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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일상다반사

[에피소드] 오이지

by 앰코인스토리.. 2024. 8. 29.

사진출처 : freepic.com

여름나기에 필요한 음식들은 많이 있다. 초복, 중복, 말복을 책임지는 삼계탕이 있기도 하지만, 땀으로 빠져나간 수분을 보충하며 입맛을 돋우는 장아찌 음식도 한 몫을 크게 한다. 특히, 여름에 담그는 오이지는 여름철을 굳건하게 이겨낼 수 있는 보약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햇살과 이슬의 힘으로 큰다는 오이는 여름철의 대표적인 채소다. 그래서 오이를 오래 먹어 보고자 선조들이 고안해낸 음식이 오이지인 듯싶다. 한참 맛있는 시기에 담가야 두고두고 맛있는 오이지를 먹을 수 있다면서 참 부지런하게 오이를 담그던 어머니의 손길은 아직도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튼실한 다다기 오이로 해야만 물러지지 않는다며 20~30개 오이를 운반할 때도 조심조심을 강조하던 어머니의 말씀에 오이가 잔뜩 담긴 보자기를 몸에 딱 붙이고 한발한발 내딛던 기억은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오이지는 다른 장아찌보다 손이 덜 간다며 물이 가득 담긴 고무대야에 오이를 한꺼번에 쏟는 모습에서도 행복감이 느껴졌었다.

 

작은 독에는 20~30개 분량의 오이가 들어갈 공간이 있었다. 미리 말려 놓은 독에 행여 이물질이라도 들어가지 않았나 세심하게 살피는 눈길은 꽤 매섭게 느껴지곤 했었다. 오이를 하나 차곡차곡 집어넣고 오이 개수에 맞는 소금물을 조심스럽게 부었다.

 

언젠가 오이지에 들어갈 소금물 농도를 잘못 맞춰 오이를 다 버리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만큼 오이지를 하는 데 있어 소금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익혀온 기술과 노하우를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오이지가 맛있는 게 익은 날이면 커다란 접시에 두세 개 분량의 오이지를 한입크기로 썰어 내셨다. 그리고 찬물을 붓고 그 위에 홍고추와 쪽파를 썰어서 얹어 내셨다. 김치와 마른 반찬이 주를 이루던 저녁밥상에 신선함이 마음껏 발산되었다. “오이지만 먹으면 짜!” 꼭 알려줘야 할 주의사항처럼 식구들이 숟가락을 들기 전에 알려주셨다. 숟가락 위를 떠다니는 오이지 하나를 입에 넣으면 그 아삭아삭함과 상큼함이 떨어졌던 입맛을 살리는 데는 제격이었다. 정말 제대로 된 재료와 장인의 솜씨로 우려낸 합작품이라 밥도둑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의 바닥을 보인 오이지 접시를 보면서 과연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양파를 사려고 시장에 들렀다. 그리고 집에서 직접 담갔다는 오이지를 보았다. 어머니가 애써 담갔던 그 옛날 빛깔과 모양이었다. 무더위가 오기 전 참한 오이들만 골라서 담갔으리라. 밥맛이 없었던 요 며칠을 떠올려 보니 오이지 몇 개를 사가고 싶어졌다. 최대한 좋은 놈으로 골라 담아 달라고 하자, 주인은 직접 담근 거라 다 맛있을 거라며 자신을 칭찬하는 건지 오이지를 칭찬하는 건지 모를 말들을 연신 쏟아내었다.

 

‘아! 잘 익은 냄새!’ 오이 특유의 상큼함은 사라졌지만 소금물에서 잘 숙성된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칼로 하나하나 썰 때마다 만들어지는 모양들이 주인의 마음씨를 그대로 닮은 듯했다. 소금을 머금은 오이지는 다소 짠맛이 강했지만 씹을수록 달달함이 우러나오는 듯했다. 10분 물에 희석된 오이지는 처음 맛볼 때와는 다르게도 짠맛을 크게 느낄 수 없었다.

간단한 수고만으로 한끼 식사를 위한 훌륭한 반찬으로 만들어지는 오이지의 능력에 새삼 감탄한다. 한동안 오이지 사랑은 계속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