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비가 좀 내리기 시작하였지만, 올해 가뭄이 매우 심각한 수준입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 비해 날씨에 덜 민감하지요. 이번 가뭄은 도시의 생활용수도 걱정해야 할 만큼 길었습니다. 태풍조차 그리 많은 비를 동반하지는 못했지요. 이럴 때 농업과 생활에 도움이 되는 단비 같은 기술이 어디 없을까, 조선 시대의 엔지니어 장영실이 생각나지는 않으신지요? 조만간 대하사극으로 제작된다는 소식도 있던데요, 다시 한 번 대한민국에 장영실 열풍이 불어오는 것인가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 장영실(蔣英實, 1385?-1492?)

사진 출처 : https://goo.gl/4g4Jq


장영실(蔣英實, 1385?-1492?)은 생몰연대 기록이 확실치 않습니다. 노비였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출생에 얽힌 이야기도 길고 재미있습니다. 「세종실록」에는 장영실의 아버지가 쑤저우•항저우 지방의 원나라 유민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조선사람으로 동래 현 기생이었다고 하고요. 장영실의 후손인 아산 장씨 종친회의 주장은 다른데요, 아버지가 고려 말 유력 가문 출신이었으나 조선 건국 과정에서 축출되어 어머니와 장영실이 관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시기에 흔히 일어났던 일이기에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장영실이 등장하는 사극들에서는 이쪽의 설명을 채택하여 재미난 일화를 여럿 만들어 냅니다. 어린 시절에는 눈썰미와 손재주가 좋아 나무로 칼을 만들어 동네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설도 전해집니다.


장영실과 그의 생애를 설명할 때 세종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장영실의 재주를 높이 사 등용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훗날 파직시키는 데까지 세종의 영향력이 얽혀 있으니까요. 세종은 본인이 뛰어난 사람이라 신하들을 힘들게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책도 많이 읽었지만 음악과 과학에 두루 능했습니다. 신하들이 한 일들이 다 세종의 업적은 아니겠으나, 각 분야를 깊이 이해하고 장려했다는 점에서도 훌륭한 임금이었습니다. ‘대왕’이라는 호칭이 잘 어울렸지요.


세종대왕 천문기구 프로젝트


1421년(세종 4년) 장영실은 중국 유학을 갑니다. 이때 장영실의 나이는 서른 즈음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세종은 농업에 기반을 둔 유교 국가의 군주로서 농업 생산력을 높이려던 목표가 있었고,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장영실이 발탁된 것이지요. 윤사웅(尹士雄), 최천구(崔天衢) 등과 중국에서 천문기기를 돌아보고 온 장영실은, 천문기기를 제작한 공으로 천민 신분에서 해방됩니다. 상의원(尙衣院) 별좌라는 벼슬도 얻었지요. 장영실의 신분 때문에 유학자인 신하들이 벼슬에 반대하는 장면은 사극의 단골 양념인데요, 실제로는 큰 반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 혼의 또는 선기옥형이라고도 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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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229호인 보루각 자격루

사진 출처 : http://goo.gl/KzRWV2


장영실이 면천된 1432년부터 1438년까지 혼의, 간의 등 천체를 측정하는 천문기구가 쏟아져 나옵니다. 물론 장영실 혼자 만든 것은 아닙니다. 현대과학도 실험실과 연구실에서 탄생하듯, 여러 명이 팀을 이루어 일종의 프로젝트를 수행한 것입니다. 그래도 장영실의 실력이 돋보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물시계인 자격루를 아실 겁니다. 일정한 양의 물이 모이면 쇠 구슬이 굴러가 소리를 냈습니다. 해시계와 달리 흐리고 비 오는 날에 쓸 수 있었습니다. 단번에 제대로 작동했던 것은 아니고 몇 번의 수정을 거쳤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서울 창경궁 명정전 뒤쪽에서 자격루를 볼 수 있습니다.


세종을 특히 기쁘게 한 것은 옥루(玉漏)였습니다. 옥루도 시계의 일종인데, 시간과 계절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옥루는 흠경각(欽敬閣) 안에 설치되어 흠경각루로도 불립니다. 옥루의 구조가 완전히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해시계와 물시계의 원리를 이용해 태양의 움직임과 농사일의 절기를 알리게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사계절 농사일을 담은 화폭을 배경으로 했고, 왕이 왕궁 밖의 천문기구를 보거나 멀리 농촌의 일을 알 수 없으니 옥루를 보면서 백성의 사정과 임금의 자세를 헤아리도록 한 것입니다.


생활을 풍요롭게 한 만능 엔지니어


▲ 갑인자


천문기구 프로젝트가 끝나자 세종은 금속활자인 갑인자(甲寅字)의 제작에 들어갑니다. 금속제련 전문가로서 장영실이 투입되지요. 출판인쇄에 필요한 금속활자 제작은 선대 왕부터 나라의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태종 계미년에 만든 계미자(癸未字)를 세종 갑인년에 개량한 것이 갑인자입니다. 갑인자는 아름답고 경제적인 금속활자였고 처음 20여만 자가 만들어진 데 이어, 조선조 몇 백 년에 걸쳐 여섯 차례나 다시 제작되었습니다. 오늘날 남아있는 조선조 책자들에 마치 붓으로 쓴 듯 찍힌 활자가 바로 이 계미자입니다.


장영실은 경상도 찰방별감이라는 벼슬을 받아 창원과 울산 등지에서 금속 채굴과 제련작업을 지휘했습니다. 그의 감독 아래 채굴한 동철(銅鐵)과 연철(鉛鐵)을 세종에게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각종 천문기구에도 청동 등의 금속이 쓰이므로, 장영실이 금속 제련에 능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의 제련 기술은 장영실 이전에도 상당한 수준이 올라있었다고 평가되며, 장영실은 이를 최대한 활용해 농기구, 천문기구, 활자 제작 등에 이바지했습니다.


▲ 측우기(測雨器)

사진 출처 : http://goo.gl/dikbuX


장영실 하면 떠오르는 측우기(測雨器) 소개를 잠깐 드려야겠네요.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라고 하지요. 농경시대 인간의 생활과 밀접한 비의 양을 측정하려는 기구가 이전에 왜 없었겠습니까마는, 정량적으로 표준화된 측정기구로서 앞선 기술력을 자랑할 만합니다. 전국에 보급되어 비가 내린 시각과 양이 측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측우기는 장영실이 아니라 세종의 세자였던 문종의 발명품이라고 하지요. 장영실의 공이라면 하천의 높이를 재는 수표를 들 수 있습니다. 하천의 범람은 농사에 매우 중요한 정보였기에 수표의 발명은 농사일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청계천에 있는 수표교(水標橋)는 다리 아래에 이 수표가 있어서 붙은 이름입니다.


기술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장영실은 종3품 대호군(大護軍)을 거쳐 정3품 상호군(上護軍)까지 벼슬에 오릅니다. 50세쯤 되던 때에 그의 경력은 끝이 납니다. 경기도 이천의 온천에 다녀오던 왕의 가마가 부서진 사건 때문입니다. 가마를 잘못 만든 불경죄로 곤장을 맞고 파직된 후 장영실의 이름은 더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가마 사건에도 많은 추측이 난무합니다. 가마 제작의 총 책임자가 장영실이 아니었고, 장영실은 가마를 다시 제작해야 한다는 요구를 했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설은 세종의 과도한 업무 지시를 못 견뎌 푹 쉬고 싶었던 장영실의 자작극이라는 것입니다. 외교 관계에 얽힌 음모설도 있습니다. 세종은 장영실의 파직 후 죄를 물어 그가 만든 천문대를 파괴했는데요. 천문 관측은 황제의 고유 권한이라고 생각했던 명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사신이 오기 전에 천문대를 철거할 구실을 찾았다는 이야깁니다. 이쯤 되면 세종과 장영실이 마주 앉아 “이번 일, 네가 막아줘야겠다. 이번 기회에 쉬었다 와라.”는 식의 대화를 나누는, 어느 누아르 영화의 한 장면을 상상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진 출처 : http://goo.gl/2fQV6V


시대에 따라 장영실을 그리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져 왔지만 당대에나 지금에나 뛰어난 과학자라는 평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일례로 세종 때 ‘칠정산(七政算) 내전’이라는 역법서가 나왔습니다. 해,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의 움직임 위치를 계산하는 방법이 담긴 역사책입니다. 독자적으로 천문 관측을 할 수도 없고 중국의 역법을 따라야 했던 조선으로서는 대단한 일인데요. 이런 성과는 장영실이 발명한 천문기구들을 통한 것입니다. 장영실이 만든 것 중에는 위도를 측정하는 기구도 있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농사에 직접 도움이 되는 과학기술에도 장영실의 기여가 컸지요.


장영실 같은 엔지니어의 등장은 어느 시대라도 반가운 법입니다. 하늘을 움직일 수는 없어도, 대비하고 활용할 수는 있으니까요. 세종과 같은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고, 반면 정치적인 도구로 내쳐지는 일 없이 적절한 대우도 있어야겠지요. 그나저나 장영실이 살아있었다면 몇 척 되지 않는 수표를 읽으며 탄식을 했을 가뭄입니다. 단비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글쓴이 김희연은_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자기 과시에 지나지 않는 착한 글이나 빤한 이야기를 피하려고 노력하며 쓰고 있다. 경력에 비해 부족한 솜씨가 부끄럽고, 읽어주는 독자에게는 감사하며 산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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