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지식이 별로 없어도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라는 이름은 누구나 들어봤을 것이다. 간호사의 시조쯤 되는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에서 활약한 영국인이었다. 같은 전쟁에서 각국 병사들로부터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자메이카 출신의 메리 시콜이라는 간호사를 기억하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적다. 이번에는 터키, 영국, 프랑스에서 훈장을 받고 잊힌, 병사들의 위대한 어머니 메리 시콜과 만난다.


160년 전, 이맘때 유럽은 전쟁 중이었다.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흑해에 위치한 크림 반도에서 싸웠기에, 1853년 10월부터 1856년 2월까지 계속된 이 전쟁은 ‘크림 전쟁’으로 불린다. 러시아 제국에 맞서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 왕국이 오스만 제국과 한편을 이뤄 연합군을 결성했다. 크림 전쟁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싼 러시아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사이의 종교 분쟁이자, 각국이 중동의 이권을 놓고 다툰 국제 전쟁이었다.


▲<사진 1> 크림 전쟁에서 메리 시콜의 참여를 보여주는 지도 (Map illustrating Mary Seacole's involvement in the Crimean War)

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그로부터 150여 년이 흐른 2005년, 액자 속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쓰이던 뒷면 종이에서 초상화가 발견되었다. 거기 그려진 것은 검은 얼굴빛의 여성이었고, 그녀의 가슴에는 크림 전쟁의 공로로 받은 터키, 영국, 프랑스 3국의 훈장이 달려 있었다. 완전히 잊혔던 그녀의 이름은 메리 시콜(Mary Jane Seacole, 1805-1881)로 밝혀졌다. 이 그림은 현재 런던 국립 초상화 갤러리에서 볼 수 있다.


▲<사진 2> 1869년 알버트 찰스 챌런에 의해 그려진 메리 시콜의 초상화 (A portrait of Mary Seacole c. 1869, by Albert Charles Challen)

사진 출처 : http://www.dailymail.co.uk


 생약에 관한 지식과 전통요법


메리 시콜은 1805년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자메이카에서 태어났다. 스코틀랜드인 아버지와 현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흑백 혼혈, 다시 말해 물라토였다. 시콜은 어머니에게서 약초의 효능과 전통적인 치료기술을 배우며 자랐다. 성인이 되어 군 병원에서 일했고, 나중에는 주변 사람들을 치료했다. 남편과는 8년만에 사별하고 간호에 충실하던 시콜에게도 크림 전쟁의 소식이 전해졌다. 의료진은 턱없이 부족했고, 시콜은 자신의 의술이 크게 소용될 것을 알았다.


▲<사진 3> Mary Seacole

사진 출처 : http://www.dailymail.co.uk


곧바로 영국 런던으로 향한 메리 시콜은 크림 전쟁 의료진 면접에서 계속해서 떨어졌다. 그녀의 피부색이 문제였다. 영국인들에게 시콜은 유능한 간호사가 아니라 식민지의 일개 흑인일 뿐이었다. 시콜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비를 털어 크림 반도로 향했다. 그녀가 처음 찾아간 곳은 후방에 위치한 ‘나이팅게일 간호단’이었다. 백의의 천사와 성공회 수녀들이 모인 그곳에서도 메리 시콜의 피부색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메리 시콜이 갈 수 있는 곳은 최전방이었고, 그녀는 사비로 자신만의 간호원을 차린다. 죽음의 목전에서 메리 시콜을 만난 연합군 병사들은 메리 시콜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대 메리 시콜


▲<사진 4> 메리 시콜의 수채화 (A watercolour painting of Mary Seacole) (c. 1850)

사진 출처 : http://www.mixedfolks.com/historical3.htm


크림 전쟁이 낳은 최고의 스타 간호사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1910)’이다. 나이팅게일은 라틴어, 지리, 영어, 불어를 가정교사에게 배우면서 자란 영국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다. 그녀는 간호사가 천한 직업이라는 인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크림 반도에 갔고, 38명의 성공회 수녀들과 함께 뛰어난 의료 서비스를 펼쳤다. 실제로 나이팅게일은 간호사에 대한 인식 개선과 군인 사망률 저하와 같은 눈부신 성과를 남겼다. 한편으로는 간호사를 보조적 존재에 머물게 한 것과 다른 간호사들의 활약에 그늘을 드리운 것이 한계로 지적된다.


▲<사진 5> London W1, 14 Soho Square에 위치해 있는 메리 시콜을 기념하는 명판 (Plaque commemorating Mary Seacole at 14 Soho Square, London W1.)

사진 출처 : http://www.flickr.com/photos/harriyott/3985379922/sizes/o/


나이팅게일 이전에도 간호학은 어느 정도 발달해 있었고, 그녀 외에도 영국 간호계와 크림 전쟁에는 메리 시콜처럼 헌신했던 간호사들이 있었다. 게다가 메리 시콜은 나이팅게일보다 15년 먼저 태어났다. 종종 시콜이 ‘검은 나이팅게일’로 소개되지만, 거꾸로 나이팅게일이 ‘하얀 시콜’이라 불려야 마땅하다. 크림 전쟁을 계기로 간호와 행정 양쪽에서 두각을 나타낸 나이팅게일과 달리, 크림 전쟁이 끝나고 메리 시콜에게 남은 것은 명예뿐이었다. 자산은 모두 구호에 털어 넣었고 자신의 몸은 병들어 있었다. 그러나 1881년 눈을 감을 때까지 낙관적인 태도만은 잃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나눔에 아무 대가도 없다면 누가 나누려 할까. 물론 우리 몸에는 나누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이 흘러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어떠한 보상도 없다면, 우리는 자신이 갖춘 능력과 기술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을까. 메리 시콜의 삶은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지금 우리가 가진 작은 것에서부터 가볍게 시작해 보면 어떠할까.

죽어가는 병사들의 손을 끝까지 잡아 주었던 메리 시콜이나 행정의 달인으로서 진료소를 현대화한 나이팅게일까지는 멀고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미약한 온기를 전해주고 세상을 조금씩 바꾸는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를 마무리하며 누군가와 나눌 수 있을 만큼 마음이 따뜻한 나날을 보내시기를 바란다.



글쓴이 김희연은 _ 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사회, 문화, 경제 분야에 두루 걸쳐 갖가지 종류의 글을 쓴다. 글쓰기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어서 늘 고마운 마음을 품은 한편으로, 쓸데없는 글로 인해 웹이나 인쇄매체에 들어가는 종이와 바이트, 그리고 독자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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