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은 추억이다. 추억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왔다가도 아득한 옛일처럼 가물거리기도 한다. 추석이나 설이라도 물 빠지는 나일론 양말이 유일한 선물이었던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어른들 따라 친척 집을 돌면서 차례를 지내고 나면 우리 세상이었다. 끼리끼리 모여 땅따먹기, 강 건너기, 자치기 놀이를 하다가, 해 그름 판이 되면 남녀 구별 없이 뒷동산으로 모여들었다. 마무리는 언제나 골목으로 편을 갈라 산등성이에서 술래잡기를 했다. 이런 자연과 함께하는 놀이를 찾아보기 힘든 손자들을 위하여 고심한 것이 윷놀이다. 역사는 일천하여 겨우 세 번째지만 매회 추억거리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보통 윷놀이에서는 넉동이 먼저 나는 팀이 그 판을 이기지만, 며느리의 친정 가는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하여 두 동으로 하고, 한판이 끝날 때마다 지폐 한 장을 가져가도록 하여 열판을 두었다. 이번에는 변수를 늘리고 박진감을 더하기 위하여, 한 판에 석 동이 먼저 나는 팀이 이기고 지폐 두 장을 가져갈 수 있으며 다섯 판을 하는 것으로 규정을 바꾸었다. 누군가는 재미를 더하기 위하여 여러 변수를 추가한다지만, 우리는 사위가 뒷도 표시를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하루 전에 온 손자와는 예비 윷놀이를 하여 녀석이 두 판을 이겼기에 “내일 얼마나 딸 생각이니?”하고 물었더니 “4만 원 딸 거야.”한다. 욕심을 숨기는 녀석이 신통하기도 하지만, 돈의 개념을 안 손자가 어른이 되어서도 돈으로 인하여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추석 당일, 약속대로 9시 조금 전에 사위가 도착했고, 곧이어 아들 가족이 들이닥쳤다. 현관문이 열리기 무섭게 뛰어와서 안는 바람에 충격을 받아 어질어질하다. 늙은 탓인가! 오늘따라 녀석들의 키가 훌쩍 커 보인다.

푸짐한 식사에다 과일과 커피까지 마시고, 곧바로 윷판을 벌렸다. 가위, 바위, 보로 정한 순서대로 우리 부부가 먼저고 사위와 아들 순서로 우열을 가려 나갔다. 우리 부부는 약속대로 징검돌이 되어주기로 하고, 앞서가는 말을 잡을 기회가 생겨도 두 동산이나 석 동산이를 만드는 것으로 말을 썼다. 예상대로 석 동산이를 만들어 나가다가 중간쯤에서 손자에게 잡히고 말았다. 손자는 양팔을 들어 올리면서 자기 덕에 이겼다고 잽싸게 지폐 두 장을 주머니에 넣었다. 벌써 손녀는 지루한 모양이다. 자기 차례가 되어도 방에서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며 나오지 않아 오빠 애를 태운다.


붙들려 와서도 두 손으로 윷을 쥐고는 오빠 눈치를 살살 보거나 두 눈을 질끈 감고서 시간을 끌다가 던지니 연거푸 윷이다. 한 동 나고 두 동산이 참먹이를 향하는데 손자가 던진 것이 개가 되었다. 손자는 걱정이 되어 “뒷도가 나오면 고모부한테 잡히고 마는데….” 말이 씨가 된다고, 처음으로 나온 뒷도가 손자를 슬프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며느리가 “네가 한 말 때문에 우리가 지고 말았네.”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손자는 삐쳐선 안방 문을 걸어 잠가버렸다.


네 판이 끝나니 아들과 사위 팀이 공평하게 두 판씩 이겼다. 이제는 마지막. 모두가 어머님이 이겨야 한다지만 우리는 디딤돌 역할만 하다가 석 동산이를 만들었으나 윷이 나는 바람에 앞서 나가게 되었다. 여러 번의 웃음과 한숨이 교차하고서야 제일 먼저 참먹이에 도착했다. 다시 내 차례. 당연히 이겼다고 탄성이 나와야 하는데 뒷도로 한숨만 나오는 처지가 되었다. 날걸과 방을 지난 안찌에도 아들이 버티고 있었다. 사위는 우승에서 멀어 있었지만, 아들 편에서 도가 나오면 우린 ‘다 된 밥에 코 빠트리기’ 신세가 된다. 아쉽게도 개가 나왔다. 며느리가 날걸에 있던 말을 참먹이로 옮겨 놓았다. 특별히 배려한 것이라 무슨 말에도 무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아내가 던진 윷은 도가 아니라 개가 되어 천만다행이다. 나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아내는 잽싸게 두 장을 챙겼다. 명절이면 내 지갑은 얄팍해지고 아내는 며느리와 사위가 주는 용돈으로 두둑해지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큼만 되었으면 한다.


글 / 사외독자 이선기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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