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만들겠습니다. 가족 또는 개인이 운전과 정비를 손쉽게 할 수 있습니다. 어지간한 봉급생활자라면 누구나 구매할 수 있을 만큼 쌉니다.”


포드 자동차의 예전 경영방침을 잘 말해주는 이 유명한 슬로건은, 생전에 헨리 포드가 어떤 기업가적 정신으로 우리 생활 전반을 지배한 자동차 왕이 될 수 있었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발명은 물론 노동과 시간, 분업화를 통하여 이윤 추구의 극대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그는, 사업가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인물이기도 하지요.


사진출처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헨리_포드


헨리는 1863년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부근의 디어본이라는 마을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가난과 굶주림을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해 온 가족이었지만, 헨리가 태어날 무렵에는 이미 디어본 일대에서 알아주는 토지 자산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헨리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두 가지 큰 만남의 사건이 있었는데요, 바로 증기 자동차를 처음 보게 된 것과 아버지로부터 시계를 선물 받은 일이었습니다. 시계가 흔치 않았던 때에 시계 속의 작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조금의 오차도 없이 쉴 틈 없게 돌아가는 것을 본 헨리 포드는 호기심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 깊은 인상은 훗날 그가 시간과 공간을 통제하며 노동력을 극대화하는 포드주의 생산 시스템을 탄생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학교를 중퇴하고 집을 떠나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디트로이트에서 수습 기계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처음 취직한 곳에서는 일주일 만에 해고를 당하였습니다. 공장의 업무를 단순하게 고치는 것만으로도 작업 효율이 증대되고 인력을 감축하여 생산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는 바람에, 함께 일하던 노동자들에게 미움을 사게 된 것이지요. 그때의 경험으로 헨리 포드는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노동조합을 창의력을 가로막는 집단으로 여기며 평생 불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처음 보았던 증기 자동차의 매력으로 헨리 포드는 증기기관에 대해 좀 더 배울 수 있는 디트로이트에서 가장 큰 드라이독 기계공장으로 직장을 옮기기로 했습니다. 아버지의 병환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간 뒤에도 자동차에 대한 열정을 갖고 최신 기술을 소개하는 잡지를 꾸준히 읽었습니다. 당시 독일의 니콜라우스와 고틀리에프가 개발한 가솔린 엔진에 대해 접하고, 자신도 언젠가 가볍고 조그마한 가솔린 엔진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다루었던 증기 기관과는 다르게 가솔린 기관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전기에 대한 지식이 좀 더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래서 다시 짐을 싸 들고 디트로이트로 향합니다. 그때는 결혼한 아내와 함께였습니다.

디트로이트에 있는 에디슨 조명회사에 취직하여 퇴근 후에는 가솔린 엔진 개발에 몰두하였습니다. 회사에서도 좋은 기술력으로 인정을 받아 본사의 주임기사로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하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때부터 포드와 에디슨의 각별한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에디슨은 누구보다도 포드의 자동차에 대한 열정을 지지하고 격려해주었고, 훗날 자동차로 거부가 된 포드는 고마움으로 에디슨의 초기 실험실을 그대로 복원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모든 비용을 자신이 내어 에디슨의 전구발명 50주년을 기념하는 빛의 축제를 열어주기도 했습니다.


사진출처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포드_모터_컴퍼니


1896년 6월의 어느 날 새벽, 집 뒤뜰 실험실에서 끙끙대던 헨리는 드디어 자신이 직접 만든 2기통짜리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포드1호’를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1900년대 초기만 해도 미국에서 500여 개가 넘는 자동차 제조회사가 생겨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상황이었기에 아무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까닭이었겠지요. 자신이 만든 가솔린 엔진 장착 자동차가 다른 것들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자동차 제작자 겸 카레이서였던 윈튼이 디트로이트의 자동차업자들에게 카레이싱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헨리는 이것을 기회로 여겨 그와 경주해 보기로 마음먹었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은 40마력의 강한 엔진 자동차를 가진 윈튼이 헨리의 26마력짜리 2기통 자동차를 가뿐히 이길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헨리 포드의 승리였습니다. 이제 새로운 투자자들이 헨리에게 모여들었고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처음 새운 회사 ‘헨리 포드(Henry Ford Co.)’였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공동으로 새운 기술자 때문에 투자자들과 갈등을 겪다가 결국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와 결별하게 됩니다. 그 후 석탄 상인이었던 맬컴슨과 손잡고 또다시 회사를 설립하여 큰 이익을 내기도 했지만, 부자를 위한 고급형 자동차를 만들기를 원했던 맬컴슨과의 의견 충돌로 또다시 회사를 나오게 됩니다.


사진출처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포드_모터_컴퍼니


그 후, 그는 계속 자신이 만족하고 추구하는 자동차가 완성될 때까지 실험을 멈추지 않았고, 모델 A, B, C, F, K 등 여덟 가지 모델을 만들면서 마침내 1908년 10월 1일 포드자동차 T형 모델을 출시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흔했던 비포장도로도 거뜬하게 달릴 수 있는 성능의 자동차였지요. 사람들에게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지만 헨리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평소 지향했던 자동차에 대한 그의 생각, 바로 값싼 자동차를 만들어 어지간한 중산층 봉급자도 살 수 있도록 단가를 낮추는 것이 또 하나의 숙제로 남아있었던 것이지요. 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 바로 ‘포드주의’였습니다. T형 모델 한 가지만을 집중적으로 생산해서 생산단가를 줄이고 한 기계에서는 한 가지 부품만 생산 조립하게 하는 철저한 분업화 과정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사진출처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포드_모터_컴퍼니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서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한 치의 오차도 허락지 않는 모습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시간과 노동을 철저히 저당 잡히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점심시간도 화장실 가는 시간을 포함해 딱 15분으로 제한하고 근무시간 중에 휘파람을 불거나 말하는 것도 엄격히 금하고 이를 감시하기 위해 내부 감시자들을 두기도 했습니다. 감시자의 눈을 피해 사람들은 일명 ‘포드 속삭임’이라는 대화법으로 대화하기도 했는데.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복화술로 대화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고 하니 작업장 내부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기도 합니다. 특히, 아이러니 한 일은 포드는 자신의 회사 노동자들은 부업이나 겸업을 금지했는데요, 포드 자신도 젊은 시절, 받은 월급이 적어 하숙비조차 감당하지 못할 때 퇴근 후에 그의 주특기였던 시계를 수리하며 부업으로 부족한 생활비를 벌곤 했었는데 그것을 잊었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현대 문명인 자동차를 통하여 한결 빨라진 생활권과 편리함을 선물해준 핸리 포드. 그와 동시에 컨베이어 벨트에 묶여버린 인간과 시간이라는 근현대사회의 새로운 인간상을 만들어낸 인물이기도 합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주는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을 누리는 대신, 지금 여러분이 내고 있는 대가는 무엇인가요. 한 달 남짓밖에 남지 않은 올해, 여러분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나요.




글쓴이 한지숙

글에도 다양한 표정이 있다고 믿는 자유기고가.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 인터넷 공간이라 할지라도 글을 통해 많은 이들과 마음을 나누기를 희망한다. 이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거울 대신 키보드로 표정 연습에 열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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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담은 발명으로 

세계인을 사로잡은 IT천재

스티브 잡스


아이폰4를 발표하는 잡스 https://ko.wikipedia.org/


세계 7억2천만 명이 아이폰을 쓰고 있습니다. 이달 5일은 스티브 잡스(1955~2011)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꼭 6년째 되는 날인데요, 언제나 우리에게 놀라운 선물 보따리를 안겨 줄 것만 같았던 그가 너무도 빨리 우리 곁을 떠나버렸습니다. 애플은 지난달 12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플파크에 위치한 스티브잡스 극장에서 잡스의 정신을 기리는 시간을 갖고, 아이폰 10주년 기념 신제품을 선보이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처럼 그렇게 평범한 출생과 성장과정은 아니었지요. 그는 1955년 2월 24일, 조앤 시블로와 시리아 출신의 압둘파타 존 잔달리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딸의 결혼을 결사 반대했던 조앤의 아버지 때문에 두 사람은 결혼하지 못하고 헤어져 결국 둘 사이에 태어난 아기는 입양을 가게 됩니다. 생모는 대학교육을 받은 입양가정을 찾았고 변호사 부부가 입양할 뻔 했지만, 그들이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딸을 원하는 바람에 다른 가정을 찾아야 했습니다.


결국, 폴 라인홀트 잡스 가정에 입양된 아기는 스티브 잡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양부모를 찾던 생모의 바람과는 달리 아기를 입양한 잡스 부부는 고등학교도 중퇴한 사람이었지만 아기를 꼭 대학교육까지 시키겠다는 사인을 하고 난 뒤 입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훗날 잡스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어깃장으로 비싼 등록금을 자랑하던 리드대학 철학과에 진학하여 양부모를 포기시키려 했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양부모는 최선을 다해 등록금을 대주려 애썼습니다. 아기 때의 약속을 양부모들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맥북에어를 발표하는 잡스 https://ko.wikipedia.org/


그러나 스티브 잡스는 비싼 등록금과 적성에 맞지 않는 과목들 때문에 1년도 안되어 대학을 자퇴하는데요, 캘리그라피 수업만은 계속해서 들었는데, 이때 배웠던 아름다운 서체 공부가 훗날 그가 발명한 제품의 폰트 디자인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학교를 자퇴한 잡스는 ‘아타리’라는 전자게임 회사에 취직해 얼마간 다녔지만 그만두고 홀연히 수개월 동안 인도 히말라야 일대를 수행하며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회사 이름이 ‘애플(Apple)'이 된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잡스가 선불교 수행의 장소였던 오리건주 사과농장을 연상하며 이름 지었다고 애플의 공동 창업자였던 스티브 워즈니악이 밝힌 바 있습니다.


애플I https://ko.wikipedia.org/


애플II https://ko.wikipedia.org/


몇 년 후 잡스는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어린 시절부터 친한 형이었던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홈부르 컴퓨터 클럽에 가입해, 잡스의 집 차고에서 애플을 설립하고 1976년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 ‘애플I’을 발명하였습니다. 소량 생산된 까닭에 큰 파급력은 없었고 모니터도 없고 투박한 디자인의 컴퓨터였지만, 애플신화의 출발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후 가능성을 직감한 워즈니악과 잡스는 1년 뒤 ‘애플II’를 내놓게 됩니다. 컬러 그래픽과 플로피 디스크 형태로 초창기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휩쓰는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는 이제 억만장자가 되었고 미국에서 최고의 부자대열에 올랐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탁월함과 고집스러움이 빛을 발하는 시기였지요. 그러나 그의 이러한 성격이 스스로를 곤란에 빠트리기도 했습니다. 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크고 작은 마찰을 불러일으키기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애플기기로 표현한 스티븐 잡스 https://namu.wiki/


1984년에는 매킨토시를 내놓아 그래픽 분야에 지지를 얻으며 또 한 번의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리사 컴퓨터와 함께 너무 비싼 단가로 인하여 다른 경쟁사와의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는데요, 리사 컴퓨터는 그가 처음에 자기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다가 친자소송 확인 이후에 미안한 마음으로 그의 딸 이름을 따서 만들었던 컴퓨터였습니다. 응용 소프트웨어의 부족으로 사람들은 불편을 호소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판매부진으로도 이어져 심각한 경영난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집스런 잡스의 행보 때문에 애플사의 경영진과 핵심 엔지니어 사이에 불화와 반목이 심해지고 잡스에 대해 불만과 배신감이 커지며 회사를 곤경 빠트린 자로 지목되어 자신이 만든 애플사에서 결국 1985년 5월에 쫓겨나게 됩니다. 잡스 스스로에게도 큰 충격과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재기의 발판을 다지게 됩니다.


애플 스토어 https://namu.wiki/


애플을 떠난 뒤 넥스트 회사를 세워 세계 최초 넥스트 스텝을 개발하였고, 컴퓨터 그래픽 회사를 인수하여 ‘픽사’로 이름을 바꾸고 경영에 들어갔습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별다른 수익을 얻지 못하여 고군분투 하다가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를 만들어 대성공을 거두며 입지를 굳힙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와 <인크레더블> 등도 바로 픽사의 작품이지요. 조지 루커스로부터 천만 달러에 샀던 픽사를 성장시켜 훗날 74억 달러에 디즈니에 팔았으니 대단한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1997년 넥스트가 애플에 인수되면서 스티브 잡스도 다시 13년 만에 애플의 최고 경영자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돌아온 이후, 애플 신화로 여겨질 만큼 혁신적인 신제품들이 많이 나와 세상의 문화를 변화시켰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1998년 아이맥을 비롯해 2001년 MP3플레이어 시장을 장악한 아이팟은 세상을 들썩들썩하게 만들었지요. 그리고 드디어 등장한 ‘아이폰’과 ‘아이패드’. 특히 2007년에 선보인 아이폰은 그야말로 스마트폰의 혁명을 이루었고 다양성을 거듭하면서 전 세계가 주목하는 발명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빨리 그에게 찾아온 죽음. 2004년 췌장암 선고를 받고 한 차례 고비를 넘기는 듯 했으나 결국 병세의 악화로 투병하다가 2011년 56세의 나이로 세상과 작별하게 되지요. 정말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스티브 잡스. 생전에 스탠포드 대학 졸업에서 그가 남겼던 유명한 연설은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이 되고 있습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네요.

“Stay Hungry, Stay Foolish.”


https://namu.wiki/




글쓴이 한지숙

글에도 다양한 표정이 있다고 믿는 자유기고가.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 인터넷 공간이라 할지라도 글을 통해 많은 이들과 마음을 나누기를 희망한다. 이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거울 대신 키보드로 표정 연습에 열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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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 팔방미인 섬유 ‘나일론’ 발명가 

윌리스 흄 캐러더스


사진출처 : https://www.kaufmann-mercantile.com/


미국 치과협회에 발표에 따르면, 1498년 처음 중국에서 칫솔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데요, 대나무나 동물 뼈에 돼지 털을 촘촘히 박아 칫솔모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후 유럽에서도 돼지 털 칫솔은 유행했지만 값이 비싼 탓에 한 개의 칫솔로 여러 가족이 함께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네요. 그러다가 세기의 발명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일론’이 발명되었는데요, 그 덕분에 다행히도 나만의 1인 1칫솔이 가능하게 된 시대가 열렸습니다. 1938년 미국의 듀폰사는 돼지 털을 대체할 나일론 솔을 개발하여 나일론 칫솔을 미국인들에게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섬유 혁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나일론 발명 덕분에, 이후로도 혁신적인 발명품들이 생겨나고 지금까지도 우리 생활 깊숙이 여러 모양으로 나일론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신비한 섬유는 윌리스 흄 캐러더스(Wallace Hume Carothers, 1896~1937)라는 화학자가 발명한 것입니다.


사진출처 : http://vancouverdentalgroup.ca/


미국 아이오와 주 디모인에서 태어난 캐러더스는, 타키오 대학과 일리노이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취득, 모교에서 일하다가 1926년 하버드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연구활동을 했습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그는 학생 시절 친구들로부터 교수, 박사로 불릴 정도로 명석한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캐러더스는 ‘듀폰’이라는 회사로부터 초빙을 받게 됩니다. 듀폰사는 전도유망한 젊은 과학자들을 영입해 기초 과학 연구를 지원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듀폰사가 엄청난 양의 폭약을 판매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얻은 ‘죽음의 상인’이라는 불명예에서 조금이나마 회사의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화학회사는 물론 순수연구를 지원해야 하는 화학자도 크게 환영받지 못하던 때라, 캐러더스에게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젊은 과학도 캐러더스는 기업에 속한 연구원이 되는 것을 별로 탐탁해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기업의 압박과 자신의 순수연구 열정 사이에서 많이 괴로워했다고 전해집니다. 애초부터 무언가를 발명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순수한 과학적 호기심과 학문적 욕구로 연구에 몰두하다 보니, 우연히 여러 가지 발견을 하게 되고 획기적인 발명품이 만들어진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www.elephantjournal.com/


1929년, 듀폰사는 에스테르(ester)라는 화합물을 연결하여 폴리에스테르를 최초로 개발합니다. 바로 캐러더스가 속해있었던 연구팀이 개발해 낸 것이지요. 그때까지 사용되던 인조섬유인 레이온은 천연셀룰로스를 원료로 사용하기에 생산량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새로운 섬유의 발견은 섬유 역사의 한 획을 그을 만한 획기적인 발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연구를 거듭한 결과 마침내 열이나 물에 잘 녹았던 처음 발명품보다 훨씬 효용성이 좋은 합성섬유를 알아내었습니다. 하지만 캐러더스는 이 연구를 계속하지 않고 한동안 그냥 그 상태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평소 실용적 발명보다는 순수과학을 연구하거나 학문을 가르치는 일 그 자체에 더 관심이 많았던 그의 성향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공항을 겪으며 경제적 위기에 봉착한 듀폰사 역시 기업 존립에 중요한 이윤창출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회사에 속한 과학자들은 소위 ‘돈이 되는 연구’를 하라는 회사의 강력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합성섬유의 연구는 시작되었지요.


사진출처 :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


1934년 5월, 캐러더스의 연구팀 중 일원인 코프먼이 폴리아미드 섬유합성에 성공하고, 1935년 마침내 석탄(나중에 석유)으로부터 벤젠을 원료로 한 튼튼하고 질긴 합성섬유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합니다. 이것을 훗날 듀폰사에서 ‘나일론’이라고 명명하게 되었지요. 폭발적인 반응과 함께 이를 곧 상품화하여 회사를 일으킬 주력상품으로 삼게 됩니다. 이제는 나일론을 대량 생산하는 것이 회사의 최대 관건이 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캐러더스는 기업소속 유기화학자로는 최초로 미국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는 영예도 안았지만, 그의 마음속은 항상 지적 갈등과 극도의 우울감으로 시달렸다고 전해집니다. 발작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입원하는가 하면 여동생의 죽음으로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기도 합니다, 결국 1937년 4월 28일, 한 호텔에 투숙해 청산가리를 먹고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사진출처 : https://www.chemheritage.org/


그가 사망한 뒤에도 나일론을 이용한 신제품들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사랑을 받았던 나일론의 처음 제품은 바로 여성용 스타킹이었지요. 실크스타킹에 비해 얇고 투명해서 바로 이때부터 여성들이 다리에 털을 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실크스타킹에 비해 두 배나 비싼 나일론 스타킹을 사기 위해 시판 첫날부터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고 물건은 금방 동이 나 버렸다고 합니다. 듀폰사는 이 덕분에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는 회사로 다시 한번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의류뿐만 아니라 낙하산, 타이어, 밧줄, 텐트 등 제2차 세계대전과 맞물려 군수품 제조에 엄청난 양의 나일론이 소비되면서 스타킹 등의 제품 생산이 잠시 중단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일부 여성들은 자신의 스타킹을 벗어 군수물자 낙하산 생산에 사용해달라며 헌납하는 일도 있었다고 하니, 웃지 못할 해프닝이기도 합니다.


만약 캐러더스가 살아있었다면 자신이 개발한 합성섬유가 전쟁을 위한 군수물자로 생산되고 날개 달린 듯이 팔려 나가는 것을 보면서 순수했던 이 천재 과학자가 또다시 죄책감과 우울증에 시달리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실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여러 가지 기능으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는 합성섬유 나일론의 모습을 그가 지켜보고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그러나 잘 썩지 않는 성질로 환경오염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것은 또 어떻게 생각할까요? 모든 발명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성질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글쓴이 한지숙

글에도 다양한 표정이 있다고 믿는 자유기고가.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 인터넷 공간이라 할지라도 글을 통해 많은 이들과 마음을 나누기를 희망한다. 이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거울 대신 키보드로 표정 연습에 열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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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워싱턴 카버(George Washington Carver, 1864~1943)는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당시 물건처럼 취급되던 흑인 노예의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남북전쟁이 북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노예해방이 되었으나 흑인들의 삶이 금방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지요. 삶의 기반이 없었던 흑인들은 전보다도 더 혹독해진 상황에서 견뎌야 했고 백인들은 이를 이용해 더욱 흑인들을 교묘하게 괴롭혔습니다. 흑인들의 소유를 약탈해가는 무장폭도가 생겨나고 흑인들을 납치해 팔아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FihTh7


조지의 어머니 메리는 사고로 남편을 잃고 미주리 주 개척지대에서 온유한 성품의 카버라고 하는 백인 부부 밑에서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여느 백인들과는 달리 집에서 부리는 흑인들에게 매우 인간적인 부부였다고 전해집니다. 어느 겨울밤, 메리와 어린 조지가 무장폭도들에게 납치를 당하게 됩니다. 흑인 모자의 목숨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게 여겨지던 그 당시의 상황이었지만, 카버 부부는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조지의 어머니 메리는 어디론가 또다시 팔려간 뒤였고, 어린 조지만 겨우 폭도들로부터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조지는 카버 내외의 보살핌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9XiD8J


당시 미주리 주는 흑인들의 교육을 허락지 않았지만, 수도 네오쇼에 가면 흑인들을 가르치는 링컨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가게 됩니다. 조지는 그곳에서 신앙심이 깊었던 마리아 왓킨스라는 흑인 부인을 만나게 되고, 그녀의 집에서 기거하며 허드렛일을 도우며 공부하게 됩니다. 언젠가 미국의 한 상원의원이 카버 박사에게 ‘당신은 도대체 그 모든 아이디어를 어디서 배웠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카버박사는 ‘책입니다'라고 답했고 곧이어 상원의원이 ‘무슨 책이지요?’라고 되묻자 카버박사는 빙그레 웃으며 ‘하나님의 말씀, 성경책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녀와 함께 살았던 이 시기에 어린 카버는 더욱 신앙심이 깊어졌고, 특별히 평소에 그녀가 했던 말, ‘조지, 너는 언젠가 가난한 동족들에게 네가 배운 것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말을 마음 깊이 새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hB2CSS


온갖 잡일을 하며 학비를 벌어 공부하던 카버는 1880년 20세가 되어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그 후 우수한 성적으로 하일랜드의 한 대학교를 지원하게 되었는데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입학을 거부당합니다. 그러나 상심해 있던 카버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888년 여름, 침례교회에서 만난 존이라는 의사 부부가 그에게 학교를 하나 소개해주었는데, 감리교 목사 매튜 심슨이 설립자로 그는 하나님 안에서 만인의 평등권을 주장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카버는 그의 인생에 중요한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요. 미술을 가르치는 버드라는 선생은 카버가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식물과 자연에 대한 카버의 관심과 자질이 남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이오와 주립대학 교수로 있었던 자신의 아버지에게 카버를 소개하고 입학시킵니다. 예상대로 그는 이 학교를 졸업할 때 수석으로 졸업하는 인재가 되었고, 당시 가장 저명한 식물학자였던 루이스 파멜 교수의 조수로 일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카버는 원예작물 접목법을 개발하여 세균에 대한 과일나무와 식물의 저항력을 크게 높이게 되고, 세균학을 공부하여 2만 가지가 넘는 표본을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점점 명성을 쌓아가며 농업 응용화학 분야에서 권위자가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항상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불쌍한 흑인 동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었지요.


사진출처 : https://goo.gl/Vrn1C7


그러던 중, 카버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편지 한 통을 받게 됩니다. 1896년 당시, 흑인을 위한 학교를 세워 흑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부커 교수에게서 온 편지였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돈이나 지위, 명예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단념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타락하고 가난하여 버려질 운명에 처한 우리의 동족들을 위해 함께해달라는 부탁을 하려는 것입니다. 앨라배마의 터스키지 학원에 농학부를 설치하고 부커는 카버에게 자신과 함께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고, 카버는 그곳이 자신이 가야 할 자리라는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된 것이지요. 연구소는커녕 실험도구 하나 변변히 없는 열악한 환경의 창고에서 그의 위대한 발명과 연구는 시작되었습니다.


한때 남부지방은 면화 재배로 유명했는데, 땅의 질소를 빼앗아가는 면화 재배 때문에 남부의 모든 땅이 척박해지고 이는 계속 악순환이 되어 남부 경제가 위기에 처할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일을 하던 흑인들에게는 이중고를 겪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커버박사는 질소를 잃은 황폐한 땅에 땅콩을 심으면 땅콩에도 좋을 뿐 아니라 땅이 다시 비옥해진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남부 농장마다 이제 땅콩을 재배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대성공을 거두었지요. 그러나 문제는 또다시 찾아왔습니다. 해마다 너무나 많이 쌓여가는 땅콩을 해소할 길이 없어 썩어가고 다시 농민들의 삶은 막막해졌습니다. 다시 카버박사의 깊은 고민과 기도는 시작되었습니다. 밤낮으로 땅콩을 들고 연구한 결과, 땅콩을 이용하여 마가린, 비누, 요리기름, 인조사탕, 잉크, 물감, 접착제, 연고 등과 우리가 잘 아는 땅콩버터까지 100여 가지가 넘는 종류의 음식과 200여 가지의 실용품을 개발해내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x5EXNG


훗날 카버의 명성과 실력에 에디슨 연구소에서 연봉 10만 달러를 제의하며 초빙했지만 카버는 조용히 거절했고, 허름한 터스키지 학교 실험실에 남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정식 수입이라곤 말년까지 1896년 부커 교장이 정했던 월 125달러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의 불행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신앙 안에서 오히려 기적적인 삶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었던 그는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큰 울림이 되는 사람입니다. 사방이 넘어설 수 없는 벽으로 둘러싸였지만,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겸손과 지혜를 가진 그였습니다.




글쓴이 한지숙

글에도 다양한 표정이 있다고 믿는 자유기고가.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 인터넷 공간이라 할지라도 글을 통해 많은 이들과 마음을 나누기를 희망한다. 이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거울 대신 키보드로 표정 연습에 열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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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처럼 빛나는 도전정신,

닐스 구스타프 달렌


스웨덴 스카라보르그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닐스 구스타프 달렌은 아세틸렌가스 저장에 적합한 아가(Aga)라는 다공성 물질을 개발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당시 깜깜한 밤에 배가 항구를 드나들 때 안전의 지표가 되어 주었던 부표와 등대의 기능을 탁월하게 개선한 계기가 되었는데요, 해양교통이 증가하고 복잡해짐에 따라 어느 나라나 배의 안전한 출입과 이에 따른 등불 시스템, 효과적인 관리 비용 등이 큰 관심사로 떠올랐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huKcN5


탄화수소 가스의 일종으로 태우면 밝은 빛을 내는 아세틸렌은 1895년경 최초로 탄화칼륨에서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아세틸렌을 등대의 연료로 사용해보려고 여러 차례 시도가 있었는데요, 그러나 사용되었던 석유가스가 컨테이너에 압축 보관이 가능했던 것과는 달리, 아세틸렌은 1기압 이상의 압력과 미세한 충격으로도 쉽게 폭발했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했습니다.


탄화칼슘을 등부표에 저장하여 물과 반응시켜 아세틸렌을 얻어 사용해보려고 해보았지만, 추운 날씨에는 제대로 된 결과를 얻기가 힘들어 신뢰성이 떨어지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1896년에 프랑스 화학자 클로드와 헤스 두 사람에 의하여 아세톤에 대량의 아세틸렌 성분이 존재한다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용액은 폭발하지는 않지만 아세틸렌의 안전한 저장 용도로는 적합하지 않았지요. 가스의 사용에 따라 혹은 온도가 낮아지면 용액의 부피가 줄어들면서 생기는 공간에 폭발성 아세틸렌이 가득 찰 수밖에 없는 현상 때문이었습니다. 아세틸렌을 위한 다른 안전한 저장 공간이 필요해졌고, 그것이 바로 다공성 물질이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jhEFHq


이것을 만들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하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던 중, 마침내 구스타프 달렌(Nils Gustaf Dalén, 1869~1937)이 아세틸렌 저장에 적합한 ‘아가’라는 이름의 다공성 물질을 개발하였습니다. 컨테이너 안의 다공성 물질인 ‘아가’를 이용해 안전하게 등대나 등부표에 불을 밝히는데 필요한 충분한 양의 아세틸렌을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 이후로도 그의 연구는 계속되었습니다. 가스파이프 개폐 방법을 새롭게 개선하여 기존의 1리터의 가스로 50회 이상의 섬광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을 수천 번의 빠르고 정확한 섬광을 만드는 것이 이 새로운 조절기로 가능해졌습니다.


1907년에는 태양 빛에 닫히고 밤이 되면 열리는 ‘태양밸브’를 개발하였습니다. 민감한 빛에도 작동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낮이라고 해도 안개나 구름이 많아 태양 빛을 가리게 되면 즉시 등불이 작동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아가’ 등불로 인해 무인도나 위험한 암초의 바다처럼 접근이 어려운 장소에 등대나 등부표 설치가 가능해졌습니다. 이전보다 한두 개의 가스 저장기로도 잦은 고장이나 점검 없이 유도 불빛을 밝힐 수 있었기 때문에, 유지 비용도 크게 절약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대부분 해양국가에서 이 장치를 설치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항해 안전 표준이 마련되기도 하였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JZLRJs


이런 그의 공로가 인정되어 1912년에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이 되었는데요, 그러나 그는 수상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고, 그의 동생이 가서 대신 수상을 했습니다. 실험 중에 폭발로 인해 두 눈이 실명되는 큰 사고를 당하여 치료하고 있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회사보다는 치료와 회복을 위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던 그는 자신을 병간호하느라 애쓰는 아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아내가 음식을 하기 위해 화로의 불 유지와 조절에 몹시 힘들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밤에는 불씨를 꺼트리지 않기 위하여 잠도 설치게 되는 아내를 보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아내를 도울 수는 없을까?’


사진출처 : http://imgur.com/1XIB0


달렌이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발명된 것이 바로 ‘아가 쿠커(Aga Cooker)’입니다.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한 이름의 주방 조리기구이지만 스웨덴, 핀란드 등과 같이 북유럽 추운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당시 획기적인 발명품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 기기는 주철에 열을 가하면 에너지가 가둬져 열기가 고르게 오랫동안 유지되는 원리를 이용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추가적인 열원, 당시에는 주로 장작을 이용하였는데 이것을 다시 더 집어넣지 않아도 다섯 시간 정도는 열기가 꾸준히 유지되는 주방기기였지요. 요리도 하고 실내 난방효과에도 탁월한 일거양득의 기기였던 셈이지요.


음식 각각의 위치에 따라 열의 세기도 다양하여 베이킹이나 로스트를 할 수 있는 부분, 소스를 은근히 조릴 수 있는 낮은 온도의 철판 부분, 뜨거운 온도를 유지하는 부분 등 요리 종류에 따라 최적 온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복사열에 의해 음식 맛이 깊어지고 다양한 음식을 동시에 해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 획기적인 주방기기를 발명하고 아내에게 더욱 사랑받는 남편 구스타프 달렌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까지도 이 주방기기는 높은 가격으로 유럽에서 인기가 높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Si2BFh


사실, 그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은 후세에 논란의 잡음이 있었습니다. ‘몇 가지 발명했다고 다 노벨물리학상을 주나’, ‘과연 인류역사와 정신에 큰 영향을 끼칠 만한 정도의 발명이었나’ 등등 누군가는 역대 워스트(worst) 노벨상 중의 하나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은, 닐스 구스타프 달렌이 젊은 시절부터 사고로 눈이 멀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때까지도 발명가로서의 삶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 노벨상을 타기 위함이었을까요? 그저 묵묵히,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캄캄한 밤바다를 지키는 등대의 불빛처럼, 그렇게 자신의 할 일을 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 속 다른 엔지니어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사진출처 : https://goo.gl/n5eV6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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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개혁을 이끈 조선의 발명가, 정약용


성호 이익의 학통을 이어받아 각종 사회개혁 사상을 제시했던 인물 정약용(1762~1836)은 방대한 저술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가 태어난 ‘양근’이라는 곳은 지금의 남양주 지역으로,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들이 존중하던 성리학설과는 대조되는 학문적 성향을 키워 나가던 곳이었습니다. 18세기 후반에 당쟁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정치 참여에 소외되었던 근교 지방 남인들을 중심으로 선진유학에 기초한 실학적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약용이 훗날 서양문물을 연구하고 서학을 받아들이고 개혁에 적극적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분위기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학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정약용

사진출처 : https://goo.gl/1i1oa5


정약용은 23세 때 진사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뛰어난 학문과 재능으로 성균관 시절부터 정조(正祖)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28세 때 비로소 문과에 급제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그 후로 사간원정언, 경기암행어사, 곡산부사,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하며 효율적인 정부조직과 개편을 위하여 혁신적인 개혁안을 내놓으며 고군분투하였습니다. 또한 ‘중국으로부터 선진기술을 받아들이고 선박과 수레 제조기술을 장려하기 위해 이를 관장하는 관청이 중앙정부에 설치되어야 하며 정부의 적극적인 주도로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발명과 기술은 시간이 갈수록 사회발전의 중요한 영향력을 끼칠 것이라 일찌감치 깨닫고, 농업기술, 방직기술, 군사기술, 의료기술 등 사회 다방면에 걸친 기술 혁신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 수원화성

사진출처 : https://goo.gl/VgcShX


그가 임기 중에 이루었던 업적 중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바로 정조의 분부로 시작된 수원화성 축조가 아닐까 싶습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에서 비롯된 건축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영조의 아버지였던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지금의 경기도 화성)으로 옮기면서 이곳에 이미 살던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옮겨야만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조정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노론파를 견제하고 강한 왕권을 확립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정조는 팔달산 아래 신도시 화성을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화성건설을 통해 개혁정치를 실시하고, 실학파 등 고른 인재 등용에 박차를 가하기 위함이었지요. 이때 정조의 뜻을 잘 받들었던 핵심 인재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정약용입니다. 중국을 통해 들여온 책을 보며 그는 전통적인 방법을 기초로 서양의 여러 도시의 특성을 연구하며 화성을 설계하였습니다. 1년 남짓 되어 도시의 기본 틀과 구체적인 건축방법까지 꼼꼼하게 적어 만든 보고서 「성설」을 완성하여 정조에게 바쳤습니다. 특히 정약용은 정조가 전해준 중국책 「기기도설」, 「제기도설」을 참고해 거중기를 고안해 내었습니다. 유형거나 녹로와 더불어 거중기의 활약은 화성건축 현장에서 단연 돋보이는 기기였지요.


▲ 녹로

사진출처 : https://goo.gl/E7nH43


거중기는 위아래 네 개씩의 도르래를 끈으로 연결하고 물체를 달아매어 물레형식으로 돌리면서 무거운 물건을 손쉽게 위로 올릴 수 있도록 고안된 기기였습니다. 이로 인해 건축경비를 크게 줄였을 뿐만 아니라 10년을 예상하던 공사 기간이 크게 단축되어 2년 9개월 만에 완공되었다고 하니 놀라운 혁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역에 참여하는 백성들에게 정확한 품삯을 쳐주어 열심히 일할 수 있게 만든 것도 성공적으로 건축이 마무리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 거중기

사진출처 : https://goo.gl/GjxJpc


그때 당시 공사에 쓰였던 기기들이나 사용된 자재, 공사 기간, 동원된 인원, 건설 방법 등 성곽을 건설하는 전 과정이 글과 그림으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책이 바로 「화성성역의궤」입니다. 이 책 덕분에 훗날 전쟁 등으로 많은 부분 소실되었던 화성의 모습들을 복원할 수 있었지요.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은 주거기능은 물론 군사 기능과 상업 기능을 동시에 갖춘 보기 드문 복합적 기능의 성곽 도시형태로 지형의 능선을 잘 살려 과학적이고도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편, 정약용은 이때 잠깐 천주교에 관심을 두고 입교하게 되는 일이 있었는데요, 당시 천주교 신앙은 집권층의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도전하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기에 강력한 반발을 사게 됩니다. 더군다나 정약용을 총애했던 정조마저 병으로 세상을 뜨고, 결국 1801년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박해가 일어나 유배를 당하게 됩니다. 이 일을 기점으로 사실상 중앙 정치와는 멀어지는 결과가 되었고, 관료로서의 삶은 마감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실학사상의 학문적 집대성은 바로 이 유배 시절에 꽃을 피웠습니다.


▲ (좌)목민심서, 경세유표/(우)흠흠신서

사진출처 : https://goo.gl/Oq7xEC


이 기간에 정약용은 조선왕조 사회현실의 반성과 유학 경전 연구를 통해 개혁안들을 정리 집필하였습니다.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이 바로 그런 책들이지요. 그의 저서는 연구서들을 비롯해 경집에 해당하는 것이 232권, 문집이 260여 권에 이르는데, 대부분 저서가 바로 유배 시기에 쓰였다고 합니다. 500여 권에 이르는 자신의 저서들을 모아 정리한 것이 바로 「여유당전서」이지요. 관료 시절에는 행동하는 실학자로서, 유배 시절과 그 후에는 실학적 사상의 학문적 체계 정립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던 지식인으로서 정약용의 탐구 정신은 계속되었습니다. 기술을 천하게 여기던 통념을 거슬러, 그 시대에 보기 드문 사회에 대한 성찰과 개혁안을 통해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던 조선 후기 사회의 대표적 지성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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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민 우유 보급의 일등공신은 누구?

종이 우유 팩 발명가 존 반 워머


▲ 존 반 워머 초상

사진출처 : https://goo.gl/3dtahy


학창시절 2교시가 되면 어김없이 배달되어 오던 200㎖ 흰 우유, 기억하시나요? 우유가 먹기 싫은 아이들은 가방 안에 우유를 넣어 놓았다가 팩이 눌려 터지면서 난감한 상황을 맞게 되기도 했지요. 사실 이 같은 종이 우유 팩이 등장하기 전에는 모두 유리병에 담아 유통이 됐는데, 종이 우우팩이 등장하면서 깨지지 않고 가벼운 포장재로의 유통이 용이해 국민건강식품으로서 우유가 널리 보급될 수 있었습니다.


휴그 무어가 종이컵을 발명해 자판기 혁신을 일으켰던 것처럼, 음료 문화에서 이 종이팩의 발명은 커다란 혁신을 일으키는 발명품이었습니다. 이름하여 카톤(carton)팩,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종이로 만든 상자’쯤 될까요. 이를 처음 발명한 사람은 미국의 존 반 워머(John Van Wormer, 1901~1955)입니다.


▲ 존 반 워머의 종이팩

사진출처 : https://goo.gl/FbXdvR


처음 종이로 만든 우유 용기는 1906년경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거리에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지지만, 액체가 통과하지 않는 종이와 접착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곧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1915년, 존 반 워머가 고안한 우유를 담기 위한 카톤 팩이 미국 특허를 받게 되었는데요, 종이 상자 안쪽 면에는 방수를 위해 직접 파라핀 왁스로 코팅을 입혔습니다. 일명 종이 병(paper bottle)으로 한 번 쓰고 버리기에 퓨어 팩(Pure-Pak)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의 특허는 후에 미국 제지회사가 사들여 보완을 거친 뒤, 내용물을 채우고 밀폐할 수 있는 기계가 세워지면서 더욱 활성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934년에는 자동차와 비행기 생산을 위한 기계를 공급하던 ‘The Ex-Cell-O Corporation’이라는 회사가 이 사업에 잠재적 가치를 알아보고 관심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제지용기 회사가 필요로 하는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우유 팩을 생산하고 배포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게 됩니다. 이때 만들어진 우유 팩이 바로 게이블 탑(Gable top)으로 지금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카톤 우유 팩의 지붕 모양과 아주 흡사한 초기 스타일이었습니다.


▲ 게이블 탑

사진출처 : https://goo.gl/OBHtm1


1952년이 되어 스웨덴의 한 식품 포장재 회사에서 또 다른 스타일의 카톤팩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 대표 중 한 사람이었던 루벤 라우싱(Ruben Rausing)은 1943년부터 새로운 우유포장을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최소 경비의 운반과 함께 우유가 상하지 않고 밀봉되어 위생적으로 유통되는 것이 그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그의 연구는 7년이 넘는 시간동안 계속되었고, 마침내 1951년 발명된 것이 바로 테트라(Tetra) 클래식입니다. 이름은 생소하지만 사진을 보면 아마 ‘아하!’ 하게 될 겁니다.


▲ 테트라 클래식

사진출처 : https://goo.gl/wDbyjd


사진출처 : https://goo.gl/ddrokB


‘테트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숫자 4를 뜻합니다. 4면체의 종이팩, 삼각뿔 형태로 되어 있어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테트라 팩은 75%의 종이와 20% 폴리에틸렌, 5%의 알루미늄 포일로 만들어집니다. 무게도 적게 나가는 것은 물론, 유리병보다 안전하고 유통비용을 크게 절감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폴리에틸렌 코팅과 알루미늄 포일은 액체가 용기 밖으로 새지 않고 종이가 젖지 않는데 효과적이었고, 공기와 빛으로부터 내용물을 보호하여 미생물로 인해 내용물이 변질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우유를 방부제 없이도 오랫동안 상온에서 위생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1954년에 이 패키지 시스템이 독일로 수출되었고, 그 뒤로 프랑스, 스위스, 소련, 일본 등으로 수출되기 시작했습니다. 1959년까지 해마다 10억 개 이상의 테트라 팩이 생산되어 덩어리 우유와 유리 우유병을 대체해 나갔다고 하니, 식문화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 발명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덕분에 1962년에는 멸균 우유 팩이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유통기한이 그만큼 길어져 경제적 이득 효과를 크게 상승시켰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지요. 그 이후로 테트라 클래식 팩의 모양은 계속 변화하여 무균 포장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직사각형태의 테트라 브릭, 빨대가 부착된 테트라 프리즈마, 돌려서 여는 뚜껑의 테트라 렉스와 테트라 톱 등으로, 마켓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음료 포장용기가 되었습니다.


▲ (맨 왼쪽이) 루벤 라우싱, 테트라 팩 발명

사진출처 : https://goo.gl/TAypZN


무심코 먹었던 음료수 팩 하나에도 많은 사람의 아이디어와 과학적 연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운데요, 천연펄프가 주재료이기 때문에 폴리에틸렌과 알루미늄을 분리하여 재생보드지, 화장지, 분쇄된 종이팩을 압축한 칩보드 등 재활용 원료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니 환경친화적인 발명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시고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우유 팩과 음료 팩이 환경보호 차원에서도 앞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재활용될 수 있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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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은희 2017.05.10 12:50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자집 애들만 먹을 수 있었던 흰 우유!!!
    옛날 생각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