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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일상다반사

[에피소드] 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소쿠리 하나 들고 동생들과 함께 밤동산으로 향하곤 했다. 뜨거웠던 한여름을 이겨낸 뒤라 밤나무 주변에는 튼실한 밤송이들이 많이 떨어졌다. 간신히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밤송이가 ‘뚝’하고 떨어질까 봐 엄마는 우리 삼 형제에게 모자를 씌우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파란 가을 하늘을 벗 삼아 산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잘 여문 밤들이 많아서 그런지 쩍쩍 벌어진 밤송이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산에 오르기 전에는 가시 많은 밤송이를 어떻게 까야 할지 가시에 찔러서 상처가 나는 건 아닐지 참 걱정도 많았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과 동네 어르신들에게 들었던 조언을 발판삼아 조심조심 밤송이를 다루었다. 처음이라 서툴러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밤송이에서 커다란 밤들을 하나하나 얻어가는 재미에 신이 나 있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밤을 몇 개 손에 쥐고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밤송이에서 금방 꺼낸 녀석들이라 겉껍질이 그렇게 딱딱하지는 않았다. 하얀 속껍질까지 벗겨내자 노란 알맹이가 그대로 드러났고 정말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동생들의 입에 하나씩 넣어주자 모두 좋아했다. 오도독오도독 씹히는 맛이 참 좋았다. 너무 딱딱하지도 않고 너무 무르지 않는 씹어서 먹기 딱 좋은 상태였다.

 

엄마는 일주일에 한 번은 장을 보러 가셨다. 가을이 되면 밤 사 오는 것을 빼먹지 않으셨다. 식구가 많다 보니 꽤 많은 양을 사 오곤 하셨다. 커다란 냄비에 한가득 밤을 넣고 찌기 시작하면 그때마다 엄마는 일곱에서 여덟 개 여분의 밤은 꼭 빼놓으셨다. 날밤으로 드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우리는 엄마의 곁을 지키며 날밤을 하나씩 얻어먹곤 했다. 작은 칼을 사용해 쓱쓱 몇 번 손질을 하고 나면 노란 밤 알맹이를 만들어 내셨다. 치아에 안 좋다며, 엄마는 여러 개를 허락하지는 않으셨다.
그런 엄마의 주의가 생각나서였을까? 동생들에게 여러 개의 날밤을 주지는 않았다. 한 소쿠리가 채워지기까지 여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모두 철수하자.”는 말에 동생들은 아쉬운 목소리들을 냈다. 남아있는 밤송이들을 보면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목소리 톤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동생들의 등을 떠나 밀다시피 하며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몇 시간 동안 보이지 않는 우리 삼 형제가 걱정스러웠는지 집으로 들어서는 작은 길목까지 엄마가 나와 계셨다. 삼 형제의 얼굴이 모두 보이자 굳어 있었던 엄마의 얼굴이 확 펴지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그날 저녁밥을 대신하여 밤파티가 열렸다. 시장에서 밤을 사 왔을 때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이 돌아갔다. 칼을 하나씩 집어 들고 한 사발 가득 찬 밤을 서둘러 까기 시작했다. 햅쌀만큼의 고소함이 햇밤 하나하나를 먹을 때마다 묻어 나왔다. 땀과 노력과 정성으로 수확한 밤은 씹을수록 단맛이 우러나왔다.

 

이제 시장에는 크고 좋은 밤들이 깊어 가는 가을만큼이나 쏟아져 나올 것이다. 이번 주는 엄마를 모시고 전통시장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날밤도 하나 얻어먹으면서 옛날 기분도 내봐야겠다. 더불어 엄마가 쪄준 밤을 한 사발 가득 담아 동생들과 까먹던 그때 기억도 떠올려 봐야겠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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