과 전라 연기로 각인된 이미지로 인해, 이후 헤디 라마르는 육체파 배우로 자리 잡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B3bgvz


여기까지만 해도 평생의 이야깃거리가 충분할 테지만, 헤디 라마르는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에 결혼합니다. 영화 《엑스타제》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해였지요. 헤디의 남편은 그녀보다 열네 살이 많은 무기제조업자이자 거래상인 프리츠 만들(Fritz Mandl)이었습니다. 그는 나치에 동조하는 전체주의자였습니다. 헤디 라마르는 오스트리아의 성에 살면서 히틀러나 무솔리니와의 만찬에도 참석하는 호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만들은 헤디 라마르의 연기활동에 반대했고, 그녀를 집에 가두다시피 했습니다. 헤디 라마르는 남편의 감시를 따돌리고 프랑스 파리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코드 분할 다중 접속 개념의 씨앗을 낳다


프리츠 만들과의 짧은 결혼생활이 헤디 라마르에게 남긴 것이 있다면, 과학과의 만남입니다. 결혼생활을 하던 때가 양차 세계대전 사이였던 터라 군용기술 개발사업 관련한 만남이 많았고, 만들은 이 자리에 아내를 동석시켰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수학에 관심이 많았던 헤디 라마르는 무기에 대한 기본 개념을 습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파리에서 이혼 수속을 마치고 영국 런던으로 건너간 헤디 라마르는 할리우드 MGM 영화사의 공동설립자 루이스 메이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1937년 미국 할리우드에서 연기 활동을 재개하며, ‘헤디 라마르’라는 이름을 이때 처음 사용합니다. 이름은 영어식으로 ‘헤디’라고 부르고 성은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 바바라 라마르에게서 따온 것입니다. 헤디 라마르는 눈이 부신 외모와 비밀스러운 분위기로 관능적인 여성 역할을 많이 맡았습니다. 점점 연기력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었지요.


이미지출처 : https://goo.gl/8qJYLQ


할리우드에 자리 잡은 헤디 라마르는 영화음악 작곡자이자 발명가인 조지 앤틸(George Antheil)을 만납니다. 조지 앤틸이 중요한 이유는 헤디가 그와 함께 주파수 도약확산 스펙트럼(FHSS: frequency hopping spread spectrum)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1939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무기는 원격조종 어뢰였습니다. 무선 주파수로 제어되는 어뢰는 적에게 차단되거나 교란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조지 앤틸은 여러 악기의 소리를 제어하는 방식에서 착안해 주파수를 연구했고, 헤디 라마르는 주파수의 스펙트럼을 흩뜨려 송수신자 외에게는 들키지 않게 하는 개념을 고안해 냅니다. 무작위로 동기화된 주파수 대역을 오가며 제어 신호를 보내는 이 방식은 비밀통신 시스템(Secret Communication System)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에 특허등록이 되어 있습니다.


말년의 쇠락과 뒤늦은 인정


사진출처 : http://goo.gl/78Xwc1


연기 인생에서는 그녀 나이 30대 중반에 찍은 《삼손과 델릴라》가 헤디 라마르의 정점이었습니다. 1957년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더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고 대중의 기억에서 점차 사라졌습니다. 헤디 라마르는 평생에 걸쳐 여섯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합니다. 1960년대 중반 이미 여섯 번째 이혼을 한 헤디 라마르는 어찌 된 일인지 LA의 한 백화점에서 물건을 훔쳐 구설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헤디 라마르가 개발한 주파수기술 방식은 그녀의 이름과 함께 오랜 세월 묻혀 있었습니다. 군에서 이 기술을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에 들어서야 통신 기업들에 관심을 끌었는데, 특허권이 1959년에 만료되었기 때문에 헤디 라마르는 어떤 이득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발명한 주파수 도약 개념은 수십 년 후 한국에도 도입된 CDMA 방식의 휴대전화에까지 적용됩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RWUo14


1997년 미국의 전자개척재단(Electronic Frontier Foundation)은 ‘전자공학의 최일선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한 공로’라는 명목으로 헤디 라마르에게 뒤늦은 공로상을 수여합니다. 1999년 미국영화협회가 뽑은 ‘미국영화 초기 은막을 빛낸 가장 영향력 있는 스타 50명’에도 이름을 올린 헤디 라마르는 이듬해인 2000년 플로리다 자택에서 숨을 거둡니다.

헤디 라마르가 몇십 년만 늦게 태어났다면, 하는 부질없는 가정을 해봅니다. 배우였다면 더 폭넓은 연기를 더 오랫동안 보여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과학자였다면 그 나름대로 더 많은 기술을 선보일 수 있었겠지요. 우리 역시 편견 어린 시선으로 누군가를, 어떤 가능성을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Hedy Lamarr's 101st Birthday Google Doodle

영상출처 : https://youtu.be/Z0gu2QhV1dc


글쓴이 김희연은_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자기 과시에 지나지 않는 착한 글이나 빤한 이야기를 피하려고 노력하며 쓰고 있다. 경력에 비해 부족한 솜씨가 부끄럽고, 읽어주는 독자에게는 감사하며 산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