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부탁을 하면 거절을 못 해서 언젠가는 이 성격부터 고쳐야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짐과 결심은 채 하루를 가지 못했다.
며칠 전이었다. 친구가 어려운 부탁이라며 운을 띄었다. 이렇게 시작하면 불안하다.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나?’ 머릿속은 순간 복잡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꼭 확고한 나의 의지를 보여줘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숨을 깊게 들여 마셨다. 그리고는 친구의 얘기를 듣게 되었다. 책 몇 권을 선물 받았는데 혼자 가져오기 힘들어서 함께 가달라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양이기에 함께 가야 하는지를 물어보았다. 여러 권은 아니지만 무게가 제법 나가는 책이라 혼자의 힘으로는 어려울 것 같다는 설명이었다. 친구의 말속에서 ‘무게’나 ‘두꺼움’이라는 단어가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쉽지 않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친구의 딱한 사정은 알겠지만 동참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여러 번 거절을 했다.
그러나 친구의 집요함은 두텁게 쌓아 놓은 철옹성마저 무너뜨릴 기세였다. “안 되는데….”라는 말 이외는 좋은 거절의 해답지를 찾아내지 못하자 친구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부탁을 했다. 결국, 친구는 진심 어린 불쌍한 표정까지 동원하는 탓에 허락하고 말았다. 곧바로 친구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철을 타고 화랑대까지 가는 강행군을 이어갔다. 참 멀었다. 화랑대역을 빠져나오자 친구와 미리 연락했던 이가 나와 있었다. 친구 뒤를 따라 오 분 정도 걸어가자 지하 창고가 나왔다.
책이 가득했다. 친구 아는 지인은 몇 권의 책을 묶은 꾸러미를 꺼냈다. 딱 봐도 무게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책 한 권의 두께가 손가락 서너 마디에 이를 정도였다. 옛날 책장에 꽂혀 있던 백과사전이 떠올랐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포털사이트를 찾듯 책꽂이 한 칸을 통째로 차지했던 백과사전은 그 당시 그런 역할을 했었다. 백과사전 한 권의 무게는 꽤 나갔었다. 그리고 참 많은 글씨가 한 페이지를 빼곡하게 채웠었다. 그 백과사전 두세 개를 합쳐 놓은 듯한 두께가 순간 머리를 아찔하게 했다. “많이 보지 않아서 책 안은 깨끗할 거예요.”라는 말속에서 그분도 그 책에 손대기가 겁이 났으리라.
‘이 친구는 왜 이런 책에 매력을 느꼈을까?’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꺼낸 꾸러미는 네 개였다. 그 친구와 나는 두 개씩 나눠 들었다. 두 개를 들고 보니 ‘아, 잘못 왔구나!’ 하는 후회가 마구 밀려왔다. 친구의 지인이 세 개의 꾸러미는 핸드카로 전철역까지 옮겨 준다는 말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화랑대역으로 들어서는 순간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부어야 했다. 전철 안전문까지 낑낑거리며 때로는 씩씩거리며 나아갔다. 친구는 많이 미안했는지 가는 동안 나의 눈치를 살피며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그럴 때마다 그 친구의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집까지 저 무거운 짐을 어찌 옮기나 하는 걱정만 하고 있었다. 오만가지 생각들이 다 스치고 지나갔고, 빨리 이 고난의 행군이 끝이 났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다행히 전철 안은 사람들로 붐비지 않았고 한 번의 환승이 있었지만 빈자리를 발견하고 앉아서 갈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이 이런 경우에 쓰는구나 싶었다. 도착역 개찰구까지 빠져나오자 참 희한하게도 희망이 생겼다. 출발할 때는 ‘과연 이 무거운 책 꾸러미를 어찌 가져가나!’였다면 도착하고 나서는 ‘다 왔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자 없던 힘들이 샘솟았다. 친구는 많이 미안했는지 서둘러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서 건네 주었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을 연신 해댔다. 비록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베풂은 아니었지만, 마무리를 잘하고 보니 갔다 오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친구를 하나 얻은 느낌도 함께 들었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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