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으로 파견 후에 맞이하게 된 결혼기념일! 오랜만에 외식을 해야 할 터인데 모든 것이 낯선 타지에서 선뜻 마음에 드는 식당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인터넷으로 찾아봐도 필리핀 맛집에 대한 정보도 무척 적었다. 특히 필자가 거주하는 지역은 고작 몇 집만이 개인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정도였으니. 점점 기념일은 다가오는데 마땅한 장소가 없어 고민하던 차, 문득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10년 전에 보라카이로 가족여행을 갔던 때, 비행기 시간이 맞지 않아 알라방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었다. 그 날 밤에 갔던 스카이 라운지 레스토랑의 야경이 무척 인상적이었던 호텔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나보다 오래 전에 파견 나온 후배에게 물어보니, 그 호텔에 라운지 레스토랑이 아직 있고 가격 대비 맛도 괜찮고 야경 또한 좋다고 한다. 필자는 주저 없이 외식 장소를 그곳으로 정했다. 10년만에 다시 찾은 그 호텔. 당시에는 깔끔하고 괜찮은 호텔이었는데 역시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호텔도 많이 낡아있었다. 온종일 더웠던 그날, 갑자기 구름이 몰려와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고, 빗줄기를 타고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어둠이 내리는 도시의 야경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 야외 테라스에서 호수 쪽을 바라본 전경


▲ 언제나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와인 글라스들


10년 전만 해도 엄마와 아빠 손을 꼭 잡고 걸었던 아이들이 이제는 훌쩍 커버려 각자 메뉴를 하나씩 고를 정도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쁘기도 했고 흘러버린 세월에 우리가 나이 들어가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했다. 결혼기념일 핑계로 좋은 와인을 한번 먹어보려고 했는데 아뿔싸! 이곳에서 가장 괜찮다는 와인이 켄달젝슨 빈트너스 리저브라는 레드와인이었다. 호텔이라 당연 좋은 와인이 있을 줄 알고 그냥 왔는데…. 와인을 준비해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마침 만나보지 못했던 웬티 와이너리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주문했는데 보관상태가 열악했는지 이미 꺾여있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웬티 와이너리는 가격대비 품질이 좋은 여러 종류의 와인을 생산하는데 그중 리바렌치 샤도네이가 일품이다)


▲ 웬티 서던 힐스 카베르네 소비뇽 2011


▲ 카베르네 소비뇽임에도 불구하고 색이 너무 옅어 꼭 오래된 빈티지 와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름다운 전망과 가격대비 훌륭한 음식들에 묻혀, 꺾인 와인조차도 훌륭한 들러리가 되어주었다. 내년 결혼기념일에는 좋은 와인을 아내 몰래 준비해서 깜짝 놀래켜주고 싶다. 아이들도 한 모금 정도씩 나눠주면서 말이다. 혹시 결혼기념일이 곧 다가오는 분이라면, 의미있는 와인을 준비하는 근사한 저녁식사를 만들어보시길.


나름대로 의미있는 와인을 추천해보자면, ‘결혼한 연도의 빈티지 와인’이 괜찮을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날인 결혼식을 치렀던 해에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을 정성스럽게 준비하고, 또 그 와인이 담고 있는 의미를 설명해준다면, 자칫 저녁식사 한 끼로 끝나는 연중 행사가 아닌 조금은 더 특별한 기념일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특히, 신혼여행을 갔던 지역의 와인이라면 신혼여행 당시의 기억도 같이 떠올라 더욱 행복한 자리를 만들어주는 조연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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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춘남 2015.04.25 08:1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글잘봤어요
    와인~~살짝 저렴한거마시고 있어요
    ~~

  2. 정형근 2015.04.27 08:43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저렴한 와인이라도 내 입에 맞는 와인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이탈리아 아시시 여행, 그리고 성 프란체스코 성당


지난 유럽여행 때 자동차를 렌트해서 로마와 피렌체 사이,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아시시(Assisi)에 들렀었다. 아시시는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탈리아 고대 소도시로, 중부 움브리아(Umbria) 주에 있는 수바이오 산 중턱에 있어 움브리아 평원의 아름다운 정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성 프란체스코와 성녀 클라라의 탄생지로 유명해 가톨릭 신자들의 주요 순례지이기도 하다.


프란체스코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사람이었으며, 순결한 사랑으로 이탈리아의 수호성인 중 하나로 칭송받는다. 지금 교황님이 자신의 이름을 프란체스코로 한 것도 그분의 청렴하고 희생적인 정신을 본받기 위한 것이다. 우리 가족은 여행을 떠나기 전, 프란체스코 성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보고 갔다. 그 때문에 가톨릭 신도가 아니어도 그분을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었고, 아시시에 들어서자 마음이 경건해짐을 느꼈다. 로마에서 약 두 시간 삼십 분을 달려 아시시 근처에 도착해서 보니 저 멀리 언덕 위에 성당이 보였다.


▲ 왼쪽 끝 부분에 있는, 움브리아 평원에서 바라본 성 프란체스코 성당


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걸어 올라가면 프란체스코 성당이 나타난다. 프란체스코 성인이 페루자 군대와의 전투에 나가던 중 환시를 체험하고 아시시로 돌아오는 모습을 담은 조각상이 서 있고, 성당 뒤에는 저 멀리 움브리아 평원이 아늑하게 펼쳐져 있다. 순결을 상징하듯 흰색으로 지어진 고딕양식의 성당 건물이 정결하고 아름다웠다. 내부는 프레스코화로 덮여 있었다.


▲ 흰색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프란체스코 성당의 모습


성당 지하에는 프란체스코 성인의 묘가 있었다. 많은 가톨릭 신도들이 기도를 드리고 있어서 분위기가 무척이나 엄숙했으며, 어떤 부부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었고, 어떤 중년의 여인은 벽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고 있기도 했다. 가톨릭 신도들은 며칠씩 묵으며 성당에 와서 기도하고 한적한 마을 길을 걸으며 명상에 잠긴다고 하니, 아시시야 말로 진정한 힐링 여행지인 셈이다.



이탈리아의 숨은 맛집을 찾아서


아무래도 여행이 주는 즐거움 중에 하나는 그 지역에서 나는 재료로 만든 제대로 된 음식을 맛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여행 때면 반드시 맛집을 들르곤 한다. 특히, 해외여행 때는 트립어드바이저(Trip advisor) 사이트에서 추천 수가 많은 음식점을 찾아본다. 국내 블로그에서 검색한 맛집을 찾아가는 것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적은 편이다. 이번에는 트러플(송로버섯, 세계 3대 식재료 중 하나이고 귀하기가 산삼과 같다는)이 들어간 요리로 유명한 숨은 맛집을 찾아갔다. 벽돌로 지은 건물에 자그마한 문이 있는데, 역시 필자가 좋아하는 부엉이 스티커(트립어드바이저에서 수여한 맛집 인증 스티커)도 여러 개 있었다. 밖은 타는 듯이 이글거리는 태양으로 숨쉬기조차 힘든데, 돌로 지어진 건물 내부는 정말 상쾌하고 시원했다.


▲ 필자가 이탈리아에서 찾은, 숨은 맛집 입구


주인아주머니에게 트러플이 들어간 요리 중 세 개만 추천해달라고 해서 4명이 나눠 먹었다. 국내에서 먹던 이탈리아 음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진한 치즈 베이스 소스와 우동처럼 두툼한 면발이 특징인 투박한 파스타 위에 아주 얇은 조각으로 얹어진 트러플,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토착 품종으로 만든 하우스 와인이 나왔다. 자칫 느끼할 수도 있는 이탈리아 요리에 상큼하고 깔끔한 화이트와인의 조화는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우리에게 행복한 식사를 누리게 해주었다.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아시시 여행은 우리 가족에게 소박함에서 오는 행복을 느끼게 해준 곳으로 기억에 남았다.


▲ 이탈리아에서 즐긴 트러플 요리, 그리고 깔끔한 화이트와인



이탈리아 움브리아 화이트와인을 만나다


필리핀으로 파견 나와 2개월이 지난 후 사내 번개모임이 횟집에서 있었다. 크고 작은 일들로 아주 바빠, 환영회 이후 처음 맞는 회식이라 메뉴에 맞는 와인을 한 병 들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가던 길에 와인 샵에 들렀는데, 화이트와인이 별로 갖춰지지 않은 곳이라 좀 난감했다. 한참 고민을 하던 중, 눈에 확 들어오는 와인이 하나 있었다. 몇 년 전, 와인 모임에서 어떤 분이 가져오셔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시 보니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역의 와인이 아닌가! 아시시가 있는 그 지역 말이다.


다행히도 준비해간 와인이 회식의 주메뉴였던 라뿌라뿌 회와 무난히 잘 어울렸다. 이탈리아 토착품종이 아니라 대중적인 샤도네이 품종의 와인이었지만, 밝은 노란빛 색깔에 여리디여린 꽃내음과 바닐라 향, 그리고 희미한 토스트 향도 났다. 질감이 가볍고 부드러워, 마치 움브리아 들판에서 풍요롭게 잘 자란 곡식들을 어루만지며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곁에 있었던 분들에게 아시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가족여행의 추억이 떠올라 혼자 흐뭇하게 웃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이 와인을 다시 만나보고 싶다. 그러면 와인은 내 기억의 저편에 잠들어 있던 아시시 가족여행의 추억을 되새기게 해줄 것이며, 덕분에 나는 또 잠시나마 행복했던 여행의 추억을 맛볼 수 있으리라.


▲ 움브리아 화이트와인 라벨 모습 (앞뒤)


와인 정보

안티노리, 브라미토 델 체르보 카스텔로 델라 살라 샤르도네 2011

(Antinori, Bramito del Cervo Castello della Sala Chardonnay 2011)

권장 소비자 가격 : 6만원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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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규태 2016.10.02 15:5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성 프란체스코 축일을 맞아 다녀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영화도 보고...순례예정지인데... 다녀온 듯한 감상이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