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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문화로 배우다

[테마 피플] 루스벨트 대통령,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9. 15.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미국의 서른두 번째 대통령이다. 37대부터 40대까지 네 번 당선되어 사망 직전까지 무려 12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한 그의 임기 중에는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 들어 있었다. 어려운 시기에 국민에게 사랑받은 대통령의 행적을 좇아가며, 책임 있는 위치에서 주변과 잘 소통했던 그의 모습을 찾아보고 배워보자.


▲ <사진 1> 1933년의 루즈벨트

출처 : www.en.wikipedia.org


미국 대통령제는 4년 임기에 중임제를 택하고 있다. 아무리 인기가 높아도 8년이 지나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년 1월 30일 ~ 1945년 4월 12일)는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4선 대통령이 되어 12년간 임기를 이어갔다. 4년 중임제는 그의 사후에야 논의가 되어 1951년 수정헌법에 채택되었다.


독재나 유신이 아닌 선거로 장기 집권을 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유례 없는 난국을 거쳐야 했다. 그 결과, 7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미국인들에게 존경받는 정치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는 그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명문가 자제, 루스벨트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1882년 미국 뉴욕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제임스 루스벨트는 철도회사 부사장에다가 그의 가문은 대대로 유복한 지주였다. 그의 집안은 민주당 지지자였지만 먼 친척뻘인 시오도어 루스벨트는 프랭클린이 탄생한 해에 공화당 소속으로 뉴욕 주 하원의원이 된다.


이 시오도어는 훗날 대통령이 되었고, 루스벨트 가문은 프랭클린까지 두 명의 대통령을 배출하게 된다. 제임스 루스벨트는 전처인 레베카 하워드에게서 장남을, 후처인 사라 델러노에게서 프랭클린을 두었다. 어머니 사라는 자신의 유일한 자식인 프랭클린을 엄하게 키웠고, 프랭클린은 어머니를 무서워했다고 전한다.


▲ <사진 2> 1899년, 부모님과 함께한 루즈벨트

출처 : www.en.wikipedia.org


부유한 집안에서 개인교습을 받으며 자란 프랭클린이 정식으로 학교에 다니게 된 때는 14살 무렵이다. 명문 사립학교에 다니다가 하버드대에 진학해 정치와 역사를 전공하고 컬럼비아 로스쿨까지 마쳤다. 이어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딸인 엘리너와 결혼하고, 비슷한 시기에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다.


▲ <사진 3> 1904년, 루즈벨트와 그의 아내 안나 엘리너의 모습

출처 : www.en.wikipedia.org


1910년 아직 젊은 나이의 프랭클린은 뉴욕 주 상원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하고, 이후 재선에 성공해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시절에는 해군성 차관보까지 지냈다. 이윽고 정치에 들어선 지 10년 만에 민주당 부통령 후보에 지명됐을 때까지, 프랭클린의 인생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그럭저럭 좋은 성적을 유지하던, 아주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던 부잣집 도련님이 워싱턴 중심부에서 정치력과 사교술을 익힌 촉망받는 차세대 정치 지도자가 된 것이다.



부목과 휠체어에 의지한 대통령


부통령으로 지명된 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프랭클린은 다음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정치 인생은 이제 막 꽃을 피우려 했다. 그러나 1921년 여름 프랭클린은 소아마비에 걸려 두 다리에 장애를 입는다. 당시 소아마비는 예방할 수 없는 장애였고, 소아마비 백신은 1959년에야 발명되었다. 프랭클린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192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 부목을 짚고 나섰다. 이 모습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남 앞에서 티를 내지 않던 프랭클린의 병세는 그의 사후에야 제대로 알려지게 된다.



▲ <사진 4> 1941년, 휠체어에 앉은 루즈벨트의 모습

출처 : www.en.wikipedia.org


1928년,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면서 프랭클린의 재기는 완전히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프랭클린의 개혁 정책은 환영을 받았으며, 1930년 재선으로 다시 주지사에 당선된다. 이때의 호평을 바탕으로 1932년에는 마침내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 지명된다.


프랭클린이 대통령 후보가 되기까지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1929년 뉴욕 주식시장이 붕괴하며 미국 자본주의는 종말을 고하는 듯 보였고, 소비 위축, 임금 감축의 공황 상태에서 국민들은 연방 정부의 신속한 대응을 원하고 있었다. 당내에서 4차까지 가는 경선 끝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국민의 열망을 안고 1932년 드디어 미국 대통령이 된다.



뉴딜 정책과 노변담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경제 정책은 흔히 ‘뉴딜 정책(New Deal Policy)’이라고 불린다. 경제 부흥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섰고, 노동자 권리 향상, 테네시 계곡 개발 공사, 실업자 대책과 사회 보장책 등을 실시했다. 대외적으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열강의 침략 반대, 그리고 국가 간 우호와 평화를 강조했다.


프랭클린의 경제와 외교 정책에는 여러 가지 평가가 따라붙는다. ‘뉴딜 정책’이 실제 일으킨 효과에 견줘 지나치게 칭송받아 왔다는 평가도 있고, 소련 스탈린 정권에 대한 과신으로 유럽과 한일문제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반짝 경기상승에 힘입어 1936년 재선을, 세계대전으로 인한 군수 증대와 경기 활성화를 등에 업고 1940년 3선을 통과한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은 이미 그 끝을 예비하고 있었고 프랭클린의 건강도 급격히 악화된다. 결국 4선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은 이듬해 독일의 패전 선언을 눈앞에 두고 뇌출혈로 숨을 거둔다.


프랭클린은 정적들로부터 인기 영합주의라는 비판을 들을 정도로 국민들과 소통을 중시한 대통령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노변담화(爐邊談話, Fireside Chat)’다. 프랭클린은 난롯가에서 친구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처럼 국민을 상대로 라디오 연설을 했다. 라디오는 당시 최신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었다. TV뿐 아니라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범람하는데도 국민과 소통하는 방법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오늘날의 정치인들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여담으로, 프랭클린은 취미 삼아 우표 수집을 했다고 한다. 함께 우표 수집을 했던 친구 제임스 A. 팔리를 재임 중에 우정장관에 임명한 적도 있다. 어머니날에 발행한 기념우표를 직접 도안하고, 시험인쇄에는 직접 서명을 넣기도 했다. 대통령의 모습이 담긴 우표도 발행되었다. 우표가 널리 쓰이던 시기인지라 이런 우표들은 세계대전과 대공황 와중에도 미국은 건재하다는 메시지를 주었다고 전한다.


프랭클린이 남긴 연설들은 단호하고 분명한 내용으로 유명하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는 첫 번째 대통령 취임 연설은 불안한 국민들의 마음을 잠재웠다. 3선 후 1941년 의회에서 발표된 연두교서에서는 이른바 ‘네 개의 자유’로 정국을 돌파했다.


▲ <사진 5> 라디오에서 노변담화를 하는 루즈벨트

출처: theweek.com


“우리의 영구적 평화는 다른 나라 국민들의 자유를 희생으로 하여 살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미래를 위해 애쓰고 있는 그 같은 세계가 네 개의 긴요한 인간 자유에 기초한 바탕을 두기를 고대합니다. 첫째는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의 연설과 표현의 자유입니다. 둘째는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모든 사람이 자기 방식대로 신을 믿을 수 있는 자유입니다. 셋째는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로, 세계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이것은 세계 모든 지역의 모든 국가에서 그 주민들을 위한 건강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모든 국가에 확보하려는 경제 상호 이해를 의미합니다. 


넷째는 공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생략) 이 국가는 신의 가호 하에 자유에 대한 신념과 수백만의 자유 시민의 손과 머리와 심장에 그 운명을 맡겼습니다. 자유는 어디에서든 인간 권리의 최고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지지는 그들의 권리를 얻으려 하거나 혹은 그것들을 지키려고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갑니다. 우리의 힘은 우리의 적을 통일하는 데 존재합니다. 이 고귀한 개념을 향하여 승리를 제외하고는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영화 <명량> 흥행과 더불어 이순신 장군을 그리워하거나 방한 이후 프란치스코 교종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때아닌 장군과 교종의 인기를 통해, 이 암울한 시기를 한시바삐 타개하고 싶어 하는 우리 국민들의 희망과 기대를 읽어낼 수 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 대해 미국인들이 품고 있는 존경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 연설 동영상 보기


동영상 <The Four Freedoms - Franklin D. Roosevelt>

출처 : 유튜브 (http://youtu.be/5iHKtrirjlY?list=PL1Pup65lYiut_5PmSO6pLZbftM6qOsMS5)



글쓴이 김희연은 _ 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사회, 문화, 경제 분야에 두루 걸쳐 갖가지 종류의 글을 쓴다. 글쓰기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어서 늘 고마운 마음을 품은 한편으로, 쓸데없는 글로 인해 웹이나 인쇄매체에 들어가는 종이와 바이트, 그리고 독자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