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노벨물리학상은 일본의 가지타 다카아키와 캐나다의 아서 B. 맥도널드가 공동 수상했습니다. 중성미자에 관한 연구 덕분인데요, 한국 국적을 가진 과학자 중에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는 언제 나올 것인지 걱정하는 목소리가 큽니다. 인간이 이룩한 업적은 천재가 홀로 노력해서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사 속 엔지니어] 칼럼을 통해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현대물리학은 작은 원자 속이나 우주 저 너머와 같은 차원을 다룹니다. 때문에, 이론 물리학자들만 노벨물리학상을 타곤 하지요. 하지만 초창기에는 엔지니어들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인류에게 공헌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라는 의도에는 후자가 더 어울린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909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굴리엘모 마르코니(Guglielmo Giovanni Maria Marconi, 1874~1937)가 전기공학자, 다시 말해 엔지니어였던 것처럼 말이지요.


▲ 굴리엘모 마르코니 초상, 1874년

사진출처 : https://goo.gl/Oagx0p


무선전신을 실용화한 것으로 알려진 마르코니의 공식 이름은 ‘제1대 마르코니 후작 굴리엘모 조반니 마리아 마르코니’입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이탈리아 왕국의 볼로냐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명을 다했습니다. 마르코니가 태어난 해는 1874년, 이탈리아가 통일왕국을 이룬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아버지 주세페 마르코니는 대지주였고, 어머니 애니 제임슨은 영국의 귀족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마르코니는 어릴 때부터 과학에 소질이 있었고, 그 소질을 지원해줄 부모도 있었지요. 13세에 레그혼(Leghorn) 기술학교에 들어가 과학공부를 했습니다.

어머니 쪽의 교육열이 대단한 나머지, 마르코니가 19세가 되었을 때 볼로냐대학의 물리학 교수인 어거스트 리기(Augusto Righi)를 초빙해 개인지도를 받게 했습니다. 전자기(電磁氣)에 정통한 리기 교수의 지도로 마르코니는 각종 전자기 실험을 해볼 수 있었지요. 만 20세인 1894년에는 볼로냐 근처 사유지에 일종의 개인 실험실을 두고 연구에 돌입합니다. 아버지가 대지주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환상, 에테르라는 매질


잠시, 물리 이야기를 해볼까요. 당시 과학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에테르(ether)라는 물질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빛은 파동의 형태로 전달되는데, 이 우주는 파동을 전달하는 매질인 에테르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지요. 에테르는 무게도, 빛깔도, 냄새도 없어서 느낄 수는 없지만 아주 중요한 매개체입니다. 에테르라는 말의 유래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나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이 흙, 공기, 불, 물의 4원소로 이루어져 있고, 비어 있는 곳을 제5원소 에테르가 채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철학적 관점에서나 물리학에서 보나 참 거친 설명입니다만,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둘 것은 빛을 전달하는 매개체인 에테르를 발견하기 위해 당대 과학자들이 열과 성을 다했다는 점입니다.


▲ BT센터 외벽에 새겨진 기념문구

사진출처 : https://goo.gl/f1eXaw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상대성이론에 이르러 에테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빛은 입자이자 파동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러나 에테르가 있다고 믿고 그 성질을 추측하여 모형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과학이 급속하게 발전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마르코니는 맥스웰(James Clerk Maxwell)의 이론에서 영향을 받았는데요. 맥스웰은 전자기 현상이 일어날 때 에테르가 변형되고 이때의 변형력에 의해 전기력과 자기력이 전달된다는 이론을 정립했습니다. 마르코니는 에테르를 통해 전파를 전달하려고 한 것이지요.

다시 볼로냐 근처 마르코니 집안의 사유지로 돌아갑니다. 마르코니의 실험을 설명하려면 전압, 코일, 송수신기, 방전기, 안테나 등등을 이용한 무선장치를 묘사해 드려야 할 텐데요, 넘어가는 게 좋겠지요? (^^) 전파를 멀리 보낼 수 있도록 전신주에 금속판을 설치하고 다른 한쪽은 땅에 묻었다는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르코니는 1895년 9월 2.4km 떨어진 곳까지 무선신호를 보내는 데 성공하고 1896년 6월에는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무선전신 기술특허를 받았습니다.


이탈리아와 영국, 영광의 나날들


당시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보기에 마르코니는 갓 스무 살을 넘긴 아마추어 과학자였습니다. 마르코니의 무선전신 기술을 인정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았지요. 이것은 시기와 질투만은 아니었습니다.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Rudolf Hertz)가 전파 발생 장치와 수신 장치가 있으면 무선통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후, 대서양 이쪽저쪽에서 수많은 과학자가 무선통신에 매진하고 있었으니까요. 마르코니는 ‘뚜뚜’하는 전신을 송수신하는 것에 먼저 성공한 것이지만 나아가 사람의 음성 전달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더욱 발전시킨 과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처음에 이탈리아 당국은 마르코니의 기술에 흥미를 갖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마르코니는 어머니의 나라인 영국으로 건너가 특허를 취득했습니다.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투자를 받아 회사를 차리자, 무선기술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탈리아가 마르코니를 다시 모셔옵니다.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 무선통신 기술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각국 정부는 마르코니의 도움을 구합니다. 마르코니는 자신의 송수신기를 거듭 개량하여 무선통신을 발달시킵니다. 그러던 1901년에는 대서양을 건너 영국과 캐나다를 무선으로 연결하고, 1909년에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된 것이지요.


▲. 미국 엔지니어 알프레드 노튼 골드 스미스와 함께, 1922년

사진출처 : https://goo.gl/9Blbv2


마르코니의 무선통신 기술은 바다에 나간 배들이 육지에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에 힘입어 벨기에-캐나다 간 증기선을 타고 도망친 살인자를 선장과 경찰이 무선신호를 주고받아 체포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 시에는 무선구조 요청 때문에 30%의 승객이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사건사고 이후에 마르코니는 부와 명예를 더 많이 누렸습니다. 1914년에는 이탈리아 원로원 의원이 되고, 1929년에는 후작 작위를 받습니다. 마르코니의 인기는 세계적이어서 일본 식민지 시기 한반도 서울에 방문한 적도 있습니다. 1933년 11월의 일이었지요.

1937년 7월 20일 마르코니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의 죽음은 이탈리아뿐 아니라 주변국의 추모를 받았습니다. 7월 22일 오후 6시 영국 라디오 방송은 2분 동안 아무 소리도 내보내지 않는 것으로 애도를 표했습니다. 그의 사후인 1943년 미국 대법원은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가 마르코니보다 7년 먼저 무선기술 특허를 획득했다는 판결을 내립니다. 노벨상 수상도, 상업적 성공도 마르코니가 다 거머쥐고 세상을 떠난 후에야 말이지요.


엔지니어인가, 파시스트인가


▲. 워싱턴 D.C의 굴리엘모 마르코니 기념관

사진출처 : https://goo.gl/g1jz4f


마르코니는 과학자들과의 교류 없이 무선전신 기술을 개발할 정도로 타고난 운과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기술 개량과 사업 확장을 계속해 나간 것을 보면 과학자와 기업가 양면에서 훌륭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마르코니에게는 씻을 수 없는 인생의 오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의 당원이었다는 점이지요.

앞서 말했던 대로, 마르코니가 살던 시기의 이탈리아는 공화국이 아니라 왕국이었습니다. 이탈리아를 통일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왕위에 있었으나 정치와 경제 상황은 불안했습니다. 바깥으로는 아직 독일이 아니었던 프로이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랑스 등이 뒤엉켜 빈번하게 전쟁을 벌였지요. 1914~1917년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는 전승국이 되고도 별다른 떡고물을 얻지 못합니다. 전쟁 후에 인플레이션만 심해져서 국민의 불만만 더욱 높아졌지요. 이때 ‘검은셔츠단’이라는 우익단체를 이끌고 나타난 무솔리니는 보수층을 집결시켜 파시스트당을 만듭니다. 파시스트당이 이탈리아 유일당이 된 1923년부터 마르코니는 파시스트당의 당원이었습니다. 1930년에는 이탈리아 왕립학회장이자 파시스트 대평의회 의원이 됩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은 1939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나치당과 손잡았지만 끝내 패전하게 되지요. 그러나 전쟁 전에 마르코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험한 꼴은 보지 않았습니다.


마르코니가 누린 영광의 나날들은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과학이나 예술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사람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요. 과학은 정치와 무관하게 중립적일 수 있을까요. 현대과학은 국가적 지원을 받아 여러 명이 연구 개발을 진행하는 형태로 이뤄집니다. 그 영향력은 측정 불가능할 정도지요. 우리 사회는 마르코니의 삶에서 끄집어낸 이 질문들에 제대로 된 답을 내놓아야만 합니다.



글쓴이 김희연은_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자기 과시에 지나지 않는 착한 글이나 빤한 이야기를 피하려고 노력하며 쓰고 있다. 경력에 비해 부족한 솜씨가 부끄럽고, 읽어주는 독자에게는 감사하며 산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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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반의 미국은 모순으로 가득 찬 장소였습니다. 영국의 식민지 시기를 거쳐 남북전쟁으로 연방 체제를 완성하고 나자, 19세기 후반부터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을 했지요. 20세기에 들어서 유럽이 양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미국 사람들은 각종 경영기법을 발달시키고 자본주의를 공고히 해나갔습니다. 오늘날 ‘경영관리’나 ‘산업공학’이라고 부르는 분야도 이 시기 미국에서 태동했습니다. ‘테일러주의’라 불리는 ‘과학적 관리법’도 이때의 유물입니다.


과학적 관리법은 작업장에서의 분업과 작업별 동작, 그에 소모되는 시간 등을 연구해 전체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입니다. 기계가 아닌 사람의 심리와 행동을 무시한 채 지나친 효율만 강조했다고 비판을 받지만, 현대 자본주의 경영관리의 토대가 된 것만은 사실이지요. 20세기 초 과학적 관리법을 신봉했던 엔지니어 중에는 프랭크 길브레스(1868~1924, Frank Bunker Gilbreth)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두가 딱딱하고 길었지요?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프랭크 길브레스가 아니라, 그의 아내인 릴리언 길브레스(1878~1972, Lillian Evelyn Gilbreth)입니다. 릴리언은 열두 아이를 키워낸 어머니였고, 훌륭한 산업공학 엔지니어이자 경영심리학자였습니다. 낡은 가치관과 새로운 기대가 충돌했던 20세기 미국으로 릴리언을 만나러 가보겠습니다.



캘리포니아의 명석한 소녀


▲ 릴리언 길브레스(1878~1972, Lillian Evelyn Gilbreth)

사진 출처 : http://goo.gl/kmFLz


릴리언 길브레스는 1878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아홉 명의 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꽤 부유했다고 합니다. 설탕정제업을 하는 아버지의 수입이 아홉 명의 자녀를 키우기에 충분했던 것이지요. 어릴 때부터 여러 방면에서 공부를 잘했던 릴리언이었지만, 그녀의 부모들은 대학까지 가르칠 마음은 없었습니다. 여자는 좋은 남자를 만나 안정된 결혼생활을 꾸리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여기던 시대의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릴리언은 자신 같은 평범한 여자에게는 남자들이 청혼하지 않아 일찍 결혼하기 힘들 것이라는 말로 부모를 설득했습니다. 부모의 보수적 가치관을 역이용한 셈이지요.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릴리언은 심리학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대학교에서도 릴리언의 성적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녀를 번번이 좌절시키곤 했습니다. 캘리포니아대 졸업식에서 연설한 최초의 여학생이 되었는데도 말이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찾아간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는 영문학 담당 교수가 여성을 제자로 받지 않는다고 하는 바람에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꿔 석사 과정을 밟아야 했습니다. 그 후 영문학 전공, 심리학 부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거머쥐었습니다.


▲ 릴리언 길브레스와 그녀의 남편인 프랭크 길브레스(1868~1924, Frank Bunker Gilbreth)

사진 출처 : https://goo.gl/hbmd9B


릴리언의 삶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남편 프랭크 길브레스를 만난 것은 1903년의 일입니다. 프랭크는 릴리언과 달리,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학업을 포기하고 건설 현장에 나가야 했지요.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던 프랭크는 벽돌 쌓기 공정을 연구했습니다. 작업자의 열여덟 가지 동작을 다섯 가지로 줄여 생산성을 크게 높이면서 프랭크의 ‘동작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릴리언은 열 살 연상인 남편과 편지로 교류를 해나가다가 1904년 결혼을 했고, 자신이 나고 자란 캘리포니아의 반대편인 동부에 정착하게 됩니다. 릴리언과 프랭크는 많은 아이를 낳길 원했습니다. 그들의 소원대로 부부 사이에는 한 다스, 총 열두 명의 아이가 태어납니다. 동작 연구를 통해 건설업 분야에서 경영 컨설팅을 하던 프랭크는 릴리언에게 경영심리를 전공하라고 권했습니다. 릴리언은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와중에 공부를 계속하고 여섯 번째 아이를 낳기 사흘 전에 응용관리 박사 학위를 받게 되지요.



시끌벅적한 가족의 삶


길브레스 집안에 태어난 열두 명의 자녀는 괴짜 엔지니어 아버지와 현명한 심리학자 어머니 사이에서 동화 같은 유년 시절을 보냅니다. 이 시기의 이야기는 딸 어니스틴과 아들 프랭크 주니어가 쓴 책 「한 다스라야 더 싸다(Cheaper by the Dozen)」에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어 속편도 나왔고 영화, 오페라, 연극으로 제작되었습니다.(한국에서도 여러 번 번역되어 다양한 제목으로 출판되었지만 2015년 현재는 모두 절판되었습니다.) 자녀들은 자신들의 집이 ‘과학적 관리법과 낭비의 동작을 없애는 학교’였다고 회상합니다. 비인간적으로 들리나요? 하지만 아이들의 아버지 프랭크는 유머러스한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릴리언의 다정함이 아이들을 지켜주었습니다.


길브레스 가족의 생활을 몇 장면 살펴볼까요? “아빠는 우리가 설거지하는 장면을 영화로 찍어 보여주면서 불필요한 행동을 줄이면 일을 더 빨리 마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가외의 용돈이 필요한 아이들은 자기가 그 일(베란다 페인트칠하기, 앞마당 나무 그루터기 없애기 등의 집안일)을 해야 하는 이유와 입찰 가격을 종이에 적어 제출한다.”, “욕실에는 각자가 해야 할 일의 목록이 비치되어 있었다.”, “그는 조끼를 입을 때 아래에서 위로 단추를 채우면 3초가 걸리는 반면 위에서 시작하면 7초가 걸린다며 항상 밑에서부터 채웠다.” 유쾌한 소동들이 궁금하다면 헌책방에서라도 책을 직접 확인하세요. 


남편과 함께 경영관리와 자녀양육을 병행하던 릴리언의 인생에 다시 한 번 전기가 찾아옵니다. 1924년 릴리언이 아직 마흔여섯 살이고 아이들이 한창 자라고 있을 때, 남편 프랭크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부부는 아이들이 열 명이었을 때부터 프랭크의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릴리언은 열 명이든 열두 명이든 자신의 수고로움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해 계획대로 한 다스의 아이들을 낳았습니다. 언젠가 닥치리라 예상했던 죽음이지만 릴리언과 아이들의 슬픔은 적지 않았지요. 프랭크의 신기한 자녀 교육은 자신이 없을 때 아이들이 릴리언을 도울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을 생각한 산업공학의 선구자 


▲ Miriam Gerla, Lillian Gilbreth (1954, National Convention)

사진 출처 : http://goo.gl/KGC349


릴리언은 어머니로서 연구자로서 프랭크의 자리를 빠르게 메웠습니다. 프랭크가 발표하기로 되어 있던 학회에 대신 참석하는 것을 시작으로 왕성한 사회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미 남편과 공저한 「동작연구(Motion Study, 1911)」와 단독 저술인 「경영심리학(The Psychology of Management, 1914)」이라는 책으로 경영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었지요. 릴리언은 남편의 컨설팅 회사 경영도 이어갔고, 산업공학 분야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됩니다.


생전에 프랭크 길브레스는 ‘유일한 최선의 작업방법(the one best way of doing work)’을 고민했습니다. 쓸모없는 동작을 없애서 빠르게 작업을 끝내자는 것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효율성만 강조하다 작업자의 심신이 어떤지는 살피지 못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이 점을 보완하여 인간적인 경영관리와 산업공학 연구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릴리언의 역할이었지요. 릴리언은 심리학자, 교육자, 엔지니어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도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릴리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발로 페달을 밟으면 뚜껑이 열리는 쓰레기통을 사용해 보신 적이 있나요? 직장과 가정에서 여성들의 생활에 관심이 많았던 릴리언 길브레스가 개발한 것입니다. 릴리언은 여성의 몸에 무리가 덜 가는 싱크대의 적절한 높이를 계산하기도 했지요.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장애를 입은 사람들에게도 관심이 많아 비장애인과 같은 생활을 하도록 돕는 장치와 공간 배치에도 이바지했습니다. 아흔 살이 넘도록 릴리언은 저술과 강의, 연구를 계속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 Valerie Petersen, Lillian Gilbreth (1964)

사진 출처 : http://goo.gl/aszHCl


릴리언의 남편 프랭크에게 무엇 때문에 시간 절약을 그토록 원하느냐고,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할 작정이냐고 누군가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교육을 위해서, 아름다움을 위해서, 예술을 위해서, 즐거움을 위해서죠.” 효율성을 높여 생산성을 늘리자는 구호는 많은 것을 잊게 합니다. 인간이 생산성의 도구가 아니라, 생산성이 인간다운 삶의 수단인데 말이지요. 산업공학의 부모인 릴리언과 프랭크 부부는 그 점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참고한 글

「역사 속 여성 엔지니어를 찾아서」 송성수 (부산대학교 물리교육과 교수), 「아빠 고생하신 거 우리 다 알아요」 프랭크 길브레스 주니어, 어니스틴 길브레스 커레이 지음, 장석영 옮김, 현실과 미래.


글쓴이 김희연은_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자기 과시에 지나지 않는 착한 글이나 빤한 이야기를 피하려고 노력하며 쓰고 있다. 경력에 비해 부족한 솜씨가 부끄럽고, 읽어주는 독자에게는 감사하며 산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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