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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123

[에피소드] 싸리비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연다. 차디찬 찬바람이 순식간에 방으로 밀려 들어온다. 한기를 느낄 만큼의 겨울바람이지만 머리는 맑아진다. 이불을 탈탈 털고 침대보를 깨끗한 수건으로 훔쳐낸다. 간밤에 쌓였던 나쁜 덩어리가 한꺼번에 싹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이렇게 해서 과연 얼마나 깨끗해질 수 있겠느냐 반문을 하는 이도 있으리라. 그저 뭔가 묵은 찌꺼기를 긁어내는 정도라면 만족한다. 영하 10도 이하의 찬바람을 며칠 맛보고 나니 일어나자마자 창을 여는 것을 주저했지만, 오늘만은 아침 공기가 머리를 맑게 해줄 정도의 순한 바람이었다. 여전히 밖은 어둡다. 하늘에는 초롱초롱한 별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한겨울의 전형적인 풍경이 아무런 소음 없이 펼쳐지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할 뿐이다. 10여 분 지나자 .. 2020. 12. 8.
[에피소드] 안경을 벗었다 코로나19의 확진자가 1천 명을 오르내리면서부터는 인적 드문 곳을 한 시간 반 정도 다녀오는 것 말고는 외출을 삼가고 있다. 마스크만 쓰고 다녀도 안경에 성에가 끼어 고생인데, 영하의 날씨가 되니 자주 안경을 닦던지 안경을 벗어들지 않고는 걸을 수가 없다. 이틀간은 두문불출하고 안경을 벗고 다닐 코스와 인적이 드문 시간을 생각하느라 고심했다. 영하의 추위쯤이야 두꺼운 점퍼로 커버할 수 있을 것 같고, 오전 10시 반부터 12시가 인적이 드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스크를 쓰는 것은 필수고 안경은 접어 왼쪽 주머니에 넣고 길을 나섰다.시력 검사표 제일 상단에 있는 글자도 식별하기 어렵지만, 횡단보도는 보이고 움직이는 물체는 사람이니 그것만 잘 피해서 다니면 될 것 같다. 가능하면 높낮이가 없는 곳을 택.. 2020. 12. 4.
[에피소드] 처마의 길이 초등학교 시절, 주말이면 가까운 절로 청소를 하러 가곤 했다. 유명한 사찰이다 보니 1년 365일 끊임없이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많은 사람이 오고 가다 보니 사찰 주위가 쓰레기로 몸살을 앓을 수 있기에 우리 고장, 우리 유적지는 우리가 지킨다는 각오로 사명감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조를 나누고 선생님의 지휘 아래 맡은 구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절에 대한 관심보다는 청소의 목적으로 온 터라 사찰을 꼼꼼하게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무심코 마주친 것이 사찰의 처마였다. 그리고 그 처마 안에 그려진 갖가지 그림들을 보면서 새삼 놀라게 되었다. 언젠가 만화책 속에 나왔던 무시무시한 괴물들의 모습과도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왜 저런 곳에 저런 그림을 그려 놓았을까 꽤 궁금하기도.. 2020. 8. 27.
[에피소드] 신김치 봄이 되니 몸이 근질근질하다며 낚시를 떠나 버린 선배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고시원 사무실을 지키게 되었다. 올해도 1주일 동안 긴 여행을 떠난 셈이다. 하루 전날에는 이것저것 당부의 말과 함께 집에서 가져왔다며 김치통을 하나 꺼내 보이며 주방 냉장고에 넣어 달라고 했다. 주방의 커다란 냉장고에는 여전히 세 가지 반찬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선배가 가져온 김치통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냉장고 안에 있는 김치통을 꺼내어 남겨진 양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보기로 했다. 네 귀퉁이를 열어 김치통 안을 들여다보자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이 양반이 김치를 교체하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 김치만 주고 갔구먼!’ 낚시 끝나고 돌아오면 한 소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통을 깨끗이 씻고 김치 교체를 하기 .. 2020. 4. 28.
[에피소드] 도너츠 전통시장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간판도 없는 도너츠 가게가 있습니다. 마을버스가 지나는 2차선 도로와 접해 있다 보니 오고 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잘 띄는 곳입니다. 하지만 도너츠 하면 유명 프랜차이즈 업체를 떠올리고 사람들의 발길도 거기로 몰리는지라 아는 이들만 찾는 가게입니다. 정오를 막 넘어가는 시간이 되면 안주인이 예쁘게 빚은 도너츠 모양을 들고나옵니다. 협소한 가게 안에는 도너츠를 구워낼 가마솥을 놓을 자리가 없어서였을까. 인도와 맞닿은 곳에 가마솥이 놓여 있습니다. 맑은 기름으로 가마솥 반을 채운 후, 주인장의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불을 만들면 하루 장사가 시작입니다. 하얀색 반죽이 가마솥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 무섭게 노란 옷으로 갈아입고 지글지글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정확한 시계가 없어도 .. 2019. 11. 15.
[에피소드] 부채 무더운 날씨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날 지경이다. 이제 초여름인데 30도를 훌쩍 넘어 버리니, 올해 여름은 어떻게 버텨내나 걱정이 앞선다. TV를 틀어보니 유럽도 불볕더위로 몸살을 앓고 있는 모양이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온난화에 대한 경고가 불현듯 떠오른다. 밖은 한낮도 아닌데 벌써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로 가득하다. 외출은 해야 하는데 한 걸음 떼기가 겁부터 난다. 최대한 시원하게 입는다고 차려입었는데도 온몸이 화끈거린다. “빠진 거 없니?” 엄마가 다시 한번 확인 중이시다. “네.”라는 대답을 했지만 이런 더위에는 에어컨을 통째로 들고 다니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엄마는 당신께서 쓰시던 휴대용 선풍기를 쑥 내미신다. “날도 더운데 이거라도 있으면 한결 도움이 될 거야.” 갑작스러운 제안.. 2019. 7.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