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데 페론(María Eva Duarte de Perón, 1919년 5월 7일 ~ 1952년 7월 26일), 아니 에비타(Evita)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인물이 있다.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것 말고는 뚜렷한 직책이 없었는데도 오늘날 세계의 많은 사람이 에비타를 기억한다. 살아 있을 때 이미 아르헨티나의 신화가 되었고,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과 마돈나가 출연한 영화를 통해서 세계적 전설로 남은 에비타를 소개한다.


▲ <사진 1> 에바 페론

출처 : australfilms.com


“아르헨티나여, 날 위해 울지 말아요(Don’t Cry For Me Argentina).”라고 노래하는 여인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세계적인 뮤지컬 <에비타>에 나오는 아주 유명한 곡이니. 에비타는 에바 페론의 애칭이고, 앞의 곡은 칭송과 욕설을 한몸에 받았던 그녀의 심경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달콤한 부와 명성을 누렸으면서도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그녀의 짧고 화려한 삶을 들여다보자.


부와 명성은 내가 끌어들인 게 아니에요. 세상은 내가 바랐다고 여기지만, 그것들은 허상이에요. 약속했던 해결책이 되지 못했죠. 해답은 항상 여기 있었어요. 나는 당신들을 사랑해요. 당신들도 나를 사랑하길 원하죠.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And as for fortune, and as for fame I never invited them in. Though it seemed to the world they were all I desired. They are illusions. They're not the solutions they promised to be. The answer was here all the time. I love you and I hope you love me. Don't cry for me Argentina.



동영상 <Don't Cry For Me Argentina - Madonna - Lyrics>

출처 : 유튜브 (http://youtu.be/XYymFWsBxk0)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지만 세상에는 사랑받고 싶어


1919년,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서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가 태어났다. 에바의 아버지는 작은 마을 로스톨도스의 부유한 농장주인 후안 두아르테였다. 그러나 에바의 어린 시절은 풍족하지 못했다. 어머니 후아나 이바르구엔이 아버지의 정식 아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바는 후안과 후아나 사이의 넷째 딸이었고, 아래로 여동생이 한 명 더 태어났다. 에바와 자매들은 아버지에게 법적인 딸로 인정받지 못했고, 결국에는 버림을 받았다. 어머니와 다섯 딸은 ‘후닌’이라는 곳으로 거처를 옮긴 후, 단칸방에서 가난하게 지내야 했다.


▲ <사진 2> 물방울 모양의 수영복을 입은 에바

출처: en.wikipedia.org


소녀 시절의 에바는 어머니 쪽 친척들의 도움으로 살며 학교에 다녔다. 예쁘장한 외모의 에바는 그에 걸맞은 재능도 가지고 있었다. 학교 연극이나 연주회에서 빛을 발했고, 아예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1935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진출해 모델, 연극배우, 영화배우, 라디오 성우 등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나간다. 에바 페론에게는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얼굴을 무기로 밑바닥을 전전하던 가난하고 악착같은 소녀 이미지가 덧씌워 있다. 그러나 절반 정도는 사실이 아니다. 에바는 스무 살 무렵 이미 유명한 연예인으로 자리 잡았었고, 라디오 방송국을 소유할 만큼 경제적으로도 성공했다.


후안 페론과 에바의 첫 만남은 1944년에 이루어진다. 당시 후안은 아르헨티나의 노동부 장관이었고 같은 해 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그 해에는 6,000명 이상이 숨진 산후안 대지진이 발생했는데, 후안 페론이 기획한 이재민을 위한 모금회에 에바가 참석했다. 스물다섯의 아름다운 아가씨는 단숨에 후안을 사로잡았고, 이듬해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한다. 후안에게는 사별 후 두 번째 결혼이었고 그는 에바보다 스물네 살이 많은 중년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천사


에바 페론이 된 에바는 남편과 함께 대통령 선거를 준비한다. 후안 페론은 육군 대령 출신으로, 군사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노동조합이 그의 주요한 지지 기반이었고, 에바와의 결혼으로 대중적인 인기까지 얻게 된다. 이때부터 에바는 어린 시절의 애칭 ‘에비타’로 널리 알려진다. 후안은 다른 군부 세력들의 견제를 받아 체포되는 시련을 잠시 겪고 나서 1946년 과반이 넘는 득표를 통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된다.


▲ <사진 3>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는 에바

출처: australfilms.com


후안과 에바 페론의 집권기에 대한 평가는 아직 논란의 대상이다. 페론 정권은 1947년 7월 아르헨티나의 외채를 모두 갚았다. 페론 집권기 동안 병원 4,000여 개, 학교 8,000여 개를 설립했고 사회보장제도를 확충했다. 이 시기에 빈부 격차가 줄어들고 양성평등이 확립되었다. 에바는 이 기간에 영부인이라기보다 보건복지부 장관이나 부통령에 가까운 역할을 했다. 에바 페론 재단을 만들어 각종 자선사업을 지원했고, 여성페론당을 통해 여성운동에도 이바지했다.


빛나는 영광 뒤에는 그림자도 짙다. 페론 집권기 이후 경제 대국이던 아르헨티나의 경제성장률이 형편없이 떨어졌다는 것이 그 증거다. 또한, 페론 부부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라는 구호가 독재를 위한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다. 페론 부부는 스스로 자신들을 우상화했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러던 1952년, 후안 페론은 재선에 성공했지만 에바는 자궁암과 척수백혈병으로 급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그녀 나이 불과 만 33세의 일이다.


동영상 <Eva Peron's Final Speech (1951)>

출처 : 유튜브 (http://youtu.be/Dr7ymWtnHWc)



죽어서도 남편의 후처까지 대통령으로 만든 여성


에비타의 죽음은 아르헨티나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 장례는 한 달이나 치러졌고, 에바의 시신은 미라로 만들어졌다. 후안 페론은 에바의 죽음 이후 빠르게 몰락했다. 페론 부부의 허세와 부패가 서서히 드러난 탓일까. 후안 페론의 탄압에 분노한 가톨릭계가 군부와 손을 잡았고, 군부에 의해 대통령에서 쫓겨난 후안은 1955년 망명길에 올랐다. 새 군부는 살아 있는 후안 페론뿐 아니라 죽어 버린 에바 페론도 무서워했다. 그녀의 시신은 탈취되어 여기저기를 떠돌았고, 나중에는 남편조차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에바 시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아르헨티나의 정치경제는 점점 도탄에 빠졌고 호시절에 대한 막연한 향수는 더욱 강해졌다. 후안 페론은 망명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1973년에 다시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된다. 그의 새 아내인 이사벨 페론이 부통령으로 지명되어 옛날의 에바처럼 후안과 함께했다. 대통령 자리에 오른 지 열 달도 안 돼 후안 페론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이사벨이 그 자리를 잇는다. 이사벨은 국민의 지지를 모으기 위해 남편의 전처인 에바의 시신을 대통령 관저로 옮겼다. 그러나 이사벨 페론은 다시 쿠데타로 대통령직에서 2년도 안 돼 물러났다. 그제야 에바 페론의 시신도 24년 만에 가족 묘지에서 쉬게 되었다.


▲ <사진 4> 후안 페론과 에바 페론

출처 : wikimedia.org 


‘불꽃 같은 삶’이라는 물린 문구가 에바 페론의 일생만큼 어울리기도 어려울 것 같다. 사생아, 밑바닥 삶, 연예인, 영부인, 짧은 생애, 그리고 죽어서도 이용당한 시신까지, 뭇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들이다. 에비타는 세상의 사랑을 받겠다는 야심이 있었고, 죽는 순간까지도 그에 따르는 노력을 했다. 자신을 업신여긴 사람들에 대한 복수에 가차 없었고, 당시 남미와 유럽 사교계의 여왕답게 사치를 즐기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아르헨티나의 아이들, 빈민과 노동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서 활동하기도 했다. ‘거룩한 악녀’ 또는 ‘비천한 성녀’라는 모순된 설명이 잘 어울리는 것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녀의 삶 자체가 모순을 품고 있어서다.


에비타처럼 극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우리 삶 대부분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어서 그렇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그다지 일관되지 않은 편이다. 어느덧 한 계절이 넘어가고 있다. 삶의 모순과 화해하며 자신에게는 겸손해지고 타인에게는 너그러워지는 가을 되시길.


동영상 <1951-1952 The Final Year of Evita Peron>

출처 : 유튜브 (http://youtu.be/4JjZ3VEp8mw)



글쓴이 김희연은 _ 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사회, 문화, 경제 분야에 두루 걸쳐 갖가지 종류의 글을 쓴다. 글쓰기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어서 늘 고마운 마음을 품은 한편으로, 쓸데없는 글로 인해 웹이나 인쇄매체에 들어가는 종이와 바이트, 그리고 독자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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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미국의 서른두 번째 대통령이다. 37대부터 40대까지 네 번 당선되어 사망 직전까지 무려 12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한 그의 임기 중에는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 들어 있었다. 어려운 시기에 국민에게 사랑받은 대통령의 행적을 좇아가며, 책임 있는 위치에서 주변과 잘 소통했던 그의 모습을 찾아보고 배워보자.


▲ <사진 1> 1933년의 루즈벨트

출처 : www.en.wikipedia.org


미국 대통령제는 4년 임기에 중임제를 택하고 있다. 아무리 인기가 높아도 8년이 지나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년 1월 30일 ~ 1945년 4월 12일)는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4선 대통령이 되어 12년간 임기를 이어갔다. 4년 중임제는 그의 사후에야 논의가 되어 1951년 수정헌법에 채택되었다.


독재나 유신이 아닌 선거로 장기 집권을 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유례 없는 난국을 거쳐야 했다. 그 결과, 7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미국인들에게 존경받는 정치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는 그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명문가 자제, 루스벨트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1882년 미국 뉴욕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제임스 루스벨트는 철도회사 부사장에다가 그의 가문은 대대로 유복한 지주였다. 그의 집안은 민주당 지지자였지만 먼 친척뻘인 시오도어 루스벨트는 프랭클린이 탄생한 해에 공화당 소속으로 뉴욕 주 하원의원이 된다.


이 시오도어는 훗날 대통령이 되었고, 루스벨트 가문은 프랭클린까지 두 명의 대통령을 배출하게 된다. 제임스 루스벨트는 전처인 레베카 하워드에게서 장남을, 후처인 사라 델러노에게서 프랭클린을 두었다. 어머니 사라는 자신의 유일한 자식인 프랭클린을 엄하게 키웠고, 프랭클린은 어머니를 무서워했다고 전한다.


▲ <사진 2> 1899년, 부모님과 함께한 루즈벨트

출처 : www.en.wikipedia.org


부유한 집안에서 개인교습을 받으며 자란 프랭클린이 정식으로 학교에 다니게 된 때는 14살 무렵이다. 명문 사립학교에 다니다가 하버드대에 진학해 정치와 역사를 전공하고 컬럼비아 로스쿨까지 마쳤다. 이어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딸인 엘리너와 결혼하고, 비슷한 시기에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다.


▲ <사진 3> 1904년, 루즈벨트와 그의 아내 안나 엘리너의 모습

출처 : www.en.wikipedia.org


1910년 아직 젊은 나이의 프랭클린은 뉴욕 주 상원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하고, 이후 재선에 성공해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시절에는 해군성 차관보까지 지냈다. 이윽고 정치에 들어선 지 10년 만에 민주당 부통령 후보에 지명됐을 때까지, 프랭클린의 인생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그럭저럭 좋은 성적을 유지하던, 아주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던 부잣집 도련님이 워싱턴 중심부에서 정치력과 사교술을 익힌 촉망받는 차세대 정치 지도자가 된 것이다.



부목과 휠체어에 의지한 대통령


부통령으로 지명된 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프랭클린은 다음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정치 인생은 이제 막 꽃을 피우려 했다. 그러나 1921년 여름 프랭클린은 소아마비에 걸려 두 다리에 장애를 입는다. 당시 소아마비는 예방할 수 없는 장애였고, 소아마비 백신은 1959년에야 발명되었다. 프랭클린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192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 부목을 짚고 나섰다. 이 모습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남 앞에서 티를 내지 않던 프랭클린의 병세는 그의 사후에야 제대로 알려지게 된다.



▲ <사진 4> 1941년, 휠체어에 앉은 루즈벨트의 모습

출처 : www.en.wikipedia.org


1928년,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면서 프랭클린의 재기는 완전히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프랭클린의 개혁 정책은 환영을 받았으며, 1930년 재선으로 다시 주지사에 당선된다. 이때의 호평을 바탕으로 1932년에는 마침내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 지명된다.


프랭클린이 대통령 후보가 되기까지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1929년 뉴욕 주식시장이 붕괴하며 미국 자본주의는 종말을 고하는 듯 보였고, 소비 위축, 임금 감축의 공황 상태에서 국민들은 연방 정부의 신속한 대응을 원하고 있었다. 당내에서 4차까지 가는 경선 끝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국민의 열망을 안고 1932년 드디어 미국 대통령이 된다.



뉴딜 정책과 노변담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경제 정책은 흔히 ‘뉴딜 정책(New Deal Policy)’이라고 불린다. 경제 부흥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섰고, 노동자 권리 향상, 테네시 계곡 개발 공사, 실업자 대책과 사회 보장책 등을 실시했다. 대외적으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열강의 침략 반대, 그리고 국가 간 우호와 평화를 강조했다.


프랭클린의 경제와 외교 정책에는 여러 가지 평가가 따라붙는다. ‘뉴딜 정책’이 실제 일으킨 효과에 견줘 지나치게 칭송받아 왔다는 평가도 있고, 소련 스탈린 정권에 대한 과신으로 유럽과 한일문제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반짝 경기상승에 힘입어 1936년 재선을, 세계대전으로 인한 군수 증대와 경기 활성화를 등에 업고 1940년 3선을 통과한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은 이미 그 끝을 예비하고 있었고 프랭클린의 건강도 급격히 악화된다. 결국 4선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은 이듬해 독일의 패전 선언을 눈앞에 두고 뇌출혈로 숨을 거둔다.


프랭클린은 정적들로부터 인기 영합주의라는 비판을 들을 정도로 국민들과 소통을 중시한 대통령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노변담화(爐邊談話, Fireside Chat)’다. 프랭클린은 난롯가에서 친구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처럼 국민을 상대로 라디오 연설을 했다. 라디오는 당시 최신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었다. TV뿐 아니라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범람하는데도 국민과 소통하는 방법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오늘날의 정치인들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여담으로, 프랭클린은 취미 삼아 우표 수집을 했다고 한다. 함께 우표 수집을 했던 친구 제임스 A. 팔리를 재임 중에 우정장관에 임명한 적도 있다. 어머니날에 발행한 기념우표를 직접 도안하고, 시험인쇄에는 직접 서명을 넣기도 했다. 대통령의 모습이 담긴 우표도 발행되었다. 우표가 널리 쓰이던 시기인지라 이런 우표들은 세계대전과 대공황 와중에도 미국은 건재하다는 메시지를 주었다고 전한다.


프랭클린이 남긴 연설들은 단호하고 분명한 내용으로 유명하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는 첫 번째 대통령 취임 연설은 불안한 국민들의 마음을 잠재웠다. 3선 후 1941년 의회에서 발표된 연두교서에서는 이른바 ‘네 개의 자유’로 정국을 돌파했다.


▲ <사진 5> 라디오에서 노변담화를 하는 루즈벨트

출처: theweek.com


“우리의 영구적 평화는 다른 나라 국민들의 자유를 희생으로 하여 살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미래를 위해 애쓰고 있는 그 같은 세계가 네 개의 긴요한 인간 자유에 기초한 바탕을 두기를 고대합니다. 첫째는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의 연설과 표현의 자유입니다. 둘째는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모든 사람이 자기 방식대로 신을 믿을 수 있는 자유입니다. 셋째는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로, 세계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이것은 세계 모든 지역의 모든 국가에서 그 주민들을 위한 건강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모든 국가에 확보하려는 경제 상호 이해를 의미합니다. 


넷째는 공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생략) 이 국가는 신의 가호 하에 자유에 대한 신념과 수백만의 자유 시민의 손과 머리와 심장에 그 운명을 맡겼습니다. 자유는 어디에서든 인간 권리의 최고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지지는 그들의 권리를 얻으려 하거나 혹은 그것들을 지키려고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갑니다. 우리의 힘은 우리의 적을 통일하는 데 존재합니다. 이 고귀한 개념을 향하여 승리를 제외하고는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영화 <명량> 흥행과 더불어 이순신 장군을 그리워하거나 방한 이후 프란치스코 교종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때아닌 장군과 교종의 인기를 통해, 이 암울한 시기를 한시바삐 타개하고 싶어 하는 우리 국민들의 희망과 기대를 읽어낼 수 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 대해 미국인들이 품고 있는 존경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 연설 동영상 보기


동영상 <The Four Freedoms - Franklin D. Roosevelt>

출처 : 유튜브 (http://youtu.be/5iHKtrirjlY?list=PL1Pup65lYiut_5PmSO6pLZbftM6qOsMS5)



글쓴이 김희연은 _ 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사회, 문화, 경제 분야에 두루 걸쳐 갖가지 종류의 글을 쓴다. 글쓰기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어서 늘 고마운 마음을 품은 한편으로, 쓸데없는 글로 인해 웹이나 인쇄매체에 들어가는 종이와 바이트, 그리고 독자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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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발레 공연을 단 한 번도 못 본 분도 있을 것이다. 발레는 솔직히 대중적인 예술이라 일컫기가 어렵다. 반면, 가녀리면서도 아름다운 선을 그리며 힘 있는 도약을 보여주는 발레리나에 대해서는 왠지 모를 동경이 퍼져 있는 듯하다. ‘발레리나’라고 하면 마르고 우아하고, 일상에서는 다소 까다로울 것 같은 인상이다. 이 스테레오타입은 안나 파블로바라는 세기의 발레리나에게서 본을 따온 것은 아닐까. 안나 파블로바의 생애를 살펴보며 발레와 발레리나에 대해 이전보다 친근감을 가지게 되기를 바란다.

 

50년의 인생, 그중에 절반을 무대에서 보내며 약 4,000회의 공연을 한 발레리나가 있다. ‘빈사의 백조(The Dying Swan)’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발레리나이자 러시아의 무용수인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a, 1881년~1931년)’다. 파블로바의 생전 공연 모습은 인터넷 검색을 하면 동영상으로도 볼 수 있다. 비가 내리고 뚝뚝 끊기는 흑백 화면이지만, 그녀의 뛰어난 움직임을 아쉬운 대로 감상할 기회다.

 

▲ <사진 1> 안나 파블로바

 출처 : www.en.wikipedia.org


백조처럼 날갯짓을 하는 모습과 세기를 뛰어넘은 명성은 안나 파블로바를 타고난 발레리나처럼 여기게 한다. 그러나 그녀는 천재보다는 노력형 발레리나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노력과 관련된 말을 많이 남긴 편이다. “멈추지 말고 매진하라.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신은 재능을 주시고, 노력은 재능을 천재로 만든다.”

 

 

 

빗자루 같은 몸을 한 연습벌레


안나 파블로바는 188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세탁 일을 해서 딸을 겨우 키웠는데, 어려운 형편에도 딸에게 공을 들였다. 파블로바가 발레리나가 되려고 한 것도 어머니가 마린스키 극장에서 보여 준 발레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파블로바를 황실 발레학교로 데려갔으나 처음에는 입학이 거절되었다. 아직 어리고 너무 말랐다는 것이 거절의 이유였다. 그러나 최고의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Marius Petipa, 1819~1910)’가 그녀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발탁해 본격적으로 발레를 배울 수 있었다. 발레리나로서도 지나치게 마른 편이었는지 친구들에게 ‘빗자루’라는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 발레는 엄격하고 힘 있는 동작을 추구했다. 파블로바는 러시아 발레가 요구하는 발레리나가 아니었다. 자세와 회전면에서 모두 자질이 부족했다. 몸 특히 발목은 너무 가늘고 약했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의 연습벌레인 그녀는 턴과 점프를 무리할 정도로 반복 연습했다. 그러던 중 ‘파벨 게르트(Pavel Andreyevich Gerdt, 1844~1917)’가 그녀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너보다 훨씬 신체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하는 것을 흉내 내지 마라. 너만의 우아함과 연약함이 가장 큰 자산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곡예와 같은 트릭보다 자신이 가진 특별한 재능을 끌어내는 춤을 추어라.”

 

파블로바는 섬세한 감정 표현과 아름다운 연기로 남과 다른 자신만의 발레를 하게 되었다. 마린스키 극장에서 발레를 처음 본 어린 소녀는, 마침내 그 극장의 주역 무용수로 올라선 것이다.

 

 

 

세계를 매혹하는 나비로 탈바꿈하다

 

▲ <사진 2> 안나 파블로바의 사진엽서

  출처 : www.en.wikipedia.org 


안나 파블로바를 주역 무용수, 진정한 의미에서 ‘발레리나’로 부르게 한 역할은 라 바야데르(La Bayadere)의 <니키아>였다. 그녀는 인도의 무희인 ‘니키아’ 역할을 멋지게 소화했다. 연인을 사이에 둔 연적과의 갈등, 배신과 죽음이 파블로바의 몸을 통해 드라마틱하게 펼쳐졌다. 다양한 감성이 필요한 <지젤>도 안나 파블로바의 대표작 중 하나다. 귀족 알베르와의 신분 차이에 절망한 아가씨 지젤이 죽어 ‘빌리’라는 춤의 요정이 된다는 이야기의 이 발레는, 그녀 이후 여러 발레리나가 꿈꾸는 역할이 되었다. 발랄한 시골 아가씨, 사랑의 배신에 미쳐가는 연인, 남자를 지키려는 죽은 영혼을 한 무대에서 연기하는 일은 발레의 테크닉만 갖춘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안나 파블로바를 주역 무용수, 진정한 의미에서 ‘발레리나’로 부르게 한 역할은 라 바야데르(La Bayadere)의 <니키아>였다. 그녀는 인도의 무희인 ‘니키아’ 역할을 멋지게 소화했다. 연인을 사이에 둔 연적과의 갈등, 배신과 죽음이 파블로바의 몸을 통해 드라마틱하게 펼쳐졌다. 다양한 감성이 필요한 <지젤>도 안나 파블로바의 대표작 중 하나다. 귀족 알베르와의 신분 차이에 절망한 아가씨 지젤이 죽어 ‘빌리’라는 춤의 요정이 된다는 이야기의 이 발레는, 그녀 이후 여러 발레리나가 꿈꾸는 역할이 되었다. 발랄한 시골 아가씨, 사랑의 배신에 미쳐가는 연인, 남자를 지키려는 죽은 영혼을 한 무대에서 연기하는 일은 발레의 테크닉만 갖춘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일반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백조의 호수>의 ‘오데트’도 안나 파블로바에게 적역이었다. ‘오데트’하면 ‘파블로바’, ‘파블로바’ 하면 ‘오데트’가 바로 떠오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백조의 호수>는 앞서 소개한 라 바야데르, 지젤과 함께 ‘백색 발레’로도 통한다. 하얀 튀튀(치마 끝이 넓은 여성 발레 의상)를 입고 군무를 추는 장면이 삽입된 발레여서다. 군무 장면만으로도 관람료가 아깝지 않다는 평가를 듣곤 하니, 파블로바의 후예들이 선보이는 백색 발레를 기회가 되는 한 감상해 보실 것을 추천한다.

 

▲ <사진 3> 백조를 연기하는 안나 파블로바

 출처: www.en.wikipedia.org


안나 파블로바를 ‘백조’라고 부르는 것은 <백조의 호수>와 더불어 <빈사의 백조>의 영향이 크다. 말 그대로 죽어가는 백조를 연기하는 2분 정도의 짧은 발레다. 생상의 음악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에다가 미하일 포킨(Michel Fokin)이 안무를 했다. 포킨은 이 작품을 파블로바를 위해 특별히 만들었다. 죽음이 가까워져 올수록 파닥거리는 날갯짓과 표정 연기가 일품이다. 이후 파블로바에게는 ‘백조의 화신’이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 지금은 파블로바만큼이나 뛰어난 기량의 후배들이 선보이는 <빈사의 백조>를 많이 만날 수 있다.

 

 

 

고전발레를 위해 세계 각지로 날아든 백조

 

정상의 자리에 오른 안나 파블로바는 고전 발레를 세계에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유럽 관객들은 러시아 관객들 못지않게 그녀를 사랑했다. 활달한 성격이었던 파블로바에게 세계 투어 공연은 적성에도 맞는 일이었다. 러시아 황실발레단을 나와 마린스키 극장에서 활동했던 무용수들이 주축이 된 발레단 ‘발레 뤼스’에 파블로바가 합류했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 1872~1929)가 세운 발레 뤼스에는 바슬라프 니진스키, 조지 발란신, 미하일 포킨 등 세기의 안무가와 무용수들이 거쳐 갔다. 1911년이 되자 파블로바는 아예 자신만의 발레단을 창단한다. 파블로바의 발레단은 1차 세계대전 중 유럽, 미국, 인도, 중국, 그리고 일본까지를 누비며 거의 매일 같이 발레 공연을 선사했다.

 

세기의 발레리나, 모두가 따라 하고 싶어 하던 발레리나가 잠시나마 머물 거처로 택한 장소는 런던이었다. 파블로바는 호숫가 작은 집 ‘아이비 하우스(Ivy House)’에 살며 발레를 가르치고 애완동물들을 길렀다. 죽기 전까지 춤을 췄고, 후배에게 가르쳤고, 세계에 고전 발레를 전파했다. 파블로바의 사인은 무리한 일정과 추위에 인해 얻은 폐렴과 가슴막염이다. 의사의 만류에도 일정을 강행해, 공연이 있던 네덜란드 헤이그의 호텔 방에서 숨을 거뒀다. <빈사의 백조>에서 입을 하얀 튀튀를 가슴에 품은 채였다.

 

▲ <사진 4> 안나 파블로바의 유골

 출처 : www.en.wikipedia.org


그녀가 세상을 떠난 이틀 뒤 런던의 한 공연장에는 <빈사의 백조>가 무대에 올랐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생상의 ‘백조’가 흐르는 가운데, 무대에는 발레리나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조명만이 비추었다. 음악이 끝나자마자 이제는 세상에 없는 백조의 화신 안나 파블로바에게 열렬한 기립 박수가 쏟아졌다.

 

▲ <사진 5> 런던 빅토리아 극장의 안나 파블로바

 출처 : www.en.wikipedia.org

 


 안나 파블로바 공연 동영상 보기


동영상 <Anna Pavlova - The Dying Swan>

출처 : 유튜브 (http://youtu.be/QMEBFhVMZpU)

 

동영상 <Anna Pavlova performs ballet solos, 1920's - Film 7224>

출처 : 유튜브 (http://youtu.be/8bRwb5DGekg)

 

글쓴이 김희연은 _ 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사회, 문화, 경제 분야에 두루 걸쳐 갖가지 종류의 글을 쓴다. 글쓰기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어서 늘 고마운 마음을 품은 한편으로, 쓸데없는 글로 인해 웹이나 인쇄매체에 들어가는 종이와 바이트, 그리고 독자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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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는 왠지 사나이, 동양인, 무공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나 통할 것 같은 단어다. 서구 유럽에서 의리를 찾아본다면 역시 ‘기사도’ 같은 케케묵은 개념들만이 떠오를까. 근현대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꼽히는 카를 마르크스와 그의 동반자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교우는 의리의 새로운 표본으로 읽힐 것 같다.

 

요즘 의리의 상징으로 모 남자탤런트가 떠오르듯이, 역사에서도 ‘의리’ 하면 ‘이 사람!’하고 떠오르는 인물이 있을까. 단연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년~1895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역사에서 의리란 대개 주군과 신하 간에 지켜져 왔다. 권력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사람이 지키는 경우보다 아랫사람이 바치는 조건 없는 충성이 절대적으로 많았다.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님에도, 평등한 관계임에도 의리를 지켰던 사람은 상대적으로 찾기가 힘들다. 여기 카를 마르크스의 친구이며 그 자신이 위대한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소개한다.

 

▲ <사진1> 좌: 엥겔스 / 우: 마르크스출처: www.fridge.gr


엥겔스는 독자적으로 소개되는 법이 거의 없고, 카를 마르크스의 친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더불어 보통사람의 입에 담기 어려운 이름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두 사람의 공동 저작인 「공산당 선언」이 대학 교양수업 교재로도 쓰이는 세상이지만 ‘민주’보다는 ‘반공’이 중요했던 시기에는 엥겔스와 마르크스를 입에 올리는 일이 금기시되었다. 우리나라의 분위기와는 별개로 마르크스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사상가이자 역사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일례로, 지난해 11월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학자들의 영향력을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그 1위를 역사학 분야에서 카를 마르크스가 차지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공동 연구자이자 동료 활동가였으며 마르크스의 사상을 정리하고 전파한 인물이다. 정치적 편향을 제거하고, 그의 생애를 따라가 보려 한다.



방직회사 경영주의 아들


엥겔스는 1820년 독일 라인 주에서 태어났다. 알려졌다시피 그의 아버지는 방직회사 ‘에르멘&엥겔스’를 경영하는 자본가였다. 아들이 대를 이어 경영에 뛰어들기를 원했기에, 엥겔스는 아버지 뜻에 따라 브레멘 상사라는 회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경영기술보다 노동자들이 고통받는 현실을 먼저 발견했다. 17세에 시집을 낼 정도로 글재주가 좋았기에 엥겔스의 손을 거쳐 당시 독일 사회를 고발하는 칼럼들이 쏟아져 나왔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엥겔스는 유명한 저널리스트로 인기를 끌었다.

스무 살이 넘은 1841년, 엥겔스는 베를린에서 포병연대에 지원했고, 군 복무를 하면서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청강했다. 200여 년 전 독일에서는 학자와 자본가의 길이 다르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엥겔스는 대학준비과정, 우리 식으로 하면 고등학교쯤에 해당하는 김나지움(Gymnasium)을 중퇴하고 회사에 다닌 터였다. 군 복무를 다 마치고 나서 엥겔스가 간 곳은 산업화가 한창 진행 중이던 영국 맨체스터였다. 맨체스터에는 에르멘&엥겔스의 영국 지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영기술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이때의 경험과 연구로 나온 것이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1845)라는 역작이다.
 

 

 

카를 마르크스와의 역사적 만남

 

▲ <사진2> 칼 마르크스

ⓒ WikiMedia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첫 만남은 1844년 이루어졌다. 엥겔스가 독일로 돌아가던 길에 파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오늘날에는 이 두 사람의 사상이 ‘마르크스주의’, 잘해봤자 ‘마르크스-엥겔스주의’로 불리지만 첫 만남에서 좀 더 명망 있던 사람은 엥겔스였다. 마르크스는 대학에서 철학과 역사학을 전공한 신출내기 학자라 할 수 있었고, 엥겔스는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저널리스트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공동저술은 기여도와 관계없이 엥겔스의 이름이 먼저 표기되기도 했다. 세간의 평가를 뒤로하고 엥겔스는 마르크스 앞에서 자신을 낮췄다. 마르크스는 악필로도 유명한데, 그의 글씨를 알아보는 사람은 엥겔스가 유일했기에 다시 베껴 쓰는 조수 역할까지 해야 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엥겔스야말로 진정한 ‘대인’이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다. 그들은 책만 쓴 것이 아니라 행동에 나섰다. 그들이 살았던 시기 유럽은 ‘1848년 혁명’을 겪고 있었다.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폴란드, 헝가리 등지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자신들과 비슷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조직하고, 유럽 여러 나라의 혁명에 관여했다. 특히 군 복무를 했던 엥겔스는 독일 남부 지역에서 무장투쟁을 하기도 했다. 무장투쟁이 실패한 이후에는 마르크스와 함께 영국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다.

 

 

동지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

 

▲ <사진3>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

 ⓒ Bente Jensen


1850년 무렵 마르크스는 필생의 저작인 「자본 : 정치경제학 비판」, 다시 말해 「자본론」 집필에 들어간다. 동시에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방대한 학문적 작업을 마무리하도록 돕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선택했다. 망명 초기, 영어에 서툴렀던 마르크스의 글은 엥겔스의 번역이 있어야 했다. 학문적, 심리적 지원만이 아니었다. 재정적 어려움으로 맨체스터에 있는 방직공장으로 돌아간 엥겔스는 1869년 자신이 은퇴할 때까지, 그리고 1883년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마르크스를 물질적으로 지원했다. 이후로는 친구의 자녀들을 돌봤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혁명적이었지만, 그 생활관념은 동시대인과 비슷했다. 마르크스는 아내 예니가 귀족 집안 출신인 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젊은 시절에는 부모 속을 썩이는 흔한 아들이었다. 또한, 자신의 자녀들이 교양 있는 상류 계층의 교육을 받기를 바랐다. 맨체스터의 엥겔스와 런던의 마르크스가 주고받은 편지글에서는 돈을 부쳐달라고 애원하며 가난과 질병을 호소하는 마르크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행히 에르멘&엥겔스의 사업이 잘되었기 망정이지, 마르크스 가족의 생활비는 경영을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마르크스 가족이 엥겔스에게 끼친 경제적 부담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위험한 것으로 본 사람들에 의해 여전히 공격을 받는 부분이다. 그러나 엥겔스는 자신의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늘 후했다. 그것은 동정이 아니라 동지애였고, 엥겔스의 손길은 이민자와 사회주의자 등 당시 어려운 삶을 살던 사람들에게도 미쳤다.

 

 

세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 <사진4> 프리드리히 엥겔스

 ⓒ WikiMedia


엥겔스가 다시 활발한 정치 활동을 재개한 것은 은퇴 후였다.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유고를 정리해 출판하는 것이 엥겔스의 몫으로 남았다. 여러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은 엥겔스의 해석과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최초의 마르크스주의는 그의 친구 엥겔스가 만들고 퍼뜨린 사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엥겔스는 후두암에 걸렸고, 1895년 8월 5일에 영영 눈을 감는다. 자녀가 없던 그가 남긴 유언대로 유골은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다.

 

너무 낡은 것처럼 들리는 단어, 오늘날에는 조직폭력배들이나 쓸 것 같은 의리가 2014년에 왜 이토록 유행일까.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는 누군가가 간절한 우리들의 외로움과 불안감 때문일까.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의리가 아니라 부당한 이익을 챙기는 협잡만이 판을 치는 사회상 때문일까. 목숨을 바친 사상과 평생을 지킨 의리가 아득한 전설처럼 느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글쓴이 김희연은 _ 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사회, 문화, 경제 분야에 두루 걸쳐 갖가지 종류의 글을 쓴다. 글쓰기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어서 늘 고마운 마음을 품은 한편으로, 쓸데없는 글로 인해 웹이나 인쇄매체에 들어가는 종이와 바이트, 그리고 독자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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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과서나 위인전에도 빠지지 않는 인물을 한 명 꼽으라면 헬렌 켈러를 들 수 있다. 헬렌 켈러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시각과 청각장애를 극복한 여성이라는 점과 설리번 선생에게 말을 배운 일화들이 희미하게 기억날 것이다. 여기서는 좋은 동반자들과 인생을 보냈던 사람이자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활동가로서 헬렌 켈러의 또 다른 모습을 소개한다.


ⓒ Litchfield Literary Books' Blog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년~1968년)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삼중고에 시달렸던 장애인 여성이다. 우리가 아는 헬렌 켈러의 이야기는 설리번 선생을 만나 글을 배우는 데서 시작해 래드클리프 대학을 입학하는 데서 끝난다. 래드클리프 대학은 하버드 대학이 남학생만 받던 시절에 보완적 역할을 했던 여학교였기에, 어떤 어린이용 위인전에서는 아예 하버드대학교라 표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대부분 위인은 성인기의 업적에 따라 위인으로 불린다. 어린 시절에 천재였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위인으로 칭송받는 사람은 없다. 헬렌 켈러는 ‘미수(米壽)’라고 하는 88세까지 살다 갔다. 60년이 넘는 그녀의 진짜 인생은 어디로 갔을까. 비장애인의 일방적인 시선이나 학벌 중심 사회의 편견도 버려두고, 우리가 몰랐던 헬렌 켈러의 인생을 따라가 보도록 하자.



인형을 손바닥으로 느끼다


ⓒ New England Historic Genealogical Society


헬렌 켈러는 1880년 미국 앨라배마 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서 H. 켈러(Arthur H. Keller), 어머니는 케이트 애덤스 켈러(Kate Adams Keller)였다. 켈러 부부가 아이를 낳았을 때, 헬렌은 평범한 아기였다. 그러나 생후 19개월째에 성홍열과 뇌막염에 걸려 뇌와 위에 급성 출혈이 일어났다. 잠깐 스쳐 지나간 병이었지만 이때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가지게 된다. 그녀는 다행히 한집에 사는 요리사의 딸 마르타 워싱턴과 어울리며 자랐다. 마르타가 수화를 이해할 수 있었던 덕에 일곱 살 무렵에는 수십 가지의 수화를 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마르타와의 소통이 헬렌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켈러 부부는 딸의 장애를 알고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장애인 교육에 관한 책을 읽고, 전문가들을 만나러 다녔다. 장애는 고칠 수 없지만 그것을 딸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비장애인과 다름없이 교육하기로 결정한다. 수소문 끝에 펄킨스 시각장애학교를 졸업한 앤 설리번(Anne Sullivan, Johanna Mansfield Sullivan Macy, 1866년~1936년)을 가정교사로 받아들인다. 스무 살의 설리번 선생이 일곱 살의 헬렌을 만났고 둘은 50년 가까이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 설리번 선생은 인형을 선물하고 헬렌 손바닥에 인형이라는 뜻의 철자 ‘doll’을 적는 것으로 교육을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는 주변 사물들의 흐릿한 윤곽을 더듬으며 철자를 하나하나 손바닥으로 배웠다.

ⓒ Litchfield Literary Books' Blog


여기까지가 흔히 아는 헬렌 켈러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영화 <미라클 워커(The Miracle Worker)>의 인기가 큰 몫을 했다. 헬렌은 대학 시절인 1903년 「내가 살아온 이야기」라는 자서전을 썼다. 이것을 바탕으로 1959년 연극 <미라클 워커>(1959)가 나왔고, 그녀의 사후에는 이 연극을 각색한 동명의 영화가 1979년 상영된다. 영화는 TV용으로 다시 만들어져 1979년과 2000년에 방영되었다. TV영화는 우리나라 방송에서도 이따금 틀어주곤 한다.


동반자들의 헌신적인 조력


설리번 선생의 끈질긴 노력이 유명해지는 바람에, 마치 헬렌 켈러가 집에서만 교육받은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쉼 없이 정규교육을 받았다. 1888년 만 여덟 살이 되자 설리번이 다녔던 펄킨스 시각장애학교에 등록했고, 6년 후인 1894년에는 라이트 휴머슨 청각장애학교와 호레스 만 청각장애학교가 있는 뉴욕으로 이사했다. 그 후 케임브리지 여학교를 거쳐 래드클리프 대학교에 다닌 것이다. 래드클리프를 졸업할 때 영어, 독일어를 포함해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설리번은 헬렌과 늘 동행했고, 교사로서가 아니라 동료로 남았다. 설리번의 남편 존 메이시까지 세 사람은 시각장애인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죽는 날까지 함께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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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부터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설리번 선생은 1936년에 사망했다. 1914년부터 헬렌의 곁을 지킨 사람은 폴리 톰슨이었다. 처음에 톰슨은 집에서 그녀를 돌보는 역할로 고용되었으나 점차 시청각장애인에 대한 이해를 넓혔고 마침내 헬렌의 비서가 된다. 40년 가까이 그녀의 곁을 지켰고, 설리번 선생 이상으로 헬렌 켈러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1957년 톰슨이 발작으로 몸져눕자 헬렌은 위니 코베리라는 간호사를 고용했다. 톰슨을 돌보기 위한 일이었지만 1960년 톰슨이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도 코베리는 계속 남아 그녀를 돌봤다. 헬렌의 마지막 10여 년은 코베리가 함께한 것이다.



여성, 노동자, 장애인과 함께한 인권운동가


ⓒ Litchfield Literary Books' Blog


헬렌 켈러의 인생 초반 20여 년보다 60여 년의 중후반이 거의 가려져 있던 이유는, 그녀의 직업이 인권운동가였기 때문이다. 회복할 수 없는 장애를 입은 미국 사회의 억압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어떤 이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헬렌은 전 세계를 다니며 민주주의, 여성주의, 사회주의를 설파하고 실천했다. 또한, 열두 권의 책을 쓴 작가이자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훌륭한 연설가이기도 했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3년 후, 미국은 뒤늦은 참전을 선언한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독일에 선전포고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우자 헬렌 켈러는 반발하고 나섰다. “(미국 백인들이) 수많은 흑인을 학살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지배자는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녀야말로 평생을 여성의 선거권과 참정권, 노동 인권, 반전과 평화, 사형제 폐지, 인종차별 철폐,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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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의 사회운동은 전쟁을 옹호하고 차별을 조장하는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다. 이런 사람들은 장애인에 대한 왜곡된 편견을 그대로 드러냈다. 대표적인 비난은 ‘그녀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민주사회의 시민이 자신의 주권을 행사할 때 배후 조종자가 있을 것이라 매도하는 경향은, 1900년대의 미국도 지금의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체적 장애보다 사회의 장애를 극복하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였던 헬렌 켈러. 헬렌은 1968년 정말로 눈을 감는다. 1961년부터 뇌졸중을 앓았던 그녀는 마지막까지 미국 시각장애인재단을 위해 일하고 떠났다. 헬렌 켈러는 인생의 동반자였던 앤 설리번과 폴리 톰슨 옆에 묻혔다. 그리고 눈 없이도 세상을 똑바로 보았고 청력이 사라져도 타인의 신음을 들을 줄 알았던 위대한 정신의 표본으로 우리 곁에 남았다.


ⓒ Litchfield Literary Books' Blog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보거나 만질 수 없다. 그것들은 가슴으로 느껴야만 한다.”
“혼자서는 약간의 일을 할 수 있다. 함께라면 우리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어둠 속에서 친구와 걷는 것이 환할 때 혼자 걷는 것보다 낫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는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할 수 없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글쓴이 김희연은 _ 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사회, 문화, 경제 분야에 두루 걸쳐 갖가지 종류의 글을 쓴다. 글쓰기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어서 늘 고마운 마음을 품은 한편으로, 쓸데없는 글로 인해 웹이나 인쇄매체에 들어가는 종이와 바이트, 그리고 독자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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