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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일상다반사

[글레노리 노란 우체통] 빨간 발톱

by 에디터's 2022. 3. 16.

 

사진출처 : 크라우드픽

적막 가운데 딸이 서울로 돌아가기로 한 날짜가 며칠 남지 않았다. 노트북에 박혀 살던 아이는 페이스북에서 오래된 친구를 찾았다며 워이워이 너머 에타롱비치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저녁을 먹을 것이라며 날렵하게 차 키를 챙겼다.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밥도 따로 먹기 시작한 지 여러 날째였다. 딸과 나의 냉전 때문에 남편이 죽을 맛이었다. 양쪽에서 날아오는 돌을 맞아가면서도 중재를 하기에 분주하더니 지쳤는지 다 조용해졌다. 돌아가기로 한 날짜만 은근히 기다리는 망쳐버린 분위기, 갈 날짜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면 좋으련만 며칠째 티격태격하느라 애써 피하는 중이었다. 인사를 하고 나가는데도 머쓱해서 모른 척했다.
떠난 지 10분쯤 지났을까, 잠깐 멈춘 비가 또 퍼 붓기 시작했다. 에타롱비치를 구글로 찾아보니 산속의 외진 길에다가, 시속 100킬로의 프리웨이를 한참이나 달려야 하는 길이었다. 빗줄기가 굵어질수록 한숨이 깊어졌다. 급기야 심장이 대책 없이 뛰기 시작하고.

 

딸을 3년 만에 만나고도 이 지경이 된 건 내 탓일지 모른다. 후드 티와 헐렁한 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엄마아, 엄마아!”라고 구르듯 달려와 안겼던 순간, 미농지처럼 둘 사이에 끼어 있던 걱정 한 겹이 뜨거운 프라이팬 뒤집어지듯 확 달아올랐다. 손님도 아닌데 바바리에 스카프까지 요란하게 챙겨 입고 공항에 나간 내가 오히려 민망했다.
목마른 먼 거리에 있다가 애틋하고 촉촉한 눈빛을 나누는 벅찬 실감에 뒷좌석에서 시종일관 떠드는 딸을 몇 번이나 뒤돌아봤다. 가끔 손을 뻗쳐 잡아보기도 했다. 멀고 씁쓸했던 지난 불안은 아예 사라진 걸까. 차 속은 마냥 달달하기만 했다.
딸이 집을 두고 서울에 살겠다고 작정한 지 13년이 훌쩍 넘었다.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3년 전. 그때도 서로에 대한 애증이 터지고 넘쳐 쌀쌀한 얼굴을 풀지 못하고 시드니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질긴 올가미를 뜯고 나오는 데는 서로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럭저럭 이삼일이 지났는데 괜찮을 줄 알았던 묵은 짜증이 슬슬 드러나기 시작했다. 말끝마다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으며 한 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말투, 일그러지고 흐트러진 서로의 모습이 거울에 자주 비쳤다. 오래전부터 우리 모녀는 유난히 자주 부딪쳤다. 결이 비슷한 데다 말로 지기 싫어하는 성향이 다분히 닮았기 때문이다.

 

딸이 하이스쿨 들어가던 열세 살 무렵부터 남편과 나는 칠팔 년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새로운 일을 막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탓인지 허기진 아이의 섬세한 감정을 잘 감싸줄 수 없었던 것 같다. 조용한 오빠와 비교되어 야단이란 야단은 혼자 다 뒤집어쓴 것도 같다. 잘 생각해보니 딸은 사춘기를 아궁이에 불쏘시개처럼 몹시 거칠고 뜨겁게 보낸 것만은 틀림없었다. 학교 하나 다니는 게 그렇게 힘드냐고 애만 다그쳤기 때문이다.
방과 후 외출을 막으려고 교문 앞에서 기다렸다. 방만한 기질에 대한 걱정이 지나쳐 집에서 한 시간가량 걸리는 학교를 꼭 데리러 갔었다. 또 생각해보니 이왕 예고에 갔으니 방목해서 키웠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는 백마 기질의 아이였었다. 매사에 서툴고 두려운 이민 생활 속에서 아이라도 잘 키워야겠다 싶어 이렇게라도 가둬두고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반항하는 아이에게 회초리를 들었고 용돈까지 끊으며 모질게 다뤘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고 몹시 무지한 일이나 그때는 나조차 그게 최선인 줄 알았다. 딸 맘에는 그때 일이 지금까지 쓰리고 뜨거운 돌로 남아 우린 만나기만 하면 누구 잘못이냐고 상대방을 헉헉대게 만들었다. 묘수를 못 찾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했다.
‘전화가 오겠지. 별일 없이 꼭 와야 하는데….’
더디 가는 시간 속에 도착시간 30여 분을 넘기고야 벨이 울렸다. 거의 울 듯한 목소리로 “나 혼자 오는데 너무 무서웠어. 혼자서는 집에 못 돌아갈 거 같아. 엄마가 여기로 와주면 안 될까?” 남편과 나는 아이가 갔던 길을 그대로 밟고 갔다. 단 몇 마디에 기다렸다는 듯이 총알같이 뛰어나가는 나를 보고 남편이 슬쩍 웃는 것도 같았다. 갈스톤 숲길을 통과해서 프리웨이를 지나 워이워이 외진 길로 접어드는데, 우리의 거칠었던 시간만큼 길은 어둡고 구불구불하며 위험천만했다. 구멍 난 하늘은 쉬지 않고 땅바닥을 때렸다.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 거리는 어스름한 물빛에 잠겨 있었다. 영화 세트장 같은 시골 빌리지에 빨간 신호등 불빛만 깜박인 채, 사람은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만나기로 한 철망 담장 너머의 낯선 주차장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차머리를 진입로로 들이밀며 어딘가에 서 있을 고아 같은 딸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어느 구석에도 가엾어야 할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불이 켜진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데도 실내는 환했다.
뒤통수가 보였다. 높은 등의자에 돌아 앉아 있는 두 명 중에 하나가 딸이었다. 불빛 속에 비친 아이는 영락없이 한 마리 흰 토끼였다. 상대방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맞장구치며 킥킥거리며 신나게 웃고 있는 모습 속에는 울면서 도와달라던 두 시간 전 딸의 모습은 없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늘 이런 식으로 아이의 존재를 확인해왔던 것 같다. 딸은 도움을 제대로 요청할 줄도 알고 제 시간을 알차게 보낼 줄도 아는 멀티 플레이어. 거기에 비해 나는 일에 빠지면 혼자서 해결하느라 돌아앉아 있었고 플러그조차 빼놓은 무중력일 때가 잦았던 것 같다. 그동안 내가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딸과 내가 유리창 이쪽과 저쪽에서 슬로 모션으로 겹쳤다 멀어지다 다시 겹쳤다.
우두망찰 한참을 더 서 있다가 두꺼운 유리문을 조용히 노크했다. 아이는 잠깐만 더 기다려 달라고 재빨리 손바닥을 보였다. 남편 차를 앞세워서 오던 길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앞 차의 불빛을 쫓아 따라가는 길은 한결 편안했다. 딸이 나에게 바란 것도 어쩌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아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제 말 하기에 바빴다. 우리는 서로 큭큭 웃기도 했다.
딸은 돌아갈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저녁 비행기였다. 아이의 빨간 엄지발톱 같았던 격랑의 3주간. 칼로 물 베기라더니 멍들어 뭉쳐있는 물도 잘 베이긴 마찬가지인가. 떠나기 몇 시간을 앞두고 내 엄지발톱에 빨간색 매니큐어를 바르자고 했다. 뒤로 빼는 발을 붙잡고 몇 겹을 더 발랐다. 발톱이 다 깎여 나갈 때까지 절대로 지우지 말라며 다짐을 시킨다. 딸도 나도 웃고 말았다. 토라져 있던 내내, 공항에서 만났던 그 벅참을 그리워하고 있었을 것이라 믿고 싶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댄스 댄스를 출 것 같은 안도감이 들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아주 밝은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엄마아, 엄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