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계는 끊임없는 정보교환과 상호의존이 불가피해진 시대를 맞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재능있는 사람도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하기는 어렵다. 지난날 리더에게 요구됐던 카리스마적인 권위의 중요성은 점점 엷어지는 반면, 협력과 협조의 미덕이 갈수록 강조되고 있다. 정치가든 기업가든 자신의 권한과 책임을 분산해 공통의 가치와 포부를 가지고 공동 목표를 향해 함께 일해 나갈 협력자들이 절실히 필요해진 것이다. 이에 저자는 책을 통해 5년여에 걸쳐 이인자들이 리더를 위해 어떻게 이바지하고 어떤 인간관계를 맺어왔으며 협력자가 됨으로써 얻은 대가와 혜택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출판사 서평 중에서)

 

  위대한 이인자들

  저자 : 워런 베니스
  역자 : 최경규
  출판사 : 좋은책만들기

 

지난 2월 4일,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 업체인 마이크로소프트(MS)가 차기 CEO로 인도 출신의 나델라(Satya Nadella)를 승진 임명했다. 작년 8월, 당시 CEO였던 스티브 발머(Steve Ballmer)가 혁신이 사라지고 회사가 정체되고 있다는 비판에 사임 의사를 밝힌 지 5개월이 지난 후였다. 한때 세계 최대의 기업 가치를 자랑하던 MS의 이사회에서 발머를 대신할 인물을 고르는 데 어지간히 애를 먹었다는 후문이다. 그만큼 발머가 MS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그동안 빌 게이츠(Bill Gates)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됐지만, 게이츠는 발머와 짝을 이뤄야 힘을 낼 수 있었다. MS의 전 임원은 이런 말을 할 정도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빌 게이츠 없이도 경영될 수 있다. 하지만 스티브 발머의 성공하려는 노력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간 우리는 스포트라이트 뒤에 있는 이인자들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런 점에서 경영학 교수인 데이비드 히넌과 리더십 분야의 대가인 워런 베니스가 쓴 「위대한 이인자들(좋은책만들기, 2000)」은 흥미로운 책이다. 저자들은 역사적 인물에서 현대의 유명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위대한 이인자들을 연구하여, 그중 열 명의 사례로 책을 묶었다. 시대나 사회에 따라 이들의 이야기는 저마다 다르지만, 위대한 이인자들이 된 사람들은 비슷한 공통점이 있었다.

 

 

 

 

누가 위대한 이인자가 되는가


첫째, 위대한 이인자는 실행가다. 이들은 일인자를 완벽하게 보완한다. 많은 경우 일인자는 미래를 제시하는 비전가다. 그래서 이인자에게 일인자의 비전을 철저히 실행하는 능력은 필수적이다. 발머가 MS에서 그랬다. 하버드대학교 기숙사에서 빌 게이츠와 친구가 된 발머는 대학을 졸업하고 생활용품 회사인 P&G에 들어갔다. 이후 스탠퍼드 비즈니스 스쿨을 다니던 중 1980년 게이츠의 권유로 대학원을 중퇴하고 급성장하던 MS에 합류했다. 그는 회사에서 프로그래머가 아닌 최초의 직원이었는데, 처음부터 인력 채용을 비롯해 광범위한 업무를 맡았다.

 

▲ <사진 1> 스티브 발머

출처: farm5.staticflickr.com

 

발머는 게이츠의 비전을 현업에서 구체화했다. 게이츠가 새로운 시장을 찾으려 할 때 발머는 새로운 시장을 지배할 방법을 찾아냈다. 게이츠가 소프트웨어로 PC 산업을 지배할 꿈을 가지고 있을 때, 발머는 시애틀 컴퓨터 제조회사의 운영체제를 5만 달러의 낮은 가격에 구매하자고 경영진을 설득했고, 직접 그 계약을 성사시켰다. 나중에 MS-DOS로 이름을 바꾼 이 시스템은 MS가 PC 산업을 장악하게 된 윈도(window)의 모태가 되었다. 윈도를 개발할 때 그는 엔지니어가 아니면서도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을 관리했다. 제품 개발이 난관에 부딪히면 적합한 기술을 지닌 엔지니어를 찾아내 스카우트했다. 발머의 지휘로 윈도 팀은 격무에 시달렸는데, 그들은 사무실에서 주로 숙식을 해결하며 일했다.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혹사시키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한번은 회의에서 소리를 지르다가 성대를 다쳐 수술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직원들을 다그쳤다. 이처럼 발머는 MS에서 게이츠의 전략을 실현하게 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천재적이지만 다른 사람들과 소통이 어려운 게이츠에게 발머는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평생의 파트너였다. 심지어 게이츠의 부탁으로 멜린더 프렌치에게 대신 청혼한 사람도 발머였다.

 

둘째, 위대한 이인자는 장인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일 자체에 집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성공의 명성은 대부분 일인자가 차지한다. 그래서 이인자는 명성과 성공을 구분한다. 이들에게 성공이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위대한 이인자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기에, 보스에게 어렵지만 옳은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용기를 지닌다.

 

▲ <사진 2> 조지 마셜

출처: farm4.staticflickr.com

 

유럽부흥계획인 마셜 플랜의 제창자인 조지 마셜(George Catlett Marshall) 장군은 오히려 이런 용기로 기회를 얻었다. 마셜은 경쟁자였던 맥아더의 반대로 오랫동안 장군으로 진급하지 못하다가 맥아더가 육군참모총장에서 필리핀으로 옮겨간 후에야 55세에 별을 달았다. 육군참모총장 부관으로 백악관에서 열린 회의에 참가했을 때, 루스벨트 대통령은 1만 대의 비행기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참석자들이 대통령의 의견에 동의했으나 마셜은 혼자 반대했다. 그렇게 많은 전투기를 만들고 인원을 늘리는 것은 지나치게 야심적이고 매우 비현실적이라는 이유였다. 루스벨트는 화를 내며 방을 나갔고 회의는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동료들은 마셜의 워싱턴 생활이 끝났다고 예상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솔직한 하급 장성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몇 달 후, 육군참모총장이 은퇴할 시기가 다가오자 대통령은 후보 명단에 장성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마셜의 이름을 올리라고 지시했다. 결국, 1939년 마셜은 다른 선임들을 제치고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는 파격적인 진급을 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마셜은 은퇴한 맥아더 장군을 다시 기용하도록 루스벨트를 설득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수년 동안 자신의 진로를 방해한 맥아더를 천거할 정도로, 마셜은 개인적 감정보다는 일이 되도록 만드는 사람이었다. 마셜은 전쟁이 끝나자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을 역임했고, 유럽의 경제부흥에 대한 공적이 인정되어 195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셋째, 위대한 이인자는 대인이다. 이들은 건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 1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2등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자신감이 필요하다. 자신이 만든 최고 작품의 영예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볼 수 있을 만큼 강한 자아와 자신감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많은 위대한 이인자들에게는 허영심이 없다. 이들은 결코 욕심이 없거나 안분지족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허영에 눈이 멀어 일을 그르치지 않는다.

 

▲ <사진 3> 저우언라이

출처: www.zhouenlaipeaceinstitute.org

 

마오쩌둥(毛澤東)의 동반자 저우언라이(周恩來)도 그랬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저우언라이는 초기 중국공산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최고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소련과 상황이 다른 중국에서는 전통적인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농민운동을 하고 있던 마오쩌둥에게 눈을 돌렸다. 저우언라이는 자신에게 없는 지도자 자질이 마오쩌둥에게 있음을 알고 그를 지지하기로 마음먹었다. 1935년 준의회의(遵義會議)에서 자신이 지도한 전술의 오류를 인정하고 군 위원회에서 사퇴한 동시에, 마오쩌둥을 사령관으로 추천했다. 저우언라이는 최고 서열의 자리를 이름 없는 부하에게 과감하게 내주었다. 그리고 스스로 마오쩌둥 밑에서 평생 조력자로 남았다. 그는 마오쩌둥만이 중국의 미래를 이끌 수 있는 지도자 자질을 가지고 있으며 민중을 이끌고 혁명을 완수할 수 있음을 알아차렸다.

 

1949년 공산 정권 수립 후에도 저우언라이는 27년간 총리로서 국내외 여러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항상 마오쩌둥을 앞에서 달리도록 했고 자신은 뒤따라갔다. 몇몇 당원들은 저우언라이를 마오쩌둥의 가정부라고 불렀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무대 뒤에서 신생국을 살아남게 하는 과제를 떠맡았다. 마오쩌둥의 주요 문서는 저우언라이가 대부분 초안을 작성했고, 천부적인 협상가이자 실용주의자로서 수많은 나라의 지도자와 회담을 성공하게 했다.

 

닉슨은 이렇게 말했다. “마오쩌둥이 없었다면 중국의 혁명은 절대 불붙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우언라이가 없었다면 그 불길은 다 타서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한 유명 저술가는 이런 말을 했다.

 

“창의적 기업가가 없으면 기업이 생겨날 수 없다. 하지만 기업가가 계속 기업을 맡아 운영하면 살아남는 기업은 별로 없을 것이다.”

 

기업을 살아남게 하는 일은 위대한 이인자에게 맡겨진 몫이다.



위대한 이인자들

저자
워렌 베니스, 데이빗 히넌 지음
출판사
좋은책만들기 | 2000-07-20 출간
카테고리
자기계발
책소개
지속적으로 위대한 조직을 경영해 나가기 위해서는 한 명 이상의 ...
가격비교



글쓴이 이병주는 _ 신문과 잡지에 경영 칼럼을 기고하는 칼럼니스트이자 경영 전문가다. 여러 기업체에서 강의도 하지만 글 쓸 때가 가장 재미있다고 느낀다. 평소 인문학적인 글쓰기를 즐기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 글을 쓰고자 항상 노력한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Comments : 댓글을 달아주세요

댓글을 달아 주세요


 


1975년 파리, 출판사 대표인 카미유는 이제 막 어머니를 잃었다. 숱한 조문편지들 틈에 섞인 두툼한 편지 한 통. 자신이 모르는, 루이라는 남자가 보낸 이 편지엔 그가 사랑하는 안니라는 여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카미유, 루이, 안니, M. 부인, 네 명의 목소리로 펼쳐지는 「비밀 친구」는 마치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이야기 속의 이야기, 반전 속의 반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야 마침내 온전한 모습으로 비밀을 드러낸다.

 

 



이 책에서는 마음 놓고 크게 웃을 수 있는, 마음 놓고 웃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유머러스한 대화 방법과 기술을 표현한다. 웃기기 위해 허황된 이야기만을 지어내려 애쓰기보다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이야기들, 나 자신부터 웃길 수 있는 솔직한 유머를 활용하는 실질적 유머 대화 안내서다. 솔직하고 진정성 있는 유머의 대화로 인간관계의 갈등까지도 해소하는 비법과 더불어, 다양한 인간관계 속 유머러스한 대화의 기본 원칙들을 제시하며 진정으로 유쾌한 소통을 원하는 이들에게 바른 모범 답안을 제시할 방법을 일러준다.

 

 



루게릭병은 근육에 붙은 신경이 죽으면서 근육까지 죽게 하는 신경근 질환으로, 근육에서 근육으로 계속 퍼져나가며 밝혀진 원인도 치료법이나 치료 약도 없다. 수전은 이미 혼자서는 열쇠를 돌려 문을 열 수도 없고, 이를 닦을 때 혀가 경련을 일으키고, 남편의 도움을 받아야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병이 진행된 상태였다. 최소한의 건강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일 년 남짓. 수전은 의사를 찾아다니지도, 구글 검색에 미쳐 지내지도 않기로 한다. 대신 그 일 년을 지혜롭게, 두려움 없이, 무엇보다도 기쁘게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프로 바둑기사 태석은 내기 바둑판에서 살수팀의 음모에 의해 형을 잃는다. 심지어 살인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서 복역하기에 이르고, 몇 년 후 살수와의 대결을 위해 전국의 내로라하는 선수들을 모은다. 각자의 복수와 마지막 한판 승부를 위해 모인 태석, 주님, 꽁수, 허목수는 승부수를 띄울 판을 짠다. 단 한 번이라도 지면 절대 살려두지 않는 악명 높은 살수팀을 향한 계획된 승부가 차례로 시작되고…. 범죄로 곪아버린 내기 바둑판에서 꾼들의 명승부가 펼쳐진다.

 

 



진화한 유인원 vs 멸종 위기의 인류, 평화는 깨졌다.
치명적인 바이러스 그 후 10년, 시저가 이끄는 진화한 유인원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만들고 평화롭게 살아간다. 한편, 바이러스로부터 살아남은 극소수의 인간들은 멸종 위기와 가족을 잃은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서로의 존재를 잊고 있던 두 종족은 우연히 다시 마주치게 되고, 피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생존을 건 전쟁을 시작한다. <혹성탈출 : 반격의 시작>은 인간과 유인원의 더욱 본격적인 대립을 다룬다. <클로버필드>(2008)의 맷 리브스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모션 캡쳐 연기의 대가 앤디 서키스와 명배우 게리 올드먼, 제이슨 클락 등이 출연한다.

 

 



12척의 조선 vs 330척의 왜군, 역사를 바꾼 위대한 전쟁이 시작된다.
1597년 임진왜란 6년, 무서운 속도로 한양으로 북상하는 왜군에 의해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누명을 쓰고 파면당했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건 전의를 상실한 병사와 두려움에 가득 찬 백성, 그리고 12척의 배뿐. 마지막 희망이었던 거북선마저 불타고 잔혹한 성격과 뛰어난 지략을 지닌 용병 구루지마가 왜군 수장으로 나서자 조선은 더욱 술렁인다. 330척에 달하는 왜군의 배가 속속 집결하고 압도적인 수의 열세에 모두가 패배를 직감하는 순간, 이순신 장군은 단 12척의 배를 이끌고 명량 바다를 향해 나선다.

 

 

Posted by  Mr.반

 

 

 

 

 

 

 

 


Comments : 댓글을 달아주세요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오드리박 2014.07.18 10:3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올 여름 극장가에서는 세개 사극이 붙습니다.

    군도, 해적, 명량 이지요. 그중에서 가장 기대작으로 꼽는 것은 '군도 : 민란의 시대' 입니다. 명량은 최종병기 활 만든 감독이 만든건데 역기 살짝 기대감이 있습니다. 해적은 예상불가입니다.

    군도는 하정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데요 꽤 볼만한 것 같습니다. 적어도 500백만은 넘지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현대 물질문명의 이기와 인간 소외의 현실 속에서 음악은 언제나 한순간의 휴식과 안식처 역할을 해왔다. 일반적으로 음악에는 크게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이 존재하는데, 대중음악 분야에 있어서 60년대 말 ‘프로그레시브 록(Progressive Rock)’의 출현은 그때까지 대중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의 형식에서 벗어난 하나의 충격이었다.

 

▲ 핑크 플로이드

출처 : farm3.staticflickr.com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의 히피와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등장은 대중음악계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혼돈과 무질서를 초래한다. 특히 대중음악계에는 여러 장르의 음악들이 서로 공존해 어정한 분야로 지칭하지 못하는 방향성이 없는 춘추 전국의 시기였다. 그러나 이즈음에 등장한 프로그레시브 록은 여러 음악 장르(구체적으로 Soul, Heavy Metal, Jazz, Country 등)를 포함하는 한편, 대중음악의 영원한 숙제였던 클래식(Classic)의 두꺼운 성문에게까지 노크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프로그레시브 록은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을 연결하는 매개체 역할을 해왔고, 나아가 전통성에 기반을 둔 새로운 문화를 창출한 것이다.

 

우선, 프로그레시브 록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장르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테크노 프로그레시브 록


먼저, 무그(Moog)나 신시사이저(Synthesizer) 등의 전자악기로 구성된 ‘테크노 프로그레시브 록(Techno Progressive Rock)’을 들 수 있다. 여기에 속하는 아티스트들을 살펴보면, Kraftwerk, EL&P, Jean-Michel Jarre, Tangerine dream, Vangellis, Alan parson project 등이 여기에 속한다.

 

 

클래식 프로그레시브 록


둘째 분야로는 ‘클래식 프로그레시브 록(Classical Progressive Rock)’을 들 수 있다. 이 분야의 대가로써 EL&P(Emerson, Lake & Parlmer)를 먼저 꼽는다. 특히 이 그룹은 클래식의 고전인 무고르그스키의 을 그들 나름대로 편곡해, 록계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사운드를 창출했다. 다음으로 Moody Blues는 유명한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신세계 교향곡>을 라는 작품으로 훌륭하게 편곡했다. 이 작품에서는 런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더욱 클래시컬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이 밖에도 ELO(Electric Light Orchestra), Kansas, Renaissance, Jethro Ttull, New Trolls 등이 속한다.

 

 

로지컬 프로그레시브 록


셋째 분야로는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논리적 구성을 생명으로 하는 ‘로지컬 프로그레시브 록(Logical Progressive Rock)’을 들 수 있다. 이 분야에는 Yes, Pink Floyd, King Crimson, Roxy Music 등이 속한다. Pink Floyd는 작품의 소재로 기계 소리, 발걸음 소리, 동물 소리 등 내용상으로 우수적인 소재까지 표현하려고 애썼고, 특히 이번에 소개하려는 8집 앨범 에서는 드라마틱하고 추상화된 세계를 마음껏 표현했다. 또, 11집 에서는 교육의 어두운 면을 재조명하는 한편, 반사회적인 이슈도 소재로 택해 프로그레시브 록의 또 다른 면을 개척했다. 또한, King Crimson이라는 그룹은 더욱더 실험성을 보여서 에서는 삶과 죽음 등과 같은 어두운 소재를 바탕으로 웅대한 하나의 서사시를 표현했다.

 

▲ dark side of the moon출처 : zonadicto.org


앞서 언급한 은 Pink Floyd에 의해 1973년에 발표된 앨범으로, 그들을 프로그레시브 록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해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70년대 초반에 불어닥친 프로그레시브 사운드(Progressive Sound) 열풍의 성숙기를 상징하기도 하는 앨범이자,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700주(15년 이상) 넘게 링크되어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앨범이기도 하다. 영국 에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이 앨범의 전체적인 사운드 담당은 그 후 Alan parson’s project를 결성하여 유명해진 Alan parson이 담당하여 진보적인 사운드를 만들어 냈다.

 

그들이 절대적 지지를 받은 이유는, 시대를 앞서가는 진보적 사운드를 창출했을 뿐만 아니라 이 앨범에서는 사운드 못지 않게 가사 또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진보적이고 개혁적이었기 때문이다. ‘Time’에서 잘 드러나듯 그들은 그동안 누구도 다루지 않았던 현대 사회의 소외와 스트레스, 조울증, 편집증 등을 주제로 다루었으며, ‘Money’에서는 현금 출납 등록기의 소리를 곡의 초반부에 사용하여 물질 만능주의에 대해 나름대로 날카로운 지적을 한다.

 

제목 처럼 그들은 이 앨범에서 현대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지적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으며, 신경질적이고 병적인 현대인들의 심리를 비판하고, 이러한 것들의 원인 제공은 자본주의 사회라고 비판한다. 또한, 70년대의 어둡고 그늘진 사회에 대한 한편의 슬픈 서사시와 같은 내용을 이 앨범은 가만히 담는다.

 

결론을 말하면, 그들의 사운드와 메시지는 그때까지 보기 힘들었던 ‘수준 높은 메시지’와 ‘전위적인 사운드’를 훌륭히 결합해 록 음악이 한 단계 성숙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겠다.

 

 

 

Pink Floyd ‘Money’ 듣기


 

 

 

Pink Floyd ‘Time’ 듣기


 

 

 


Dark Side Of The Moon

아티스트
Pink Floyd
타이틀곡
-
발매
1973
앨범듣기


 


Comments : 댓글을 달아주세요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김승모 2014.07.23 15:56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한 때 빌보드 앨범챠트에 가장 오래 머무른 앨범이기도 했지요...

    • 미스터 반 2014.07.28 13:20 신고 Address Modify/Delete

      빌보드 앨범 차트에 741주 동안 올랐다고 합니다!! 또 재미있는 것은, 호주에서 [핑크 플로이드 더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 (2012)]이라는 와인도 나왔다고 하네요. ^^

‘의리’는 왠지 사나이, 동양인, 무공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나 통할 것 같은 단어다. 서구 유럽에서 의리를 찾아본다면 역시 ‘기사도’ 같은 케케묵은 개념들만이 떠오를까. 근현대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꼽히는 카를 마르크스와 그의 동반자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교우는 의리의 새로운 표본으로 읽힐 것 같다.

 

요즘 의리의 상징으로 모 남자탤런트가 떠오르듯이, 역사에서도 ‘의리’ 하면 ‘이 사람!’하고 떠오르는 인물이 있을까. 단연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년~1895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역사에서 의리란 대개 주군과 신하 간에 지켜져 왔다. 권력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사람이 지키는 경우보다 아랫사람이 바치는 조건 없는 충성이 절대적으로 많았다.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님에도, 평등한 관계임에도 의리를 지켰던 사람은 상대적으로 찾기가 힘들다. 여기 카를 마르크스의 친구이며 그 자신이 위대한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소개한다.

 

▲ <사진1> 좌: 엥겔스 / 우: 마르크스출처: www.fridge.gr


엥겔스는 독자적으로 소개되는 법이 거의 없고, 카를 마르크스의 친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더불어 보통사람의 입에 담기 어려운 이름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두 사람의 공동 저작인 「공산당 선언」이 대학 교양수업 교재로도 쓰이는 세상이지만 ‘민주’보다는 ‘반공’이 중요했던 시기에는 엥겔스와 마르크스를 입에 올리는 일이 금기시되었다. 우리나라의 분위기와는 별개로 마르크스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사상가이자 역사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일례로, 지난해 11월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학자들의 영향력을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그 1위를 역사학 분야에서 카를 마르크스가 차지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공동 연구자이자 동료 활동가였으며 마르크스의 사상을 정리하고 전파한 인물이다. 정치적 편향을 제거하고, 그의 생애를 따라가 보려 한다.



방직회사 경영주의 아들


엥겔스는 1820년 독일 라인 주에서 태어났다. 알려졌다시피 그의 아버지는 방직회사 ‘에르멘&엥겔스’를 경영하는 자본가였다. 아들이 대를 이어 경영에 뛰어들기를 원했기에, 엥겔스는 아버지 뜻에 따라 브레멘 상사라는 회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경영기술보다 노동자들이 고통받는 현실을 먼저 발견했다. 17세에 시집을 낼 정도로 글재주가 좋았기에 엥겔스의 손을 거쳐 당시 독일 사회를 고발하는 칼럼들이 쏟아져 나왔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엥겔스는 유명한 저널리스트로 인기를 끌었다.

스무 살이 넘은 1841년, 엥겔스는 베를린에서 포병연대에 지원했고, 군 복무를 하면서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청강했다. 200여 년 전 독일에서는 학자와 자본가의 길이 다르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엥겔스는 대학준비과정, 우리 식으로 하면 고등학교쯤에 해당하는 김나지움(Gymnasium)을 중퇴하고 회사에 다닌 터였다. 군 복무를 다 마치고 나서 엥겔스가 간 곳은 산업화가 한창 진행 중이던 영국 맨체스터였다. 맨체스터에는 에르멘&엥겔스의 영국 지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영기술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이때의 경험과 연구로 나온 것이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1845)라는 역작이다.
 

 

 

카를 마르크스와의 역사적 만남

 

▲ <사진2> 칼 마르크스

ⓒ WikiMedia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첫 만남은 1844년 이루어졌다. 엥겔스가 독일로 돌아가던 길에 파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오늘날에는 이 두 사람의 사상이 ‘마르크스주의’, 잘해봤자 ‘마르크스-엥겔스주의’로 불리지만 첫 만남에서 좀 더 명망 있던 사람은 엥겔스였다. 마르크스는 대학에서 철학과 역사학을 전공한 신출내기 학자라 할 수 있었고, 엥겔스는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저널리스트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공동저술은 기여도와 관계없이 엥겔스의 이름이 먼저 표기되기도 했다. 세간의 평가를 뒤로하고 엥겔스는 마르크스 앞에서 자신을 낮췄다. 마르크스는 악필로도 유명한데, 그의 글씨를 알아보는 사람은 엥겔스가 유일했기에 다시 베껴 쓰는 조수 역할까지 해야 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엥겔스야말로 진정한 ‘대인’이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다. 그들은 책만 쓴 것이 아니라 행동에 나섰다. 그들이 살았던 시기 유럽은 ‘1848년 혁명’을 겪고 있었다.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폴란드, 헝가리 등지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자신들과 비슷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조직하고, 유럽 여러 나라의 혁명에 관여했다. 특히 군 복무를 했던 엥겔스는 독일 남부 지역에서 무장투쟁을 하기도 했다. 무장투쟁이 실패한 이후에는 마르크스와 함께 영국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다.

 

 

동지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

 

▲ <사진3>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

 ⓒ Bente Jensen


1850년 무렵 마르크스는 필생의 저작인 「자본 : 정치경제학 비판」, 다시 말해 「자본론」 집필에 들어간다. 동시에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방대한 학문적 작업을 마무리하도록 돕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선택했다. 망명 초기, 영어에 서툴렀던 마르크스의 글은 엥겔스의 번역이 있어야 했다. 학문적, 심리적 지원만이 아니었다. 재정적 어려움으로 맨체스터에 있는 방직공장으로 돌아간 엥겔스는 1869년 자신이 은퇴할 때까지, 그리고 1883년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마르크스를 물질적으로 지원했다. 이후로는 친구의 자녀들을 돌봤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혁명적이었지만, 그 생활관념은 동시대인과 비슷했다. 마르크스는 아내 예니가 귀족 집안 출신인 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젊은 시절에는 부모 속을 썩이는 흔한 아들이었다. 또한, 자신의 자녀들이 교양 있는 상류 계층의 교육을 받기를 바랐다. 맨체스터의 엥겔스와 런던의 마르크스가 주고받은 편지글에서는 돈을 부쳐달라고 애원하며 가난과 질병을 호소하는 마르크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행히 에르멘&엥겔스의 사업이 잘되었기 망정이지, 마르크스 가족의 생활비는 경영을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마르크스 가족이 엥겔스에게 끼친 경제적 부담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위험한 것으로 본 사람들에 의해 여전히 공격을 받는 부분이다. 그러나 엥겔스는 자신의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늘 후했다. 그것은 동정이 아니라 동지애였고, 엥겔스의 손길은 이민자와 사회주의자 등 당시 어려운 삶을 살던 사람들에게도 미쳤다.

 

 

세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 <사진4> 프리드리히 엥겔스

 ⓒ WikiMedia


엥겔스가 다시 활발한 정치 활동을 재개한 것은 은퇴 후였다.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유고를 정리해 출판하는 것이 엥겔스의 몫으로 남았다. 여러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은 엥겔스의 해석과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최초의 마르크스주의는 그의 친구 엥겔스가 만들고 퍼뜨린 사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엥겔스는 후두암에 걸렸고, 1895년 8월 5일에 영영 눈을 감는다. 자녀가 없던 그가 남긴 유언대로 유골은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다.

 

너무 낡은 것처럼 들리는 단어, 오늘날에는 조직폭력배들이나 쓸 것 같은 의리가 2014년에 왜 이토록 유행일까.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는 누군가가 간절한 우리들의 외로움과 불안감 때문일까.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의리가 아니라 부당한 이익을 챙기는 협잡만이 판을 치는 사회상 때문일까. 목숨을 바친 사상과 평생을 지킨 의리가 아득한 전설처럼 느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글쓴이 김희연은 _ 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사회, 문화, 경제 분야에 두루 걸쳐 갖가지 종류의 글을 쓴다. 글쓰기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어서 늘 고마운 마음을 품은 한편으로, 쓸데없는 글로 인해 웹이나 인쇄매체에 들어가는 종이와 바이트, 그리고 독자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Comments : 댓글을 달아주세요

댓글을 달아 주세요

어느 교과서나 위인전에도 빠지지 않는 인물을 한 명 꼽으라면 헬렌 켈러를 들 수 있다. 헬렌 켈러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시각과 청각장애를 극복한 여성이라는 점과 설리번 선생에게 말을 배운 일화들이 희미하게 기억날 것이다. 여기서는 좋은 동반자들과 인생을 보냈던 사람이자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활동가로서 헬렌 켈러의 또 다른 모습을 소개한다.


ⓒ Litchfield Literary Books' Blog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년~1968년)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삼중고에 시달렸던 장애인 여성이다. 우리가 아는 헬렌 켈러의 이야기는 설리번 선생을 만나 글을 배우는 데서 시작해 래드클리프 대학을 입학하는 데서 끝난다. 래드클리프 대학은 하버드 대학이 남학생만 받던 시절에 보완적 역할을 했던 여학교였기에, 어떤 어린이용 위인전에서는 아예 하버드대학교라 표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대부분 위인은 성인기의 업적에 따라 위인으로 불린다. 어린 시절에 천재였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위인으로 칭송받는 사람은 없다. 헬렌 켈러는 ‘미수(米壽)’라고 하는 88세까지 살다 갔다. 60년이 넘는 그녀의 진짜 인생은 어디로 갔을까. 비장애인의 일방적인 시선이나 학벌 중심 사회의 편견도 버려두고, 우리가 몰랐던 헬렌 켈러의 인생을 따라가 보도록 하자.



인형을 손바닥으로 느끼다


ⓒ New England Historic Genealogical Society


헬렌 켈러는 1880년 미국 앨라배마 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서 H. 켈러(Arthur H. Keller), 어머니는 케이트 애덤스 켈러(Kate Adams Keller)였다. 켈러 부부가 아이를 낳았을 때, 헬렌은 평범한 아기였다. 그러나 생후 19개월째에 성홍열과 뇌막염에 걸려 뇌와 위에 급성 출혈이 일어났다. 잠깐 스쳐 지나간 병이었지만 이때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가지게 된다. 그녀는 다행히 한집에 사는 요리사의 딸 마르타 워싱턴과 어울리며 자랐다. 마르타가 수화를 이해할 수 있었던 덕에 일곱 살 무렵에는 수십 가지의 수화를 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마르타와의 소통이 헬렌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켈러 부부는 딸의 장애를 알고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장애인 교육에 관한 책을 읽고, 전문가들을 만나러 다녔다. 장애는 고칠 수 없지만 그것을 딸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비장애인과 다름없이 교육하기로 결정한다. 수소문 끝에 펄킨스 시각장애학교를 졸업한 앤 설리번(Anne Sullivan, Johanna Mansfield Sullivan Macy, 1866년~1936년)을 가정교사로 받아들인다. 스무 살의 설리번 선생이 일곱 살의 헬렌을 만났고 둘은 50년 가까이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 설리번 선생은 인형을 선물하고 헬렌 손바닥에 인형이라는 뜻의 철자 ‘doll’을 적는 것으로 교육을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는 주변 사물들의 흐릿한 윤곽을 더듬으며 철자를 하나하나 손바닥으로 배웠다.

ⓒ Litchfield Literary Books' Blog


여기까지가 흔히 아는 헬렌 켈러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영화 <미라클 워커(The Miracle Worker)>의 인기가 큰 몫을 했다. 헬렌은 대학 시절인 1903년 「내가 살아온 이야기」라는 자서전을 썼다. 이것을 바탕으로 1959년 연극 <미라클 워커>(1959)가 나왔고, 그녀의 사후에는 이 연극을 각색한 동명의 영화가 1979년 상영된다. 영화는 TV용으로 다시 만들어져 1979년과 2000년에 방영되었다. TV영화는 우리나라 방송에서도 이따금 틀어주곤 한다.


동반자들의 헌신적인 조력


설리번 선생의 끈질긴 노력이 유명해지는 바람에, 마치 헬렌 켈러가 집에서만 교육받은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쉼 없이 정규교육을 받았다. 1888년 만 여덟 살이 되자 설리번이 다녔던 펄킨스 시각장애학교에 등록했고, 6년 후인 1894년에는 라이트 휴머슨 청각장애학교와 호레스 만 청각장애학교가 있는 뉴욕으로 이사했다. 그 후 케임브리지 여학교를 거쳐 래드클리프 대학교에 다닌 것이다. 래드클리프를 졸업할 때 영어, 독일어를 포함해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설리번은 헬렌과 늘 동행했고, 교사로서가 아니라 동료로 남았다. 설리번의 남편 존 메이시까지 세 사람은 시각장애인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죽는 날까지 함께 활동했다.


ⓒ Litchfield Literary Books' Blog


1914년부터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설리번 선생은 1936년에 사망했다. 1914년부터 헬렌의 곁을 지킨 사람은 폴리 톰슨이었다. 처음에 톰슨은 집에서 그녀를 돌보는 역할로 고용되었으나 점차 시청각장애인에 대한 이해를 넓혔고 마침내 헬렌의 비서가 된다. 40년 가까이 그녀의 곁을 지켰고, 설리번 선생 이상으로 헬렌 켈러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1957년 톰슨이 발작으로 몸져눕자 헬렌은 위니 코베리라는 간호사를 고용했다. 톰슨을 돌보기 위한 일이었지만 1960년 톰슨이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도 코베리는 계속 남아 그녀를 돌봤다. 헬렌의 마지막 10여 년은 코베리가 함께한 것이다.



여성, 노동자, 장애인과 함께한 인권운동가


ⓒ Litchfield Literary Books' Blog


헬렌 켈러의 인생 초반 20여 년보다 60여 년의 중후반이 거의 가려져 있던 이유는, 그녀의 직업이 인권운동가였기 때문이다. 회복할 수 없는 장애를 입은 미국 사회의 억압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어떤 이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헬렌은 전 세계를 다니며 민주주의, 여성주의, 사회주의를 설파하고 실천했다. 또한, 열두 권의 책을 쓴 작가이자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훌륭한 연설가이기도 했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3년 후, 미국은 뒤늦은 참전을 선언한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독일에 선전포고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우자 헬렌 켈러는 반발하고 나섰다. “(미국 백인들이) 수많은 흑인을 학살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지배자는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녀야말로 평생을 여성의 선거권과 참정권, 노동 인권, 반전과 평화, 사형제 폐지, 인종차별 철폐,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 Litchfield Literary Books' Blog


헬렌의 사회운동은 전쟁을 옹호하고 차별을 조장하는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다. 이런 사람들은 장애인에 대한 왜곡된 편견을 그대로 드러냈다. 대표적인 비난은 ‘그녀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민주사회의 시민이 자신의 주권을 행사할 때 배후 조종자가 있을 것이라 매도하는 경향은, 1900년대의 미국도 지금의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체적 장애보다 사회의 장애를 극복하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였던 헬렌 켈러. 헬렌은 1968년 정말로 눈을 감는다. 1961년부터 뇌졸중을 앓았던 그녀는 마지막까지 미국 시각장애인재단을 위해 일하고 떠났다. 헬렌 켈러는 인생의 동반자였던 앤 설리번과 폴리 톰슨 옆에 묻혔다. 그리고 눈 없이도 세상을 똑바로 보았고 청력이 사라져도 타인의 신음을 들을 줄 알았던 위대한 정신의 표본으로 우리 곁에 남았다.


ⓒ Litchfield Literary Books' Blog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보거나 만질 수 없다. 그것들은 가슴으로 느껴야만 한다.”
“혼자서는 약간의 일을 할 수 있다. 함께라면 우리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어둠 속에서 친구와 걷는 것이 환할 때 혼자 걷는 것보다 낫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는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할 수 없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글쓴이 김희연은 _ 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사회, 문화, 경제 분야에 두루 걸쳐 갖가지 종류의 글을 쓴다. 글쓰기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어서 늘 고마운 마음을 품은 한편으로, 쓸데없는 글로 인해 웹이나 인쇄매체에 들어가는 종이와 바이트, 그리고 독자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Comments : 댓글을 달아주세요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