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워싱턴 카버(George Washington Carver, 1864~1943)는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당시 물건처럼 취급되던 흑인 노예의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남북전쟁이 북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노예해방이 되었으나 흑인들의 삶이 금방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지요. 삶의 기반이 없었던 흑인들은 전보다도 더 혹독해진 상황에서 견뎌야 했고 백인들은 이를 이용해 더욱 흑인들을 교묘하게 괴롭혔습니다. 흑인들의 소유를 약탈해가는 무장폭도가 생겨나고 흑인들을 납치해 팔아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FihTh7


조지의 어머니 메리는 사고로 남편을 잃고 미주리 주 개척지대에서 온유한 성품의 카버라고 하는 백인 부부 밑에서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여느 백인들과는 달리 집에서 부리는 흑인들에게 매우 인간적인 부부였다고 전해집니다. 어느 겨울밤, 메리와 어린 조지가 무장폭도들에게 납치를 당하게 됩니다. 흑인 모자의 목숨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게 여겨지던 그 당시의 상황이었지만, 카버 부부는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조지의 어머니 메리는 어디론가 또다시 팔려간 뒤였고, 어린 조지만 겨우 폭도들로부터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조지는 카버 내외의 보살핌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9XiD8J


당시 미주리 주는 흑인들의 교육을 허락지 않았지만, 수도 네오쇼에 가면 흑인들을 가르치는 링컨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가게 됩니다. 조지는 그곳에서 신앙심이 깊었던 마리아 왓킨스라는 흑인 부인을 만나게 되고, 그녀의 집에서 기거하며 허드렛일을 도우며 공부하게 됩니다. 언젠가 미국의 한 상원의원이 카버 박사에게 ‘당신은 도대체 그 모든 아이디어를 어디서 배웠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카버박사는 ‘책입니다'라고 답했고 곧이어 상원의원이 ‘무슨 책이지요?’라고 되묻자 카버박사는 빙그레 웃으며 ‘하나님의 말씀, 성경책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녀와 함께 살았던 이 시기에 어린 카버는 더욱 신앙심이 깊어졌고, 특별히 평소에 그녀가 했던 말, ‘조지, 너는 언젠가 가난한 동족들에게 네가 배운 것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말을 마음 깊이 새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hB2CSS


온갖 잡일을 하며 학비를 벌어 공부하던 카버는 1880년 20세가 되어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그 후 우수한 성적으로 하일랜드의 한 대학교를 지원하게 되었는데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입학을 거부당합니다. 그러나 상심해 있던 카버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888년 여름, 침례교회에서 만난 존이라는 의사 부부가 그에게 학교를 하나 소개해주었는데, 감리교 목사 매튜 심슨이 설립자로 그는 하나님 안에서 만인의 평등권을 주장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카버는 그의 인생에 중요한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요. 미술을 가르치는 버드라는 선생은 카버가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식물과 자연에 대한 카버의 관심과 자질이 남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이오와 주립대학 교수로 있었던 자신의 아버지에게 카버를 소개하고 입학시킵니다. 예상대로 그는 이 학교를 졸업할 때 수석으로 졸업하는 인재가 되었고, 당시 가장 저명한 식물학자였던 루이스 파멜 교수의 조수로 일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카버는 원예작물 접목법을 개발하여 세균에 대한 과일나무와 식물의 저항력을 크게 높이게 되고, 세균학을 공부하여 2만 가지가 넘는 표본을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점점 명성을 쌓아가며 농업 응용화학 분야에서 권위자가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항상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불쌍한 흑인 동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었지요.


사진출처 : https://goo.gl/Vrn1C7


그러던 중, 카버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편지 한 통을 받게 됩니다. 1896년 당시, 흑인을 위한 학교를 세워 흑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부커 교수에게서 온 편지였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돈이나 지위, 명예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단념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타락하고 가난하여 버려질 운명에 처한 우리의 동족들을 위해 함께해달라는 부탁을 하려는 것입니다. 앨라배마의 터스키지 학원에 농학부를 설치하고 부커는 카버에게 자신과 함께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고, 카버는 그곳이 자신이 가야 할 자리라는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된 것이지요. 연구소는커녕 실험도구 하나 변변히 없는 열악한 환경의 창고에서 그의 위대한 발명과 연구는 시작되었습니다.


한때 남부지방은 면화 재배로 유명했는데, 땅의 질소를 빼앗아가는 면화 재배 때문에 남부의 모든 땅이 척박해지고 이는 계속 악순환이 되어 남부 경제가 위기에 처할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일을 하던 흑인들에게는 이중고를 겪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커버박사는 질소를 잃은 황폐한 땅에 땅콩을 심으면 땅콩에도 좋을 뿐 아니라 땅이 다시 비옥해진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남부 농장마다 이제 땅콩을 재배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대성공을 거두었지요. 그러나 문제는 또다시 찾아왔습니다. 해마다 너무나 많이 쌓여가는 땅콩을 해소할 길이 없어 썩어가고 다시 농민들의 삶은 막막해졌습니다. 다시 카버박사의 깊은 고민과 기도는 시작되었습니다. 밤낮으로 땅콩을 들고 연구한 결과, 땅콩을 이용하여 마가린, 비누, 요리기름, 인조사탕, 잉크, 물감, 접착제, 연고 등과 우리가 잘 아는 땅콩버터까지 100여 가지가 넘는 종류의 음식과 200여 가지의 실용품을 개발해내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x5EXNG


훗날 카버의 명성과 실력에 에디슨 연구소에서 연봉 10만 달러를 제의하며 초빙했지만 카버는 조용히 거절했고, 허름한 터스키지 학교 실험실에 남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정식 수입이라곤 말년까지 1896년 부커 교장이 정했던 월 125달러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의 불행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신앙 안에서 오히려 기적적인 삶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었던 그는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큰 울림이 되는 사람입니다. 사방이 넘어설 수 없는 벽으로 둘러싸였지만,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겸손과 지혜를 가진 그였습니다.




글쓴이 한지숙

글에도 다양한 표정이 있다고 믿는 자유기고가.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 인터넷 공간이라 할지라도 글을 통해 많은 이들과 마음을 나누기를 희망한다. 이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거울 대신 키보드로 표정 연습에 열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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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처럼 빛나는 도전정신,

닐스 구스타프 달렌


스웨덴 스카라보르그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닐스 구스타프 달렌은 아세틸렌가스 저장에 적합한 아가(Aga)라는 다공성 물질을 개발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당시 깜깜한 밤에 배가 항구를 드나들 때 안전의 지표가 되어 주었던 부표와 등대의 기능을 탁월하게 개선한 계기가 되었는데요, 해양교통이 증가하고 복잡해짐에 따라 어느 나라나 배의 안전한 출입과 이에 따른 등불 시스템, 효과적인 관리 비용 등이 큰 관심사로 떠올랐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huKcN5


탄화수소 가스의 일종으로 태우면 밝은 빛을 내는 아세틸렌은 1895년경 최초로 탄화칼륨에서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아세틸렌을 등대의 연료로 사용해보려고 여러 차례 시도가 있었는데요, 그러나 사용되었던 석유가스가 컨테이너에 압축 보관이 가능했던 것과는 달리, 아세틸렌은 1기압 이상의 압력과 미세한 충격으로도 쉽게 폭발했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했습니다.


탄화칼슘을 등부표에 저장하여 물과 반응시켜 아세틸렌을 얻어 사용해보려고 해보았지만, 추운 날씨에는 제대로 된 결과를 얻기가 힘들어 신뢰성이 떨어지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1896년에 프랑스 화학자 클로드와 헤스 두 사람에 의하여 아세톤에 대량의 아세틸렌 성분이 존재한다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용액은 폭발하지는 않지만 아세틸렌의 안전한 저장 용도로는 적합하지 않았지요. 가스의 사용에 따라 혹은 온도가 낮아지면 용액의 부피가 줄어들면서 생기는 공간에 폭발성 아세틸렌이 가득 찰 수밖에 없는 현상 때문이었습니다. 아세틸렌을 위한 다른 안전한 저장 공간이 필요해졌고, 그것이 바로 다공성 물질이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jhEFHq


이것을 만들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하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던 중, 마침내 구스타프 달렌(Nils Gustaf Dalén, 1869~1937)이 아세틸렌 저장에 적합한 ‘아가’라는 이름의 다공성 물질을 개발하였습니다. 컨테이너 안의 다공성 물질인 ‘아가’를 이용해 안전하게 등대나 등부표에 불을 밝히는데 필요한 충분한 양의 아세틸렌을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 이후로도 그의 연구는 계속되었습니다. 가스파이프 개폐 방법을 새롭게 개선하여 기존의 1리터의 가스로 50회 이상의 섬광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을 수천 번의 빠르고 정확한 섬광을 만드는 것이 이 새로운 조절기로 가능해졌습니다.


1907년에는 태양 빛에 닫히고 밤이 되면 열리는 ‘태양밸브’를 개발하였습니다. 민감한 빛에도 작동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낮이라고 해도 안개나 구름이 많아 태양 빛을 가리게 되면 즉시 등불이 작동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아가’ 등불로 인해 무인도나 위험한 암초의 바다처럼 접근이 어려운 장소에 등대나 등부표 설치가 가능해졌습니다. 이전보다 한두 개의 가스 저장기로도 잦은 고장이나 점검 없이 유도 불빛을 밝힐 수 있었기 때문에, 유지 비용도 크게 절약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대부분 해양국가에서 이 장치를 설치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항해 안전 표준이 마련되기도 하였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JZLRJs


이런 그의 공로가 인정되어 1912년에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이 되었는데요, 그러나 그는 수상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고, 그의 동생이 가서 대신 수상을 했습니다. 실험 중에 폭발로 인해 두 눈이 실명되는 큰 사고를 당하여 치료하고 있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회사보다는 치료와 회복을 위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던 그는 자신을 병간호하느라 애쓰는 아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아내가 음식을 하기 위해 화로의 불 유지와 조절에 몹시 힘들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밤에는 불씨를 꺼트리지 않기 위하여 잠도 설치게 되는 아내를 보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아내를 도울 수는 없을까?’


사진출처 : http://imgur.com/1XIB0


달렌이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발명된 것이 바로 ‘아가 쿠커(Aga Cooker)’입니다.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한 이름의 주방 조리기구이지만 스웨덴, 핀란드 등과 같이 북유럽 추운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당시 획기적인 발명품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 기기는 주철에 열을 가하면 에너지가 가둬져 열기가 고르게 오랫동안 유지되는 원리를 이용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추가적인 열원, 당시에는 주로 장작을 이용하였는데 이것을 다시 더 집어넣지 않아도 다섯 시간 정도는 열기가 꾸준히 유지되는 주방기기였지요. 요리도 하고 실내 난방효과에도 탁월한 일거양득의 기기였던 셈이지요.


음식 각각의 위치에 따라 열의 세기도 다양하여 베이킹이나 로스트를 할 수 있는 부분, 소스를 은근히 조릴 수 있는 낮은 온도의 철판 부분, 뜨거운 온도를 유지하는 부분 등 요리 종류에 따라 최적 온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복사열에 의해 음식 맛이 깊어지고 다양한 음식을 동시에 해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 획기적인 주방기기를 발명하고 아내에게 더욱 사랑받는 남편 구스타프 달렌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까지도 이 주방기기는 높은 가격으로 유럽에서 인기가 높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Si2BFh


사실, 그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은 후세에 논란의 잡음이 있었습니다. ‘몇 가지 발명했다고 다 노벨물리학상을 주나’, ‘과연 인류역사와 정신에 큰 영향을 끼칠 만한 정도의 발명이었나’ 등등 누군가는 역대 워스트(worst) 노벨상 중의 하나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은, 닐스 구스타프 달렌이 젊은 시절부터 사고로 눈이 멀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때까지도 발명가로서의 삶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 노벨상을 타기 위함이었을까요? 그저 묵묵히,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캄캄한 밤바다를 지키는 등대의 불빛처럼, 그렇게 자신의 할 일을 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 속 다른 엔지니어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사진출처 : https://goo.gl/n5eV6v




글쓴이 한지숙

글에도 다양한 표정이 있다고 믿는 자유기고가.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 인터넷 공간이라 할지라도 글을 통해 많은 이들과 마음을 나누기를 희망한다. 이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거울 대신 키보드로 표정 연습에 열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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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개혁을 이끈 조선의 발명가, 정약용


성호 이익의 학통을 이어받아 각종 사회개혁 사상을 제시했던 인물 정약용(1762~1836)은 방대한 저술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가 태어난 ‘양근’이라는 곳은 지금의 남양주 지역으로,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들이 존중하던 성리학설과는 대조되는 학문적 성향을 키워 나가던 곳이었습니다. 18세기 후반에 당쟁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정치 참여에 소외되었던 근교 지방 남인들을 중심으로 선진유학에 기초한 실학적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약용이 훗날 서양문물을 연구하고 서학을 받아들이고 개혁에 적극적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분위기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학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정약용

사진출처 : https://goo.gl/1i1oa5


정약용은 23세 때 진사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뛰어난 학문과 재능으로 성균관 시절부터 정조(正祖)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28세 때 비로소 문과에 급제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그 후로 사간원정언, 경기암행어사, 곡산부사,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하며 효율적인 정부조직과 개편을 위하여 혁신적인 개혁안을 내놓으며 고군분투하였습니다. 또한 ‘중국으로부터 선진기술을 받아들이고 선박과 수레 제조기술을 장려하기 위해 이를 관장하는 관청이 중앙정부에 설치되어야 하며 정부의 적극적인 주도로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발명과 기술은 시간이 갈수록 사회발전의 중요한 영향력을 끼칠 것이라 일찌감치 깨닫고, 농업기술, 방직기술, 군사기술, 의료기술 등 사회 다방면에 걸친 기술 혁신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 수원화성

사진출처 : https://goo.gl/VgcShX


그가 임기 중에 이루었던 업적 중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바로 정조의 분부로 시작된 수원화성 축조가 아닐까 싶습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에서 비롯된 건축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영조의 아버지였던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지금의 경기도 화성)으로 옮기면서 이곳에 이미 살던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옮겨야만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조정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노론파를 견제하고 강한 왕권을 확립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정조는 팔달산 아래 신도시 화성을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화성건설을 통해 개혁정치를 실시하고, 실학파 등 고른 인재 등용에 박차를 가하기 위함이었지요. 이때 정조의 뜻을 잘 받들었던 핵심 인재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정약용입니다. 중국을 통해 들여온 책을 보며 그는 전통적인 방법을 기초로 서양의 여러 도시의 특성을 연구하며 화성을 설계하였습니다. 1년 남짓 되어 도시의 기본 틀과 구체적인 건축방법까지 꼼꼼하게 적어 만든 보고서 「성설」을 완성하여 정조에게 바쳤습니다. 특히 정약용은 정조가 전해준 중국책 「기기도설」, 「제기도설」을 참고해 거중기를 고안해 내었습니다. 유형거나 녹로와 더불어 거중기의 활약은 화성건축 현장에서 단연 돋보이는 기기였지요.


▲ 녹로

사진출처 : https://goo.gl/E7nH43


거중기는 위아래 네 개씩의 도르래를 끈으로 연결하고 물체를 달아매어 물레형식으로 돌리면서 무거운 물건을 손쉽게 위로 올릴 수 있도록 고안된 기기였습니다. 이로 인해 건축경비를 크게 줄였을 뿐만 아니라 10년을 예상하던 공사 기간이 크게 단축되어 2년 9개월 만에 완공되었다고 하니 놀라운 혁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역에 참여하는 백성들에게 정확한 품삯을 쳐주어 열심히 일할 수 있게 만든 것도 성공적으로 건축이 마무리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 거중기

사진출처 : https://goo.gl/GjxJpc


그때 당시 공사에 쓰였던 기기들이나 사용된 자재, 공사 기간, 동원된 인원, 건설 방법 등 성곽을 건설하는 전 과정이 글과 그림으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책이 바로 「화성성역의궤」입니다. 이 책 덕분에 훗날 전쟁 등으로 많은 부분 소실되었던 화성의 모습들을 복원할 수 있었지요.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은 주거기능은 물론 군사 기능과 상업 기능을 동시에 갖춘 보기 드문 복합적 기능의 성곽 도시형태로 지형의 능선을 잘 살려 과학적이고도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편, 정약용은 이때 잠깐 천주교에 관심을 두고 입교하게 되는 일이 있었는데요, 당시 천주교 신앙은 집권층의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도전하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기에 강력한 반발을 사게 됩니다. 더군다나 정약용을 총애했던 정조마저 병으로 세상을 뜨고, 결국 1801년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박해가 일어나 유배를 당하게 됩니다. 이 일을 기점으로 사실상 중앙 정치와는 멀어지는 결과가 되었고, 관료로서의 삶은 마감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실학사상의 학문적 집대성은 바로 이 유배 시절에 꽃을 피웠습니다.


▲ (좌)목민심서, 경세유표/(우)흠흠신서

사진출처 : https://goo.gl/Oq7xEC


이 기간에 정약용은 조선왕조 사회현실의 반성과 유학 경전 연구를 통해 개혁안들을 정리 집필하였습니다.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이 바로 그런 책들이지요. 그의 저서는 연구서들을 비롯해 경집에 해당하는 것이 232권, 문집이 260여 권에 이르는데, 대부분 저서가 바로 유배 시기에 쓰였다고 합니다. 500여 권에 이르는 자신의 저서들을 모아 정리한 것이 바로 「여유당전서」이지요. 관료 시절에는 행동하는 실학자로서, 유배 시절과 그 후에는 실학적 사상의 학문적 체계 정립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던 지식인으로서 정약용의 탐구 정신은 계속되었습니다. 기술을 천하게 여기던 통념을 거슬러, 그 시대에 보기 드문 사회에 대한 성찰과 개혁안을 통해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던 조선 후기 사회의 대표적 지성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글쓴이 한지숙

글에도 다양한 표정이 있다고 믿는 자유기고가.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 인터넷 공간이라 할지라도 글을 통해 많은 이들과 마음을 나누기를 희망한다. 이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거울 대신 키보드로 표정 연습에 열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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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민 우유 보급의 일등공신은 누구?

종이 우유 팩 발명가 존 반 워머


▲ 존 반 워머 초상

사진출처 : https://goo.gl/3dtahy


학창시절 2교시가 되면 어김없이 배달되어 오던 200㎖ 흰 우유, 기억하시나요? 우유가 먹기 싫은 아이들은 가방 안에 우유를 넣어 놓았다가 팩이 눌려 터지면서 난감한 상황을 맞게 되기도 했지요. 사실 이 같은 종이 우유 팩이 등장하기 전에는 모두 유리병에 담아 유통이 됐는데, 종이 우우팩이 등장하면서 깨지지 않고 가벼운 포장재로의 유통이 용이해 국민건강식품으로서 우유가 널리 보급될 수 있었습니다.


휴그 무어가 종이컵을 발명해 자판기 혁신을 일으켰던 것처럼, 음료 문화에서 이 종이팩의 발명은 커다란 혁신을 일으키는 발명품이었습니다. 이름하여 카톤(carton)팩,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종이로 만든 상자’쯤 될까요. 이를 처음 발명한 사람은 미국의 존 반 워머(John Van Wormer, 1901~1955)입니다.


▲ 존 반 워머의 종이팩

사진출처 : https://goo.gl/FbXdvR


처음 종이로 만든 우유 용기는 1906년경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거리에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지지만, 액체가 통과하지 않는 종이와 접착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곧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1915년, 존 반 워머가 고안한 우유를 담기 위한 카톤 팩이 미국 특허를 받게 되었는데요, 종이 상자 안쪽 면에는 방수를 위해 직접 파라핀 왁스로 코팅을 입혔습니다. 일명 종이 병(paper bottle)으로 한 번 쓰고 버리기에 퓨어 팩(Pure-Pak)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의 특허는 후에 미국 제지회사가 사들여 보완을 거친 뒤, 내용물을 채우고 밀폐할 수 있는 기계가 세워지면서 더욱 활성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934년에는 자동차와 비행기 생산을 위한 기계를 공급하던 ‘The Ex-Cell-O Corporation’이라는 회사가 이 사업에 잠재적 가치를 알아보고 관심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제지용기 회사가 필요로 하는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우유 팩을 생산하고 배포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게 됩니다. 이때 만들어진 우유 팩이 바로 게이블 탑(Gable top)으로 지금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카톤 우유 팩의 지붕 모양과 아주 흡사한 초기 스타일이었습니다.


▲ 게이블 탑

사진출처 : https://goo.gl/OBHtm1


1952년이 되어 스웨덴의 한 식품 포장재 회사에서 또 다른 스타일의 카톤팩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 대표 중 한 사람이었던 루벤 라우싱(Ruben Rausing)은 1943년부터 새로운 우유포장을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최소 경비의 운반과 함께 우유가 상하지 않고 밀봉되어 위생적으로 유통되는 것이 그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그의 연구는 7년이 넘는 시간동안 계속되었고, 마침내 1951년 발명된 것이 바로 테트라(Tetra) 클래식입니다. 이름은 생소하지만 사진을 보면 아마 ‘아하!’ 하게 될 겁니다.


▲ 테트라 클래식

사진출처 : https://goo.gl/wDbyjd


사진출처 : https://goo.gl/ddrokB


‘테트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숫자 4를 뜻합니다. 4면체의 종이팩, 삼각뿔 형태로 되어 있어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테트라 팩은 75%의 종이와 20% 폴리에틸렌, 5%의 알루미늄 포일로 만들어집니다. 무게도 적게 나가는 것은 물론, 유리병보다 안전하고 유통비용을 크게 절감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폴리에틸렌 코팅과 알루미늄 포일은 액체가 용기 밖으로 새지 않고 종이가 젖지 않는데 효과적이었고, 공기와 빛으로부터 내용물을 보호하여 미생물로 인해 내용물이 변질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우유를 방부제 없이도 오랫동안 상온에서 위생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1954년에 이 패키지 시스템이 독일로 수출되었고, 그 뒤로 프랑스, 스위스, 소련, 일본 등으로 수출되기 시작했습니다. 1959년까지 해마다 10억 개 이상의 테트라 팩이 생산되어 덩어리 우유와 유리 우유병을 대체해 나갔다고 하니, 식문화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 발명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덕분에 1962년에는 멸균 우유 팩이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유통기한이 그만큼 길어져 경제적 이득 효과를 크게 상승시켰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지요. 그 이후로 테트라 클래식 팩의 모양은 계속 변화하여 무균 포장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직사각형태의 테트라 브릭, 빨대가 부착된 테트라 프리즈마, 돌려서 여는 뚜껑의 테트라 렉스와 테트라 톱 등으로, 마켓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음료 포장용기가 되었습니다.


▲ (맨 왼쪽이) 루벤 라우싱, 테트라 팩 발명

사진출처 : https://goo.gl/TAypZN


무심코 먹었던 음료수 팩 하나에도 많은 사람의 아이디어와 과학적 연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운데요, 천연펄프가 주재료이기 때문에 폴리에틸렌과 알루미늄을 분리하여 재생보드지, 화장지, 분쇄된 종이팩을 압축한 칩보드 등 재활용 원료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니 환경친화적인 발명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시고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우유 팩과 음료 팩이 환경보호 차원에서도 앞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재활용될 수 있길 기대해 봅니다.




글쓴이 한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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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은희 2017.05.10 12:50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자집 애들만 먹을 수 있었던 흰 우유!!!
    옛날 생각이 나네요.



비가 오는 거리를 걷다 보면 알록달록 형형색색의 레인부츠를 신은 젊은이들을 쉽게 볼 수 있는데요, 화려한 색감을 입고 젊은 여성들 사이에 패션 아이템 중의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일찌감치 고무장화 패션을 이끄셨던 분들이 계십니다. 시골 논밭에서 혹은 어시장에서 일하시는 우리의 부모님들, 그분들이 고무장화 패션의 선두주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정말로 고무장화는 어느 나라에서,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을까요?


사진출처 : https://goo.gl/oKQGuS


미국 기업가 히람 허친슨 (Hiram Hutchinson, 1808~1869)이라는 사람이 1853년 프랑스 몽타르지에 연성고무회사를 세우게 됩니다. 인구의 90%가 전원생활을 하던 당시 프랑스에서 고무장화를 팔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였습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웰링턴 부츠라고 들어보셨나요? 영국 웰링턴 공작의 이름을 딴 이 부츠는 19세기 초 영국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부츠였습니다. 허친슨은 초기 제품인 웰리 부츠에 이어 무릎까지 올라오는 웰링턴 부츠 스타일의 고무장화를 만들어 프랑스에서 소위 요즘 표현으로 대박을 터트렸습니다. 이 회사는 훗날 방수신발과 방수의류, 아웃도어의 명품브랜드사로 성장해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지요.


사진출처 : https://goo.gl/6oLW2j


질기고 탄력 있는 고무의 발견이 없었다면 히람 허친슨의 고무장화도, 더 나아가 자전거나 자동차의 바퀴를 감싸는 타이어의 발명도 불가능한 일이었겠지요. 그 일을 가능케 한 인물이 바로 오늘 소개할 찰스 굿이어 (Charles Goodyear, 1800~1860)입니다. 아버지의 철물점을 운영하다 문을 닫게 되자 고무의 성질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게 됩니다. 그와 함께 고무 연구를 했던 나다니엘 헤이워드 (Nathaniel M. Hayward)가 고무에 유황을 첨가하면 탄성이 더 좋아진다는 것을 발견, 굿이어는 그로부터 특허권을 사들였습니다. 1837년에는 정부로부터 우체국의 우편물을 배달하기 위한 고무가방 제작을 의뢰받게 됩니다. 그러나 고온에 쉽게 녹아버리고 추위에 딱딱하게 갈라지는 열에 약한 고무의 문제점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BIfwPf


1839년 추운 겨울 어느 날, 굿이어는 무심코 유황 섞인 천연고무를 뜨거운 난로 위에다 놓아둔 채 깜박 잊고 외출하고 돌아옵니다. 고약한 냄새와 함께 까맣게 타다 만 고무를 발견하게 되지요. 이전보다 훨씬 단단할 뿐만 아니라 탄력성과 내구성이 좋아진, 그렇게나 자신이 찾고자 연구했던 성질의 고무가 되어 있었습니다. 고무에 유황뿐 아니라 열을 가해야 한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이지요. 이 사건이 바로 찰스 굿이어의 ‘고무가황법’ ‘열가류법’의 탄생으로, 새로운 성질의 고무 발견과 함께 고무산업의 혁신을 일으킨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1844년 특허를 따내고 예상대로라면 그는 곧 벼락부자가 되었겠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생전에 부를 누리기는커녕,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당시로써는 어마어마한 돈 20만 달러가 넘는 빚을 가족에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그의 특허를 도용한 사람들과 기나긴 법정 싸움을 해야 했고, 그는 185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무가황법 특허에 완전히 승소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상품들을 전시했던 국제박람회 개최지인 잉글랜드로 건너가 공장을 세우려 했지만 자금난 등으로 실패합니다. 게다가 기술적, 법적 문제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에서 특허권을 잃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그의 가황고무를 생산하던 회사까지 망하게 되는 정말 엎친 데 덮치는 불운을 겪게 됩니다. 그로 인해 빚을 크게 져서 1855년에는 감옥살이까지 했다고 하니, 그는 물론이고 그의 가족들에게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지요.


사진출처 : https://goo.gl/qmpn57


그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찰스 굿이어 주니어가 고무를 이용한 자동차 바퀴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딸이 아빠가 만든 자동차 고무바퀴를 보면서 “자동차 중에서 가장 피곤한(tire) 부분이 바퀴인 거 같아요!”라고 말했던 데서 이전까지 러버 휠(rubber wheel)이라고 불리던 자동차바퀴가 타이어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그러나 어쩐지 그의 아들도 그렇게 큰돈은 벌지 못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지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타이어 회사 ‘굿이어’도 이 가족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는 프랭크 세이버링이라는 사업가가 발명가 찰스 굿이어를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세이버링은 이 회사를 세우고 타이어를 팔아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게 되었지요.


사진출처 : https://goo.gl/lYOaeu


고무 타이어는 한 단계 더 발전한 모습이 되어 영국 수의사 존 던롭(John Dunlop)에게도 부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몸이 약한 그의 아들이 자전거를 타다가 자꾸 넘어지는 것을 평소 안타깝게 생각하며 고민하던 어느 날, 아들이 바람 빠진 공을 들고 와 공기를 넣어 달라고 할 때 한 가지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즐겨 타던 삼륜 자전거 고무바퀴에도 공기를 주입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던롭은 사업적 가능성에 확신을 하고 서둘러 자신의 재산을 정리하여 던롭 공기타이어 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공기타이어는 선풍적 인기를 끌어 불과 7년여 만에 던롭을 영국 재계의 거물 자리로 올려놓았습니다. 또한 독일의 벤츠사와 미국의 포드사에 자동차용 공기타이어를 독점 납품하게 되어 대기업 회장으로 변신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찰스 굿이어의 고무가황법으로 탄생한 새로운 고무는 이처럼 많은 사람에게 때로는 고무장화나 아웃도어 명품으로, 때로는 자전거의 대표적인 브랜드나 자동차 타이어의 유명 브랜드로 자리 잡아 부와 명예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고무를 발견한 본인, 찰스 굿이어는 사는 동안 그렇게 정당한 대가와 대우를 받지 못하고 고생만 하고 살았던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발명과 발견 못지않게 그것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지혜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글쓴이 한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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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듯 닮은 두 명의 테크놀로지스트

집적회로 IC 최초발명가 잭 킬비와 로버트 노이스


▲ 잭 킬비와 로버트 노이스

사진출처 : https://goo.gl/x0ft7Y


1983년 처음 나온 휴대전화는 지금에 비하면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흔히 ‘벽돌폰’이라고 불리기도 했었지요. 지금의 휴대전화와 비교해보면 조금 우스꽝스러운 크기의 모습인데요, 휴대전화가 등장한 지 3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눈부신 IT 기술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휴대전화를 최초로 개발하여 상용화했던 ‘마틴 쿠퍼’는 미래의 휴대전화는 더는 휴대전화가 아닐 수 있으며 사람의 귀 안에 심는 전화기가 머지않아 현실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칩’을 귀 안에 심어 그런 일들이 가능해진다는 것인데요, 전자산업의 혁신적 발전의 계기가 된 트랜지스터 발명과 집적회로 IC (Integrated Circuit)의 발명이 없었다면 이 모두가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 집적회로 IC

사진출처 : https://goo.gl/m2zev5


잭 킬비 (Jack Kilby, 1923~2005)와 로버트 노이스 (Robert Noyce, 1927~1990)가 바로 이런 일들을 가능케 만든 발명의 주인공들입니다. ‘집적회로 발명가’라고 하면 이 두 사람을 함께 거론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킬비가 노이스보다 6개월 정도 앞서서 집적회로 원리를 발표하긴 했지만, 노이스는 킬비보다 한 층 더 완성도 높고 실용성 있는 집적회로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한동안 ‘집적회로 최초 발명자’라는 타이틀을 놓고 발명품 특허분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부친이 아마추어 무선 기사들과 협력해 고객들과 종종 통화하는 모습을 보았던 킬비는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전자공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1950년 위스콘신 대학에서 전기공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1958년 그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될 TI에 입사하게 됩니다. 바로 그곳에서 집적회로를 발명하게 되는데요, 신입사원은 여름휴가가 없었던 회사의 규정상 킬비도 여름휴가를 얻지 못한 채 출근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꽤 억울한 일이기도 할 텐데요, 1980년 킬비는 모 잡지 인터뷰에서 이때를 회상하며 집적회로의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은 모두가 휴가를 떠나버리고 사방이 조용하던 그때쯤이었다고 말 한 적이 있습니다.


▲ 잭 칼비의 도면 스케치가 담긴 노트

사진출처 : https://goo.gl/Uia802


▲ 잭 킬비가 만든 최초의 집적회로

사진출처 : https://goo.gl/IMbDh4


1959년 킬비는 반도체 공정을 이용해 소자들을 한 개의 게르마늄 칩 위에 집적하고 작동시키는데 세계 최초로 성공하고, 그해 2월에 특허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개발한 방법은 칩 위의 부품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알루미늄 선을 연결해야 했기 때문에 대량 생산은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비슷한 시기에 집적회로 연구를 하던 페어차일드의 로버트 노이스는 부품을 회로에 집적 결합하는 아이디어를 갖고 나타났습니다.


트랜지스터를 발명했던 벨 연구소의 쇼클리와 결별한 뒤 노이스는 1957년 말, 동료들과 함께 페어차일드 회사를 만들게 됩니다. ‘실리콘밸리’ 타운의 역사가 쓰이기 시작한 셈이지요. 그곳에서 노이스는 동료들과 함께 실리콘 산화물을 이용해 막을 입히면 외부의 오염을 크게 차단해 예민한 회로를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실리콘 산화물 코팅에 홈을 내서 전선을 이으면 트랜지스터 사용에서 발견되었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리콘 블록의 홈을 저항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증명해내게 됩니다. 이 과정을 거듭 실험하여, 마침내 1959년 1월, 노이스는 노트 4페이지를 가득 채운 집적회로의 그림을 완성하게 되지요.


▲ 로버트 노이스 집적회로

사진출처 : https://goo.gl/myhwUr


▲ 로버트 노이스 특허 대표 도면

사진출처 : https://goo.gl/TZ69bL


비슷한 발명 시기 때문에 긴 법정 다툼이 있었지만, 이는 개인 간의 감정싸움이 아닌 각자 속한 회사 간의 분쟁이었기에 결국 두 회사는 서로의 권리와 명예를 인정하고 함께 나아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특허권을 공유하기로 결정한 것이지요. 이후, 노이스는 동료인 ‘무어’와 자신의 이름을 따 ‘노이스-무어 일렉트로니스’를 설립했다가 이름이 ‘잡음이 많다’라는 뜻으로 들릴 수 있다는 의견에 따라 1968년 회사명을 ‘인텔(Intel)’로 바꿉니다.


1983년 TI에서 공식 은퇴한 킬비는 그 이후로도 컨설팅 협력을 계속하며 엔지니어로서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다양한 전자기기 발명으로 60여 개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며, 미국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의 기술상인 과학훈장과 기술훈장을 동시에 받은 몇 안 되는 과학기술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킬비와 노이스의 집적회로 개발은 20세기 최고의 발명 중 하나로 평가될 정도로 반도체 산업발전의 진정한 개척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업적을 기려 킬비에게 2000년 노벨물리학상이 수여되었습니다. 노이스는 1990년에 사망해 수상의 영예는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킬비는 노벨물리학상 수상 연설에서 노이스의 성과를 잊지 않고 언급하여 지켜보았던 많은 사람에게 훈훈한 마음을 안겨주었습니다.


“엔지니어의 동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라고 말하며 과학자보다는 엔지니어로 불리길 원했던 킬비처럼, 노이스 역시 ‘리스크에 친숙한 사람들’이란 뜻으로 테크놀로지스트로 불리길 원했다고 합니다.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동시에 최고의 기술 동반자였을 두 사람. 다른 듯 닮은 두 사람의 도전 정신은 어려움과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는 엔지니어들의 멋진 모습입니다.




글쓴이 한지숙

글에도 다양한 표정이 있다고 믿는 자유기고가.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 인터넷 공간이라 할지라도 글을 통해 많은 이들과 마음을 나누기를 희망한다. 이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거울 대신 키보드로 표정 연습에 열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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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가영 2017.03.06 04:30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예전에 페이퍼 사보 시절엔 퇴근길에 통근이에 앉아 보곤 했는데,
    옛 기억을 더듬으며 오늘 사보를 보내요.

    미래에는 더 이상 핸드폰이라 불리지 않겠네요.
    그땐 뭐라 칭 할려나???
    귓 속에 칩을 심는다...좀 섬뜩하기도 하고 영화 속 한 장면 같기도 하고...
    과학의 눈부신 발전이 인간에게 좋기만 한 건지???
    잠시 걱정스러운 생각을 하게 하네요.

    • 미스터 반 2017.03.06 16:03 신고 Address Modify/Delete

      네 과학의 발전에 따라 모든 것이 눈부시게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요. ^_^ 헌데 과거에는 이맘때쯤 우주선이 날아다닐거라고 했지만 아직은 아니듯, 빛의 속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생각보다 조금은) 천천히 발전해가고 있는 것 같아요. ㅎㅎ 그동안 인간의 사유(思惟)도 늘어가겠지요.


위대한 발명은 ‘세렌티피티’처럼 우연하게 느닷없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지난해 [역사 속 엔지니어]에서 다루어졌던 수많은 발명가의 발명들도 그러했는데요, 사진기 발전의 한 획을 그었던 루이 자끄망테 다게르(Louis J, M, Daguerre, 1787~1851)의 발명 역시 그렇게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vQnPMz


다게르는 1787년 11월 18일 프랑스 코르메유 장 파리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원래 직업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원리를 이용하여 극장무대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습니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어두운 방’이라는 뜻인데요, 오늘날 카메라의 어원이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캄캄한 방 한쪽 벽에 조그만 구멍을 뚫어 빛을 통과시키면 맞은편 벽에 외부 풍경의 상이 거꾸로 맺히는 원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한 번쯤 만들어본 ‘바늘구멍 사진기’ 혹시 기억하시나요? 그것이 바로 카메라 옵스큐라인 셈이지요.


▲ 카메라 옵스큐라 원리

사진출처 : (좌)https://goo.gl/Kt7IPU/(우)https://goo.gl/ZOZRwk


이런 원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화가들이 사물이나 풍경을 그릴 때 사용되어 오던 기법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림의 원근법적 시각의 정확성을 위해 이 방법을 언급하기도 하였지요. 다게르는 카메라 옵스큐라 초점판에 비친 아름다운 장면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졌습니다. 1827년경부터 본격적인 사진 연구에 몰두하였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파리의 렌즈가게에서 사진을 연구하고 있던 ‘조세프 니엡스’를 알게 됩니다. 사실, 그는 이미 자신의 집 앞에서 사진을 찍었을 정도로 다게르보다 먼저 사진 연구에 한발 앞선 인물입니다.


니엡스는 비튜멘(bitumen)을 칠한 금속판을 카메라 옵스큐라 벽면에 세워 1826년 최초로 사진을 찍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니엡스의 ‘헬리오그라피’인데요, ‘태양으로 그리는 그림’이란 뜻에 걸맞게 장장 8시간이나 태양 빛에 노출해야 했으며 단 한 장의 사진만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긴 시간 동안을 찍어야 하는 탓에 풍경을 찍을 때는 태양의 위치가 변하여 두 개의 해가 사진 속에 나타나기도 하고, 몇 시간씩 꼼짝 못 하고 있어야 하는 인물 사진은 더욱 찍기 어려워 카메라만 보면 모델들이 도망가 버렸다고 합니다.


▲ 헬리오그래피와 니엡스 초상화

사진출처 : (좌)https://goo.gl/8gerbW/(우)https://goo.gl/8NzMsX


그런 상황에서 다게르가 니엡스를 만나게 된 것이지요. 다게르는 자신과 함께 사진 연구에 함께할 것을 니엡스에게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함께 공동연구를 진행하던 중에 니엡스는 사망하게 됩니다. 다게르는 니엡스의 사진이론을 발판 삼아 혼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되지요.


그는 우선 빛에 분해되기 쉬운 은염을 연구하였습니다. 은도금 동판에 요오드 증기를 씌워 햇빛에 노출하면 희미한 영상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형체를 정확히 알 수 없어 사진이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온갖 연구를 시도했지만 형상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가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그는 희미한 형상이 나타났던 판을 약품 저장소에 두었다가 꺼내 보게 되고, 형상이 제법 선명해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니, 수은 온도계가 깨져 있었습니다. 분명히 수은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직감하게 되었지요. 햇볕을 쬔 은판에 수은 증기를 쐬어 이미지를 드러나게 하면 오늘날의 흑백 사진과 같은 포지티브 영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방법은 니엡스의 사진보다 선명한 영상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었고 촬영 시간도 30분 정도로 단축되었습니다. 다게르는 이를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1839년, 최초의 은판 사진기였습니다.


▲다게르가 촬영한 ‘탕플대로의 풍경’

사진출처 : https://goo.gl/YrwWoB


▲다게레오타입 

사진출처 : https://goo.gl/50HcfB


사진은 예상대로 폭발적 인기를 얻으며 여러 분야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다게레오타입은 특히 미국에서 1850년대까지 3백만 개가 넘게 팔렸고, 전문 직업으로 활동하는 사진사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새로운 발명으로 새로운 직업이 생겨난 것이지요. 특히나 사진기술이 발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크림전쟁이나 남북전쟁 때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는 도구로써 유용하게 쓰이면서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는데요, 공식 종군기자가 생기고 이들이 활동한 ‘르포르타주’라는 새로운 영역이 생겨나면서 ‘리포터’라는 새로운 직업도 생겨났습니다.


그 이후로도 카메라 사진기술은 영국의 탈보트(Talbot, 1800~1877) 등 여러 나라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에 의해 계속 연구되고 발전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게르는 훗날 니엡스의 공로를 살짝 숨기고 혼자 명예를 차지하려고 하여 구설에 올라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혜택은 어느 한 사람만의 업적은 분명히 아닌 듯합니다. 그동안 등장했던 역사 속 엔지니어들처럼 또 다른 발명은 앞선 사람의 발명이나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 발명의 기초를 닦아준 앞사람의 공로를 정정당당히 인정하는 것, 꼭 필요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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