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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일상다반사

[에피소드] 경운기

by 앰코인스토리 - 2020. 2. 25.


“딸딸~딸딸딸!” 심한 굉음을 울리며 6차선 도로 한복판에 경운기가 등장했다. 정말 상상도 못 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논바닥을 제집 지나들 듯 누비고 넓은 밭을 쉼 없이 갈았던 일명 ‘딸따리’ 정식 명칭 경운기가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빌딩 사이를 비집고 나타난 것이었다. 뭐 하는 경운기일까? 순간 호기심이 발동했다. 짐칸에 폐지를 잔뜩 싣고 있는 것을 봐서는 주위의 고물상에서 부리는 경운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횡단보도의 파란불이 사라지자 경운기는 다시 크게 굉음을 내면서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갔다. 보통 자동차에 비하면 속도 차이가 날 수는 있을지라도 농촌에서는 만능 살림꾼으로 커다란 자동차가 부럽지 않은 때도 있었다.
문득 경운기가 우리 집에 처음 오던 때가 생각난다. 따스한 봄볕이 내리쬐던 날이었다. 친구네 집으로 놀러 가면 보게 되었던 그 경운기가 우리 집에도 생겼다. 주황색의 빛깔을 띠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떤 게 시동이 되는지 판매업자의 시범이 있었다. 산과 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굉음에 순간 귀를 두 손으로 꽉 막았다.
초록빛의 생명들이 자고 나면 쑥쑥 자랄 때쯤, 우리 목장의 소들도 참 많은 것을 먹어 치웠다. 그러면 그런 소들에게 줄 풀이며 옥수수, 그리고 밀기울을 수시로 가져다줘야 했다. 그때 든든한 동반자는 바로 경운기였다. 경운기 시동을 하기 위해선 동그란 도르래 모양의 시동 장치를 힘껏 돌려야 했다.
한두 번 해서는 시동이 살아나지 않았다. 10여 회 있는 힘껏 돌리고 나서야 비로소 까만 연기를 내뿜으며 경운기는 살아나곤 했다. 그리고는 나와 동생들은 짐칸에 서둘러 올라타고 10여 분 거리의 밭으로 이동했다. 길이라고 나 있긴 했지만 돌부리가 이리저리 삐져나와 있고, 이곳저곳이 바퀴 자국으로 평탄하지 않았다. 딱딱한 경운기 바닥은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 갈 수밖에 없었다.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온몸이 매를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아버지가 쓱쓱 풀을 베어 놓으면 우리는 한 짐씩 안아서 경운기 짐칸에 실었다. 풀에 베지 않도록 긴 팔에 목까지 수건으로 동여매지만 풀을 다 실을 때쯤 되면 몸 여기저기가 쓰라리고 가려웠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다시 경운기는 큰 굉음을 울리며 집으로 향했다. 갈 때와는 다르게 짐칸에 가득 찬 풀들은 좋은 쿠션이 되어주었다. 집에 도착 후 배고파 소리 지르는 소들에게 풀들을 가져가면 왜 이리 늦게 왔느냐며 투정하듯 나르는 풀을 한 입 빼앗아 사방으로 흩뿌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고 곧 싱싱한 풀들을 참 맛나게 먹었다. 경운기 짐칸에 가득 찼던 그 많은 풀들은 한 끼 식사량밖에 되지 않았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여기저기 볏짚들이 생겨났다. 일과를 일찍 마친 아버지는 좋은 볏짚을 찾으러 이 논 저 논을 둘러보는 것이 일이 되었다. 눈이 오는 겨울이 되면 소들에게 사료와 함께 먹일 식량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볏짚이 나타나면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경운기를 끌고 가셨다. 한번은 따라나섰다가 한 시간 동안 경운기를 타고 아스팔트 위를 달린 적도 있었다. 과연 경운기에 얼마만큼의 볏짚을 실을 수 있을까 참 궁금했다. 먼 길을 간만큼 최대한 많은 양을 실어와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한층 한층 쌓아 올려지는 볏짚들을 보면서 다보탑을 쌓고 석가탑을 쌓았던 선조들의 지혜를 그때서야 알 수 있었다.
산처럼 높이 쌓아 올린 경운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이로웠다. 과연 경운기가 없었다면 어떻게 했었을까 하는 탄성이 나올 지경이었으니. 혹시나 돌발상황이라도 있을까 싶어 아버지의 경운기를 친구분의 경운기가 뒤따랐다. 집까지 무사히 도착하고 나서야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밭이면 밭 논이면 논을 일사천리로 움직이면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경운기의 추억을 오랜만에 곱씹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