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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일상다반사

[에피소드] 고구마

 

이맘때쯤이면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게 있다. 빨간색의 옷을 입고 울퉁불퉁 제멋대로 생겼지만, 맛 하나만은 끝내줬던 고구마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9월 즈음이 한참 출하 시기인지라 전통시장을 지날 때면 쉽게 볼 수 있는 게 고구마이기도 하다. 크고 작고를 떠나 그 빛깔에 현혹되기 일쑤다. 꼭 한 바구니는 사서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은 묘한 충동을 받는다. 예전에는 밤고구마와 물고구마로 나누기도 했었지만 요즈음 호박고구마가 등장하면서 뒷순위로 밀리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호박고구마가 몸값도 비싸다. 좋은 종자와 좋은 토양만 있으면 손댈 것 없이 잘 자라주던 참 효자 중의 효자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무언가를 심어보겠다고 발 벗고 나섰던 일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고구마였다. 어떻게 심는지 몰라서 부모님께서 하던 것을 그대로 흉내 내어 땅을 파고 고구마 모종을 심어서 호미로 흙을 살살 덮으며 꼭 죽지 말고 잘 자라기를 기원했었다. 시들시들했던 고구마 모종은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를 한번 맞고 나면 고개를 빳빳하게 들며 생기를 되찾곤 했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자신들의 영역을 사방팔방으로 넓혀 나갔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담쟁이가 하나둘 하나둘 벽을 타고 오르듯 고구마 넝쿨 역시 힘차게 날마다 전진해 나갔다. 넉 달에서 다섯 달 동안 비바람을 이겨내고 뜨거운 태양과 한여름의 밤을 무사히 이겨내고 나면 결실의 계절인 가을에는 어김없이 튼실한 열매를 내어주었다.

 

아침부터 우리 가족 모두는 설레는 마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과연 어떤 고구마들을 어느 정도 캐낼 수 있을까. 기대 반 호기심 반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단히 무장하고 고구마밭을 향해 나아갔다. 이리저리 엉켜 있는 고구마 줄기를 걷어내자 땅속에 숨어 있던 고구마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좋은 토양의 좋은 영양분을 마음껏 먹고 자랐는지, 생각보다 선명한 색깔의 고구마들이 꽤 많이 따라 올라왔다. 부모님의 입가로 번지는 미소만으로도 그해 고구마 농사의 성과를 가늠할 수 있었다. 고구마 줄기를 모두 걷어내고 나자, 무려 넉 달 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흙이 비로소 얼굴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흙 속을 파헤치며 숨어있는 고구마를 하나하나 찾아내어 갔다. 생각지 못한 크기의 고구마를 보자마자 우리 가족 모두 감탄사를 냈고, 호미질에 생채기 난 고구마에는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가져온 바구니마다 고구마로 가득가득 채워졌다. 열심히 일한 농부에게는 새참이 제공되듯 두세 시간 동안 열심히 고구마로 씨름한 우리에게는 고구마가 특별식이었다. 갓 캐낸 고구마의 껍질을 벗겨서 엄마는 우리에게 하나씩 나눠주셨다. 그전에도 생고구마를 먹어 본 적은 있어서 맛과 식감을 알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갓 지어낸 고슬고슬한 밥이 먹음직스러워 보이듯 바로 캔 고구마는 꿀을 발라 놓은 듯 참 달고 맛있었다. 날것이었기에 딱딱한 식감은 어쩔 수 없었지만, 생각보다 그 강도가 단단하지는 않았다. 씹을 때마다 울리는 아삭거림도 턱관절에 덜 무리가 가는 듯했다.
그날 저녁, 찐 고구마 파티가 열렸다. 한 솥 가득 고구마가 익어갈 무렵, 부엌 안은 고구마 향으로 진동했다. 껍질을 벗기자마자 노란빛 속살이 드러났고, 그 뜨거운 고구마를 이 손 저 손 옮겨가면서 한입 베어 물 때면 그냥 황홀했다. 엄마는 맛있게 먹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며 잘 익은 배추김치를 꺼내어 시범을 보여주셨다. 뜨거운 고구마와 시원한 배추김치와 궁합은 참 환상이었다. 고구마만으로는 목이 메어 수시로 물을 먹어 줘야 했지만, 김치와 함께 먹으니 그런 수고를 조금 덜 수 있었다. 몇 개나 먹었을까. 배가 부를 때까지 먹고 또 먹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작은 텃밭에 고구마 모종 몇 개라도 심어볼 계획이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고구마 재배에 대한 기쁨을 다시 한번 맛보리라. 그리고 튼실한 고구마를 캘 수 있는 이맘때가 돌아오면 가까운 지인들을 함께 불러보려 한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