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발명은 ‘세렌티피티’처럼 우연하게 느닷없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지난해 [역사 속 엔지니어]에서 다루어졌던 수많은 발명가의 발명들도 그러했는데요, 사진기 발전의 한 획을 그었던 루이 자끄망테 다게르(Louis J, M, Daguerre, 1787~1851)의 발명 역시 그렇게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vQnPMz


다게르는 1787년 11월 18일 프랑스 코르메유 장 파리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원래 직업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원리를 이용하여 극장무대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습니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어두운 방’이라는 뜻인데요, 오늘날 카메라의 어원이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캄캄한 방 한쪽 벽에 조그만 구멍을 뚫어 빛을 통과시키면 맞은편 벽에 외부 풍경의 상이 거꾸로 맺히는 원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한 번쯤 만들어본 ‘바늘구멍 사진기’ 혹시 기억하시나요? 그것이 바로 카메라 옵스큐라인 셈이지요.


▲ 카메라 옵스큐라 원리

사진출처 : (좌)https://goo.gl/Kt7IPU/(우)https://goo.gl/ZOZRwk


이런 원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화가들이 사물이나 풍경을 그릴 때 사용되어 오던 기법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림의 원근법적 시각의 정확성을 위해 이 방법을 언급하기도 하였지요. 다게르는 카메라 옵스큐라 초점판에 비친 아름다운 장면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졌습니다. 1827년경부터 본격적인 사진 연구에 몰두하였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파리의 렌즈가게에서 사진을 연구하고 있던 ‘조세프 니엡스’를 알게 됩니다. 사실, 그는 이미 자신의 집 앞에서 사진을 찍었을 정도로 다게르보다 먼저 사진 연구에 한발 앞선 인물입니다.


니엡스는 비튜멘(bitumen)을 칠한 금속판을 카메라 옵스큐라 벽면에 세워 1826년 최초로 사진을 찍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니엡스의 ‘헬리오그라피’인데요, ‘태양으로 그리는 그림’이란 뜻에 걸맞게 장장 8시간이나 태양 빛에 노출해야 했으며 단 한 장의 사진만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긴 시간 동안을 찍어야 하는 탓에 풍경을 찍을 때는 태양의 위치가 변하여 두 개의 해가 사진 속에 나타나기도 하고, 몇 시간씩 꼼짝 못 하고 있어야 하는 인물 사진은 더욱 찍기 어려워 카메라만 보면 모델들이 도망가 버렸다고 합니다.


▲ 헬리오그래피와 니엡스 초상화

사진출처 : (좌)https://goo.gl/8gerbW/(우)https://goo.gl/8NzMsX


그런 상황에서 다게르가 니엡스를 만나게 된 것이지요. 다게르는 자신과 함께 사진 연구에 함께할 것을 니엡스에게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함께 공동연구를 진행하던 중에 니엡스는 사망하게 됩니다. 다게르는 니엡스의 사진이론을 발판 삼아 혼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되지요.


그는 우선 빛에 분해되기 쉬운 은염을 연구하였습니다. 은도금 동판에 요오드 증기를 씌워 햇빛에 노출하면 희미한 영상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형체를 정확히 알 수 없어 사진이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온갖 연구를 시도했지만 형상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가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그는 희미한 형상이 나타났던 판을 약품 저장소에 두었다가 꺼내 보게 되고, 형상이 제법 선명해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니, 수은 온도계가 깨져 있었습니다. 분명히 수은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직감하게 되었지요. 햇볕을 쬔 은판에 수은 증기를 쐬어 이미지를 드러나게 하면 오늘날의 흑백 사진과 같은 포지티브 영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방법은 니엡스의 사진보다 선명한 영상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었고 촬영 시간도 30분 정도로 단축되었습니다. 다게르는 이를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1839년, 최초의 은판 사진기였습니다.


▲다게르가 촬영한 ‘탕플대로의 풍경’

사진출처 : https://goo.gl/YrwWoB


▲다게레오타입 

사진출처 : https://goo.gl/50HcfB


사진은 예상대로 폭발적 인기를 얻으며 여러 분야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다게레오타입은 특히 미국에서 1850년대까지 3백만 개가 넘게 팔렸고, 전문 직업으로 활동하는 사진사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새로운 발명으로 새로운 직업이 생겨난 것이지요. 특히나 사진기술이 발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크림전쟁이나 남북전쟁 때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는 도구로써 유용하게 쓰이면서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는데요, 공식 종군기자가 생기고 이들이 활동한 ‘르포르타주’라는 새로운 영역이 생겨나면서 ‘리포터’라는 새로운 직업도 생겨났습니다.


그 이후로도 카메라 사진기술은 영국의 탈보트(Talbot, 1800~1877) 등 여러 나라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에 의해 계속 연구되고 발전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게르는 훗날 니엡스의 공로를 살짝 숨기고 혼자 명예를 차지하려고 하여 구설에 올라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혜택은 어느 한 사람만의 업적은 분명히 아닌 듯합니다. 그동안 등장했던 역사 속 엔지니어들처럼 또 다른 발명은 앞선 사람의 발명이나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 발명의 기초를 닦아준 앞사람의 공로를 정정당당히 인정하는 것, 꼭 필요하겠지요?




글쓴이 한지숙

글에도 다양한 표정이 있다고 믿는 자유기고가.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 인터넷 공간이라 할지라도 글을 통해 많은 이들과 마음을 나누기를 희망한다. 이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거울 대신 키보드로 표정 연습에 열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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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갑부 1, 2위를 다투는 빌 게이츠의 집은 초호화 저택으로 유명합니다. 최첨단 기술의 향연으로 불리는 이 집의 구조물과 용도는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한 곳인데요, 그중에서도 빌 게이츠의 서재이자 도서관은 철통 보안을 유지하는 곳입니다. 바로 이곳에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h, 1452~1519)의 ‘코덱스 해머(Codex Hammer)’ 원본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Ve5YJu


다빈치가 생전에 작성했다고 알려진 72쪽 분량의 코덱스 (Codex, 현대의 책과 비슷한 형태로 낱장들을 묶어서 표지를 싸던 서양의 책 제작 방식) 노트가 1994년, 최고 경매가 3,080만 달러를 기록하며 마이크로소프트사 빌 게이츠 회장에게 팔린 것이지요. 왼손잡이였던 다빈치의 거꾸로 된 거울 필체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뭔가 신비스러움까지 느껴지는 노트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빌 게이츠는 이것을 경매에서 사들인 뒤 디지털로 스캔하고 윈도 95 스크린 세이버와 월페이퍼, CD 등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해마다 다른 도시의 박물관에서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천재 예술가 겸 과학자가 남겼던 연구와 창의적 정신을 현대의 우리와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을까요?


사진출처 : https://goo.gl/6zzj5M


코덱스는 예술뿐만 아니라 과학, 천문학, 지리학, 건축, 기계, 로봇, 인체 해부 등 분야를 넘어서 천재성을 지녔던 다빈치의 아이디어가 총망라된 300장가량의 보물 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빈치는 관념적인 지식보다는 도해를 통한 ‘실물 교수’의 효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더욱 효과적이고 사실적인 인체 드로잉을 위해 해부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이 그런 점을 잘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날아다니는 새는 물론, 남녀 구분 없이 어린이나 노인, 심지어 임산부까지 30구가 넘는 시체를 해부해 보았다고 하니 그의 집념이 대단했다는 느낌입니다. 인체의 뼈와 각 부분, 근육, 생식기관, 심장, 혈관계 등을 모두 연구하여 스케치로 남겼습니다.


최초로 인간의 척추골을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정확하게 그려내기도 했지요. 또한, 눈이 사물을 보는 굴절 방법을 밝혀내 현대 콘택트렌즈의 원리를 최초로 생각해 낸 사람이기도 합니다. 인체의 신비를 밝혀낸 인체 비례도와 해부도 스케치는 후세 의학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mkbHxe


다빈치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창안한 헬리콥터는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는 단풍나무 씨앗을 본 뒤, 기계의 바람개비를 빠르게 돌리면 공중으로 뜰 수 있다고 생각하여 착안한 것입니다. 또한, 새와 곤충을 유심히 관찰하고 비행하는 원리를 알아내고자 끊임없이 연구하고 스케치하였습니다. ‘퍼덕이는 날개’, ‘기계 날개’ 등은 새의 날갯짓을 흉내 내고자 시도했던 다빈치의 유명한 발명품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당시에 직접 비행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 시대에 그런 생각과 시도를 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kKXxDu


지난 2000년에는 영국 출신의 ‘아드리안 니콜라스’라는 사람이 다빈치가 스케치한 낙하산 원리를 그대로 재현하여 비행하는 데 성공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미치광이 과학자의 이상한 시도라고 손가락질당했던 다빈치의 발명품 스케치들은 세월이 가면서 아주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과학적 실험을 통해 증명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했습니다.


이 밖에도 다빈치가 고안해 낸 발명품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다연발 포, 낫이 달린 마차, 조립식 대포, 장갑차, 투석기 등은 전쟁용으로 고안되었던 발명품이었습니다. 수력으로 작동되는 장치인 기계톱, 외륜선, 움직이는 아치형의 다리와 작업기계인 연마기 등을 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두개골 모양의 리라, 자동 드럼, 피아노 건반 모양이 있는 비올라 오르가니스타 등의 악기까지 정말로 다방면의 발명 천재였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MduzeL


사진출처 : https://goo.gl/NcfI5f


모든 예술작품과 발명품의 출발점이 되었던 자연과 사람,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인간은 혼자일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만나고 자연을 정확히 감지할 수 있다.’는 그가 남긴 말처럼, 자연 현상을 탐구하는 데 지칠 줄 몰랐던 그는 작품활동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거의 모든 시간을 자연 속에서 혼자 깊이 사색하며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레오나르도의 창의적 발상이 여러 방면에 영향을 끼치며 오늘날까지도 계속 재조명되고 있지요.


2016년 12월부터 2017년 4월까지 뜻깊은 행사도 열리고 있습니다. ‘문화역서울 284’에서 열리는 <다 빈치 코덱스 전시회>가 그것인데요, 이번 전시는 20년간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연구해온 공학자와 디자이너로 구성된 연구팀, 여러 명의 작가가 각기 다른 분야에서 레오나르도의 방식과 정신을 계승한 작품을 선보인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자연과 인류, 그리고 기계공학의 균형이 얼마만큼 멋진 조화를 이루어내며 현대 공학자들에 의해 재해석되고 있는지 직접 가서 한 번 구경해보는 것도 좋겠지요? 2017년 새해를 맞이하며 가족과 함께 특히 자녀들과 함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창의적 도전정신을 간접경험 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기록된 미래, 다빈치 코덱스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글쓴이 한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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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2월 10일에는 세계적으로 각 부분에서 업적과 공로를 인정받은 사람에 대한 노벨상 수상식이 이루어지는데요, 올해 노벨상 수상자 중 미국 음악가인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기로 되어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관심과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노벨상은 1901년에 처음 시작되어 전쟁 시기를 제외하고는 해마다 열리고 있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 상은 바로 다이너마이트 발명가인 노벨(Alfred Bernhard Nobel, 1833~1896)의 유언대로 만들어진 상입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IlqQlb


노벨은 1833년 10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발명가이자 공학자로 활동하던 아버지 이마누엘 노벨의 영향을 받아 어린 노벨도 공학의 기초를 다지게 됩니다. 아버지를 따라 1837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 그곳에서 아버지의 광산발파용 폭탄 개발이 크게 성공을 거두게 되고, 부모의 경제적 성공으로 노벨은 가정교사를 따로 두는 등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16세에 이미 화학자로서 소양을 갖추고 스웨덴어는 물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5개 국어에 능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7세에는 파리에서 1년간 화학공부를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장갑함 모니터호를 만든 존 에릭슨 밑에 들어가 4년간 일하며 기계공학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던 중 군수물자를 생산하며 승승장구하던 아버지의 회사가 크림전쟁이 끝나면서 경영난을 겪다가 끝내 파산을 맞게 됩니다. 아버지를 따라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온 노벨은 본격적으로 폭탄제조 실험에 뛰어듭니다. 그 무렵 발견되어 사용되고 있던 나이트로글리세린은 폭발성은 뛰어나지만 안전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노벨은 이 물질의 이상 폭발을 제어할 방법을 연구하던 중, 1863년 소량의 흑색화약을 폭발시켜 나이트로글리세린의 폭발을 유도할 수 있는 실용적인 뇌관을 발명하는 데 성공합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eZ3xCU


1865년에는 한발 더 나아가 폭발성 캡슐(blasting cap)을 발명하여, 고성능 폭탄시대를 여는 신호탄을 울렸습니다. 이로 인해 막대한 부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지요. 그러나 1864년 9월, 스톡홀름에 있는 그의 한 공장에서 나이트로글리세린 폭발이 일어나 동생을 비롯한 직원 다섯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점점 그를 미치광이 과학자로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스웨덴 정부에서도 그의 실험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공장 재건을 허락하지 않게 되지요.


사진출처 : https://goo.gl/Oek4hT


그러나 노벨은 실험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연구한 끝에 1867년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합니다. 나이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에 스며들게 하고 이것을 말리면 사용과 취급에 더욱 안전해진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이 새로운 물질에 ‘힘’이라는 뜻을 가진 다이너마이트로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지요. 그 이후에도 그의 연구와 발명은 계속되어 폭발성 젤라틴, 발리스타이트 등을 만들어 내었고, 발사만으로 폭발되지 않는 안전한 뇌관을 또 한 번 발명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syUaYL


노벨의 공장은 스웨덴, 독일, 영국 등 전 세계로 뻗쳐나가 세계 최초 국제적인 회사 ‘노벨다이너마이트 트러스트’회사가 세워집니다. 때마침 그의 형제들이 카스피 해 유전 개발에 성공하여 노벨 가문은 유럽의 최대 부호로 자리 잡게 됩니다. 가히 ‘노벨 제국’이라고  불러도 무방했을 만큼 막대한 영향력 아래 어느 한곳에 오래 머물러 살지 못할 만큼 바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폭약 등이 전쟁을 빨리 종식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던 그의 바람과는 달리, 폭발 무기들은 대량 살상을 초래하고 각종 이권에 이용되는 무기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유전사업에 성공했던 노벨 동생 중의 한명이 1888년에 사망한 것입니다. 이를 두고 파리의 한 신문이 노벨이 죽은 것으로 착각하고 ‘죽음의 상인 노벨, 사망하다’라고 오보를 냅니다. ‘사람을 더 많이, 더 빨리 죽이는 방법을 연구해 부자가 된 사람’이라는 기사를 읽고, 사후에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그런 부정적 평가에 충격을 받아 어떤 심경 변화의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요?


사진출처 : https://goo.gl/KbphkQ


그런 이유에서였는지 아닌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는 사후 노벨상을 제정하여 자신의 거의 전 재산이 노벨상을 수여하는 데 사용되도록 유언장을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에 따라 물리,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경제(1968년 추가) 6개 부문에 국적과 나이, 성별에 상관없이 인류사회에 공헌도에 따라 수상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g4s7xi


그의 다이너마이트 발명이 인류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필요악이었는지 아직도 견해 차이는 분분합니다. 동시에 그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나 의견도 많은 차이가 있지요. 분주하면서도 고독했고, 비관주의자인 듯하면서도 이상주의자였던 그는 전쟁에서 큰 살상을 초래한 폭탄을 발명했지만, 전 재산을 바쳐 인류평화에 이바지하는 자에게 주는 상을 지정한 역설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았던 그의 삶을 여러분은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글쓴이 한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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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엔지니어] 마이크로오븐 발명가 퍼시 스펜서


아직 쌀쌀함이 가시지 않은 1947년 이른 봄, 미국 보스턴의 한 레스토랑 앞에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사람들은 가게 앞에 붙은 안내 표지판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지요.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 레스토랑에서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마치 마술과 같은 방법으로 음식을 요리하여 손님 여러분을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꽃이 없는 전열 기구 즉, 마이크로파를 이용해 멋진 요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마이크로웨이브오븐(microwave oven, 일명 마이크로오븐 혹은 전자레인지) 사용의 최초 기록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당시 사람들에게 불꽃이나 발열판 없이 조리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누가, 어떻게 이런 물건을 처음 생각해 내었을까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우연한 사건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듯, 인류에 큰 공헌한 발명품이나 발견 또한 우연한 것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은데요,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퍼시 스펜서(Percy Spencer, 1894~1970)가 발명한 마이크로오븐이 아닐까 합니다.


▲ 퍼시 스펜서의 모습

사진출처 : https://goo.gl/IhmmGm


퍼시 스펜서는 1894년 미국 메인 주, 하울랜드(Howland)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일찌감치 돈을 벌기 위해 공장에서 일하였습니다. 전기에 대한 지식이 희박했던 시골 마을에서 동네 제지공장 전기 설치에 우연히 지원하게 되었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독학한 결과, 나름 숙련된 전기 기사로 성장합니다. 그의 나이 18세가 되던 해에는 미국 해군에 지원하는데요, 이때 선배로부터 타이타닉 배가 침몰할 때 그 배에 승선했던 한 무선 통신사의 활약상을 전해 듣고 크게 감명하여, 무선통신 기술에 대해 흥미를 갖고 공부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삼각함수, 대수학, 화학 물리, 금속공학 등을 독학하여 무선통신은 물론 전기, 전자파 등의 지식을 섭렵하였습니다.


▲ 미군 수뇌부 앞에서 마이크로파 장비를 소개하는 퍼시 스펜서

사진출처 : https://goo.gl/oDyr9V


1939년, 45세가 된 스펜서는 레이더 튜브 설계 분야에서 세계적인 전문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합니다. 그는 미 국방부 군납업체인 레이시언(Raytheon)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의 명성과 실력 덕분으로 전투용 레이더 장비를 개발하는 정부의 입찰을 따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이더 장치 개발과 사용은 전쟁의 양상을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한 프로젝트였습니다. 레이더의 핵심기술인 마이크로파 신호를 발생시키기 위해서는 마그네트론이 사용되었는데, 17개의 마그네트론을 생산하던 레이시온 사가 스펜서의 연구로 하루에 무려 2,600개의 마그네트론을 생산할 수 있는 고성능 기술을 갖추게 된 것이지요. 스펜서가 고안한 이 레이더는 성능이 우수하여 물속의 독일 잠수함 잠망경을 감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 주요 부품인 마그네트론

사진출처 : https://goo.gl/Me3eXL


그런데 언제, 어떻게 마이크로오븐이 탄생하게 된 걸까요? 어느 날, 스펜서는 여느 때처럼 그의 작업실에서 레이더용 마이크로파 발생 장치인 마그네트론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었습니다. 배가 고파진 스펜서는 주머니에 넣어둔 초콜릿 바를 먹으려고 꺼냈는데, 초콜릿 바가 다 녹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무심히 넘어갔다면 오늘날의 전자레인지는 적어도 몇십 년 뒤에나 만나 볼 수 있었겠지요. 스펜서는 이런 현상을 이상하게 여기고 말린 옥수수를 마이크로파에 노출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옥수수 알이 여기저기로 흩어지며 팝콘으로 튀겨져 나왔습니다.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웨이브 팝콘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또 다른 실험으로 찻주전자 속에 달걀을 넣고 마그네트론을 작동시켰습니다. 달걀이 요동치는가 싶더니 터져버렸는데요, 이런 여러 실험을 통해 마이크로파가 음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그의 호기심을 사실로 증명해내었지요.


▲ 세계 최초의 전자레인지인 레이더레인지

사진출처 : https://goo.gl/Q2uTtc


실험에서 확신을 얻은 스펜서는 곧장, 고밀도 마이크로파 발생장치를 붙인 금속상자를 만들었습니다. 금속상자 안의 마이크로파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완전히 차단하여 1945년 10월,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오븐 특허를 신청합니다. 최초의 상업적 마이크로오븐은 자그마치 높이가 167cm, 무게가 340kg, 가격도 일반 가정의 1년 치 월급과 맞먹었다고 하니 어마어마하죠?


▲ 1961년 원자력 선박 NS Savannah에 설치된 레이시온 사의 레이더레인지

사진출처 : https://goo.gl/y3XiOs


스펜서는 공로를 인정받아 레이시온 사의 수석부사장이 되었으며, 그가 있는 동안 레이시온 사는 300여 개가 넘는 특허를 따냈습니다. 또한, 그는 매사추세츠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초등학교 중퇴 학력은 그에게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인류에게 있어서 위대한 발견 중의 하나가 ‘불의 사용’이라고 한다면, 아이러니하게도 불을 사용하지 않고 음식을 데우고 조리할 수 있게 된 도구의 발명은 또 다른 획기적인 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연을 우연으로만 치부해버리지 않고 호기심을 갖고 탐구했던 한 사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요. 역사 속의 그 한 사람,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요?




글쓴이 한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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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엔지니어] 벤저민 프랭클린, 철저한 자기관리로 수많은 업적을 남기다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은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미국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사람으로, 미국 100달러짜리 지폐에 나온 인물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 독립전쟁 때 프랑스의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얻어내고 영국과 협상하는 자리에 대표로 참석하여, 13개 식민지를 하나의 주권국가로 승인하는 조약을 맺었습니다. 미국 헌법의 뼈대를 만든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미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우상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인이 아닌 우리에게도 역사 속 의미 있는 인물로 여전히 회자하고 있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겠지요?


사진출처 : (좌)https://goo.gl/lV6Hoz/(우)https://goo.gl/C0Bmym


몇 달 전, 눈으로 봐도 잘 실감 나지 않는 깜짝 놀랄 장면이 뉴스에 나왔습니다. 이동 중이던 300여 마리가 넘는 순록 떼가 한꺼번에 떼죽음을 당한 장면이었는데요,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노르웨이 하르당에르비다 고원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면서 강하게 내려친 벼락에 맞아 이동 중이던 순록 떼가 한꺼번에 즉사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노르웨이의 자연적 특성상 동물 10여 마리 정도가 낙뢰로 감전사 한 일은 가끔 있지만, 이번처럼 큰 규모로 사고를 당한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네요. 아무리 기술이 발달한 현대사회일지라도 거대한 자연현상 앞에서는 한낮 작은 존재임을 깨달으며 다시금 숙연해지게 합니다.


벼락에 강한 전류가 흐른다는 것쯤이야 지금은 누구라도 알고 있는 상식이 되었지만, 1700년대까지만 해도 그런 사실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 시대에 번개와 벼락에 전기가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실험에 성공하며 피뢰침까지 처음 생각해 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벤저민 프랭클린입니다. 그는 정치적 영향력뿐만 아니라 과학적 호기심과 연구를 통해 많은 저술과 발명을 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1752년, 번개와 전기의 관계를 밝히고자 아들과 함께 ‘연날리기 실험’을 하고 난 뒤 썼다는 그의 일기를 살짝 엿볼까요?


사진출처 : https://goo.gl/AG0noL


“나는 아들 윌리엄과 함께 위대한 실험을 시도했다. 비가 올 것 같이 날씨가 흐려지자 연줄에 철사를 늘어뜨리고 그 끝에 실크 리본으로 금속열쇠를 고정한 후 구름 속으로 연을 날렸다. 비가 오기 시작하고 기다리던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열쇠에 손을 갖다 대었다. 갑자기 열쇠에서 ‘퍽’하고 불꽃이 일어났다. 매우 강한 충격이었지만 나는 아픔보다는 기쁨이 훨씬 컸다. 이 실험으로 번개가 구름 속에서 생기는 전기임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이 실험 후에도 번개에 대한 프랭클린의 구체적인 연구는 계속되었는데요. 구리를 여러 갈래로 엮어서 종을 매단 뒤 중간에 청동 공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번개가 치면서 공을 건드리면 종소리가 울리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에서였지요. 번개가 치던 어느 날 밤, 종소리가 울릴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지만, 대신에 기다란 백색 광선의 번개가 바닥으로 환하게 내리꽂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번개가 구리선과 종을 지나 땅으로 흡수되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피뢰침의 기본 원리를 발견한 계기가 됩니다. 그 후로 높은 건물들에 피뢰침이 세워지고 낙뢰로 인한 화재나 사고를 많이 예방할 수 있게 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이 밖에도 프랭클린은 피뢰침을 발명하기 전, 목조 건물을 위해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 난로를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프랭클린 난로’라고 불리는 이 난로는 오늘날까지도 그 이름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데요. 금속을 댄 상자 형태로 벽에서 떨어져 있어서 뒷벽으로 많은 열이 소실된 이전의 난로에 비해서 효율성과 안전성이 개선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독서를 할 때 사용하던 볼록렌즈와 멀리 볼 수 있는 일반 안경을 하나로 합쳐서 최초로 다초점 안경(이중 안경)을 발명하기도 했습니다.


사진출처 : (좌)https://goo.gl/Yl9iPL/(우)https://goo.gl/z5y0vl


그는 생전에 많은 저술활동을 했습니다. 17세부터 벌써 신문에 ‘Silence Dogwood'라는 필명으로 기고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후로 쓴 자서전을 비롯하여 대표적인 그의 저서 「부자가 되는 법」,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 등은 당시 부자들의 행태를 꼬집고 근면, 절약 등의 덕목을 내세워, 바른 저축과 소비의 미덕을 담고 있습니다.


바른 사람이 되기 위한 13가지 덕목을 제시하며 스스로 체크 리스트를 만들어 일주일 동안 잘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덕목에는 검은 점을 찍어 넣었습니다. 그 검은 점들을 점점 줄여가면서 살려고 노력했다고 하니, 그런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정신이 그의 저서들에 고스란히 전해져 삶의 성공을 위한 필독도서처럼 꾸준히 읽히고 있습니다. 그의 청교도적 정신이 현재까지도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셈입니다.


사진출처 : (좌)https://goo.gl/kWwhRi/(우)https://goo.gl/5GkbsM


이처럼 프랭클린은 정치, 과학, 문학, 사상 등 여러 방면에서 ‘최초’를 기록하며 정신적 우상과도 같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보스턴의 가난한 양초업을 하는 집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이라곤 2년밖에 받지 못하고 생계를 위해 일찍부터 형의 인쇄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젊은 시절의 벤저민 프랭클린. 그러나 철저한 자기관리와 시간 관리로 마침내 부를 이루었고, 성찰과 끊임없는 지식에 대한 탐구가 발명으로 이어져, 마침내 성공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세상을 떠날 때 묘비명에 ‘인쇄인 프랭클린(B. Franklin, printer)’이라고만 적어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럴 정도로 그는 소박한 삶을 살기를 원했다고 하네요. 그가 남긴 수많은 명언이 아직도 우리 입에 오르내리며 삶의 지침이 되는 이유가 되겠지요.


선물같이 찾아온 이 가을, 짧은 계절이기에 자칫하면 아쉽게 흘러가 버릴 수도 있는 귀한 시간입니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힘을 내도록 프랭클린의 명언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오늘이라는 하루는 내일보다 두 배의 가치가 있다.”




글쓴이 한지숙

글에도 다양한 표정이 있다고 믿는 자유기고가.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 인터넷 공간이라 할지라도 글을 통해 많은 이들과 마음을 나누기를 희망한다. 이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거울 대신 키보드로 표정 연습에 열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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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엔지니어] 전화기 최초 발명은 벨이 아니다?! 미 의회가 인정한 최초 전화기 발명가, 안토니오 무치


▲ 안토니오 무치 (Antonio Meucci)

사진출처 : http://goo.gl/hmpH2r


예전부터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사실이 진실이 아니라고 판정이 난다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드시나요? 놀라움과 함께 그동안 속아왔다는 생각에 당황스럽기도 할 텐데요, 그렇게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전화기 최초 발명가라고 알려져 왔던 그레이엄 벨 (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입니다. 전화기를 통해 벨이 처음 그의 조수 왓슨에게 했던 말, “왓슨, 이리 와주게. 자네가 필요하네.” 이 유명한 대화 내용은 우리에게 그동안 위대한 발명가의 명언과도 같이 여겨졌고, 전화기 최초발명자라는 명예와 함께 우리 머릿속에 각인되어 왔습니다.


▲ 그레이엄 벨 (Alexander Graham Bell)

사진출처 : http://goo.gl/rbktWN


그러나 벨의 전화기 발명과 관련, 생전에 600여 건 이상의 끊임없는 특허분쟁에 시달렸다는 점과 남의 발명을 도용했다는 여러 가지 의혹이 계속 제기되어 왔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요. 결국 2002년, 미국의회 하원에서 전화기 최초발명가는 ‘벨’이 아니고 이탈리아 출신의 안토니오 무치 (Antonio Meucci, 1808~1889)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안토니오 무치는 벨보다 무려 16년 이상이나 앞서서 전화기 개발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보다 훨씬 뒤의 벨이 100여 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전화기 최초발명가로 알려지게 된 걸까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난 무치는 1850년 미국에 이민, 한 양초공장에 자신의 돈 상당 부분을 투자하며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양초공장이 도산하게 되고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면서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 가운데도 그는 평소 전기의 의학적 사용에 대해 큰 관심을 두고, 여러 종류의 병들을 전기충격요법으로 치료할 방법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가 처음 음성전송이라는 전화기의 원리에 대해 영감을 얻게 되는 큰 계기가 됩니다. 구리 스패툴라 (copper spatula)를 통해 전기로 다른 방에 있던 환자를 치료하던 중, 환자의 비명이 구리선을 따라 들리게 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지요. 무치는 이 장치를 Telegrafo Parlante라고 불렀습니다. 무치의 아내가 지독한 류마치스 관절염으로 방에서 꼼작 못하고 있을 때, 아내 방과 자신의 작업실을 연결해주는 전화기를 설치해 아내의 안부를 묻곤 했다고 전해집니다.


▲ 안토니오 무치의 Telegrafo Parlante

사진출처 : http://goo.gl/kR9zjT


가난에 허덕였던 무치에게 전화기 원리의 발명은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영구적인 특허권 취득을 위해서는 약 250달러의 비용이 필요했는데, 무치에게 그런 큰돈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10불씩 돈을 내고 해마다 갱신해야 하는 임시특허를 신청(1871년)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마저도 낼 돈이 없어 특허신청을 중단하기에 이릅니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웨스턴유니온 전신회사에 자신의 전화기 상용화를 의뢰해보았지만, 전신회사는 무치가 발명한 전화기의 잠재능력을 미처 깨닫지 못했지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치는 전화기 모델과 설계도까지 잃어버리고(혹자는 도난당했다고 주장함) 말았습니다.


그러던 중, 1976년에 그레이엄 벨이 무치의 전화기 구조와 거의 흡사한 설계도를 가지고 나타나, 자신의 이름으로 특허등록을 해버린 것이지요. 무치는 당연히 항의했고 법적소송도 해보았지만, 재정적 뒷받침이 필요한 기나긴 소송에서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무치는 특허분쟁에서 패소하여 쓸쓸하고 힘들게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전화기의 발명자는 그레이엄 벨로 알려지게 된 것이지요.


벨은 무치 이외에도 동시대를 산 다른 사람들과도 전화기 특허분쟁으로 마찰이 끊임없이 있었습니다. 벨보다 두 시간 늦게 특허를 접수한 바람에 역사 속 주인공과 막대한 부를 거머쥘 기회를 놓친 안타까운 인물로 회자되는 엘리사 그레이 (Elisha Gray, 1835~1901)도 있었고, 과학전문기자인 세스슐만은 「지상최대의 과학사기극」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벨이 특허신청을 낸 날은 1876년 2월 14일이다. 그런데 전화기 음성송신에 성공한 날은 3월 19일이다. 어떻게 만들지도 않은 물건을 먼저 특허신청할 수 있단 말인가. 벨의 실험노트를 보면 엘리사가 발명한 액체 송화기 도안과 전화기 핵심기술인 가변저항 개념을 노골적으로 베끼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엘리사 그레이 (Elisha Gray)

사진출처 : http://goo.gl/rzkiId


▲ 벨의 실험 노트 (가운데 흰색 박스는 그레이 도안)

사진출처 : http://goo.gl/ODnGUC


다행인지 불행인지 엘리사는 그때 당시 전화기 발명에 대한 열망보다는 다중 산업 전신기 발명에 더 큰 관심을 쏟고 있었던 때라, 벨의 행동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우연이라 생각하고 적당한 타협점을 찾았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특허가 나오려면 통상적으로 몇 달이 걸려야 하는 그 시절에 단 몇 주 만에 벨의 특허가 인정되었다는 것, 심지어 발명품을 갖고 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특허를 내주었다는 특허청 관리의 진실고백 사건, 때마침 상원에서는 발명품을 가져오지 않아도 되는 입법이 추진되고, 이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다는 것 등은 우연이라고만 생각하기엔 너무나 의심스러운 일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전화기 최초 발명자에 대한 진실공방은 2002년 미국의회에 의해서 일단락 지어졌습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독일출신 필립 라이스 (1834~1874, 1860년 ’인공 귀‘라는 장치발명), 안토니오 무치, 엘리사 그레이 세 명이 전화기 발명의 유력한 후보로 인정받고 있는데요. 미 의회는 안토니오 무치를 전화기 최초발명가로 인정한 것입니다. 이제, 제대로 전화기 최초 발명가를 찾아낸 것일까요?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겠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생겨나니까요. 진실은 언젠가 꼭 밝혀진다고 믿고 싶습니다.




글쓴이 한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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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엔지니어] 존 해리슨, 크로노미터로 해상 위치확인을 가능케 하다


1714년 어느 날, 영국의 내로라하는 발명가, 과학자, 지식층들이 런던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의회가 내건 어마어마한 상금 200만 파운드(현재 가치로는 수백만 파운드)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1707년 10월 영국 전함 4척이 영국 본토를 코앞에 두고도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해 좌초되어 2,000여 명이 수장되어 버린 사건 이후로 영국에서는 ‘경도’를 통한 정확한 위치 파악이 대국민적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뱃사람들의 탄원서가 앤 여왕에게 전달되었고, 뉴턴과 핼리 (만류인력법칙과 핼리혜성을 발견한 바로 그 사람들)가 중심이 된 ‘경도위원회’가 생겨납니다. 바로 이 위원회에서 포상금을 내걸고 정확한 경도 측정 장치 발명을 종용하게 된 것이지요.


그보다 훨씬 이전에 대항해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마다 원활한 해상교류와 정복을 위해 경도의 중요성은 계속 대두하여 왔지만, 누구 하나 뾰족이 정확한 경도를 측정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18세기 초까지 과학자나 이름난 수학자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여러 가지 방법이 시도되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가령, 천문학자들은 달이 특정한 별을 지나는 시점을 기준으로 경도를 측정하기 위하여 수십 년간 별과 달의 위치를 관찰, 기록하여 도표를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40년간 이 일만 종사한 왕실 천문학자가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절실한 마음이었는지 느껴지는데요. 그러나 이 또한 날씨가 흐린 날이나 달이 보이지 않는 낮 동안은 사용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진자시계’를 통하여 경도를 알아내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배의 흔들림조차 극복하지 못할 때가 많았고, 극심한 기온 차를 견디지 못하거나 시계에 쓰이는 윤활유 상태 등에 따라 쉽게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곤 했습니다. 이로 인해 항해시간 등을 어림짐작하여 항해하다가 종종 오판하여 망망대해를 헤매거나 굶어 죽는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전적으로 신의 은총이라 여겼지요.


▲ 존 해리슨 초상화

사진출처 : http://goo.gl/zdZRNE


바로 이럴 때 하늘의 별과 같이 나타난 이가 바로 존 해리슨 (John Harrison, 1693~1776)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1735년, 계속된 경도 측정 실패로 경도위원회의 존재마저 흐지부지 희미해질 무렵, 존 해리슨이 캐비닛 크기만 한 H1이라는 놀라운 경도측정시계를 들고 나타난 것입니다. 하루 오차가 3초에 불과한 이 시계는 3년간 바다 위에서의 정확성 실험도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예정대로라면 그는 당연히 어마어마한 포상금의 주인공이 되고, 국가적 축하도 받게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일이 그에게 일어납니다.


▲ 국립해양박물관에 전시된 H1

사진출처 : http://goo.gl/XWaFJs


H1을 발명한 존 해리슨은 명성을 크게 얻고 있던 과학자도, 수학자도, 그렇다고 천문학자도 아닌 목수 일과 시계 수리를 업으로 삼고 있었던 한 평범한 시민이었습니다. 당연히 지식층들로 이루어진 경도위원회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자신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일이 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중력이 변하는 바다 위에서 정확하게 작동하는 경도측정시계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해온 뉴턴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 판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 퇴각식 탈진기 원리

사진출처 : https://goo.gl/mLbeNc


위원회는 온갖 이유를 들어 심사를 미루고 심지어는 H1 설계도와 완성품을 압수하기도 했습니다. 똑같은 제품을 만들어 내라고 협박도 당했고요. 그 후로도 해리슨은 30년여 년 동안이나 기득권층의 시기심과 질투로 고난을 겪어야 했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그의 발명은 발전을 이루어 갔습니다. 온도에 민감하지 않은 보정진자 고안, 마찰이 작은 퇴각형 탈진기, 태엽을 감는 중에도 작동이 멈추지 않는 장치 등을 발명했습니다.


▲ H4 내부 모습

사진출처 : https://goo.gl/TwS8Di


1759년, 그는 손바닥 크기만 한 그의 네 번째 항해용 태엽시계 H4, 바로 크로노미터 (chronometer)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는 배가 흔들려도 진동속도가 달라지지 않았고, 정밀도가 높아 정확한 경도 측정이 가능해져 해상지도가 만들어지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안전한 바닷길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의 공로가 인정되어 세상을 떠나기 직전 3년 전인 1773년에야 상금을, 그것도 전액은 아니고 일부를 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존 해리슨은 명예회복이 되었다는 것에 위로를 받고 조금이나마 편히 눈을 감았을까요?


▲ 존 해리슨의 크로노미터 H5

사진출처 : https://goo.gl/LjfkQn


나보다 나은 남을 인정하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인 듯합니다. 위대한 업적을 지닌 뉴턴과 핼리와 같은 대학자들도 인간의 본성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지금 나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주는 크로노미터가 내 마음의 위치까지 파악해 줄 수 있다면 어떨까요. 나의 감정이 너무 격해지거나 다른 사람의 기분까지 상하게 하는 단계로 벗어나지 않도록 안전한 범위 내에 머물게 내 감정의 위치를 조절할 수 있는 크로노미터, 하나쯤 갖고 싶지 않으세요?




글쓴이 한지숙

글에도 다양한 표정이 있다고 믿는 자유기고가.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 인터넷 공간이라 할지라도 글을 통해 많은 이들과 마음을 나누기를 희망한다. 이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거울 대신 키보드로 표정 연습에 열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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