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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conductor/스마트 Tip

[역사 속 엔지니어] 라이트 형제, 타고난 엔지니어 형제가 비행기를 만들다

by 앰코인스토리 - 2015. 1. 21.

2015년부터 시작되는 [역사 속 엔지니어]에서는 현재 인물이었으면 분명 엔지니어가 되었을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김희연 필자가 들려주는 역사 속 엔지니어들의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지식도 얻고 경험과 기술의 소중함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세요.

 

 

요즘 때 아니게 비행기가 화제입니다. 한 항공사 비행기가 마카다미아라는 낯선 이름의 땅콩에 밀려 회항을 했기 때문이지요. 덕분에 부유층의 비뚤어진 상층의식부터 대기업의 위기 대응 능력까지 모든 것이 도마에 오르고 있습니다. 비행기가 하늘에 제대로 뜬 지 111년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소수만 탈 수 있던 비행기가 크기도 커지고 운임도 싸지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비행기를 이용하게 된 지는 그리 오래지 않았습니다. 1903년 12월 17일 조종이 가능한 동력 비행기를 처음으로 비행시킨 사람, 라이트 형제가 일등석의 땅콩 회항 소식을 들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장난감 헬리콥터에서 인쇄기까지

 

▲ Orville and Wilbur Wright in 1905

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라이트 형제는 형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 1867-1912)와 동생 오빌 라이트(Orville Wright, 1871-1948)를 부르는 이름입니다. 유럽계 미국인인 부모 아래서 7남매가 태어났고, 네 살 터울인 윌버와 오빌은 남매를 통틀어 셋째와 넷째입니다. 1878년 형제의 생애에도, 역사적으로도 작지만 중요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성직자로 여행을 자주 다녔던 아버지가 선물로 장난감 헬리콥터를 사온 것이었지요. 이 장난감은 모양만 그럴싸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설계를 갖춘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항공 기술자 알퐁스 페노(Alphonse Pénaud)가 고안한 장치를 기초로 한, 30cm 크기의 이 장난감 헬리콥터가 만 11세의 윌버와 7세의 오빌을 사로잡았습니다. 여기까지는 기계에 관심이 많은, 흔한 남자아이들의 모습이었을지 모릅니다. 윌버와 오빌은 스스로 헬리콥터를 만들어서 가지고 놀았고, 성인이 된 이후에 이때의 경험이 훗날 비행기 발명의 불씨가 되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윌버와 오빌은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그만두게 됩니다. 대학 진학이 자연스러운 시절도 아니었고, 때마침 가족의 이사도 겹쳤으며, 두 형제 모두 학문보다는 기계 제작에 흥미가 있어서였습니다. 동생 오빌은 1889년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인쇄사업을 시작했고, 형 윌버와 함께 인쇄기를 만들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윌버도 사업에 참여하고 나서, 주간신문인 ‘웨스트 사이드 뉴스(West Side News)’를 발간하다가 신문의 이름을 ‘이브닝 아이템(The Evening Item)’으로 바꾸고 매일 냈습니다. 

 

이 형제는 참으로 한결같은 것이, 신문 내용이나 언론의 역할보다는 인쇄기라는 기계와 인쇄술에 끌렸던 것 같습니다. 신문은 몇 달 내지 않았고 상업인쇄를 주로 했습니다. 당시 형제가 인쇄했던 주간신문 가운데는 ‘데이턴 태틀러(Dayton Tattler)’가 있는데, 편집자가 시인이자 작가인 폴 로렌스 던버(Paul Laurence Dunbar)였습니다. 동생 오빌과 던버가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인연으로 잠시 인쇄를 맡은 것이지만, 라이트 형제가 공학기술이 아닌 분야에도 이바지했다면 이때일 것입니다.

 

자전거로 벌어 비행기에 투자한 형제

 

▲ Wright brothers' bicycle at the National Air and Space Museum

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오빌이 갓 스물을 넘긴 1892년 즈음에는 자전거가 대인기였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자전거를 수리하고 판매하는 회사를 열어, 1896년에 이르면서 자체 브랜드 자전거를 생산합니다. 사업을 통해 번 돈은, 이때만 해도 취미라 할 수 있던 비행 물체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장난감 헬리콥터에 이어 라이트 형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글라이더입니다. 독일사람인 오토 릴리엔탈(Otto Lilienthal)이 만든 글라이더를 신문과 잡지로 본 형제는 이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1896년 오토 릴리엔탈이 글라이더 추락으로 사망했지만, 이 사건은 라이트 형제를 좌절시키기는커녕 더욱더 비행에 관한 관심을 부채질했습니다. 이 해에는 스미스소니언 연구소(Smithsonian Institution)가 비행 분야에서 앞서 가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연구소장인 새뮤얼 랭리(Samuel Langley)가 띄운 증기 동력의 무인 항공기가 비행에 성공했습니다. 시카고에서는 엔지니어 옥바트 차누트(Octave Chanute)가 자신의 글라이더들을 시험 비행했습니다. 훌륭한 발명은 천재의 독단적인 영감이 아니라, 당대의 기술자들과의 상호 영향에 의해 탄생하는 법이지요. 당대의 분위기는 그렇게 라이트 형제를 고무시키고 있었습니다.

 

스미스소니언 연구소, 전대와 당대 엔지니어들의 자료를 모두 모아 라이트 형제는 항공공학 실험을 시작합니다. 그들이 운영하는 자전거 가게는 항공기 제작을 위한 기술을 실험하는 장소였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자전거, 모터, 인쇄기 등을 만들고 돌리며 비행기 조종에 관한 꿈을 키웠고, 1900년부터는 조종사로서의 기술도 익혔습니다. 형제의 자전거 가게에서 일하던 ‘찰리 테일러(Charlie Taylor)’는 첫 항공기 엔진을 제작한 사람으로, 라이트 형제의 이름과 함께 기억되고 있습니다.

 

▲ Orville with the 1901 glider, its nose pointed skyward; it had no tail.

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재미있는 여담은, 비행이 성공하기 전 1902년까지는 형 윌버만 시험 조종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손위라는 점을 이용해 혼자만 비행을 즐긴 것이라기보다, 만일 동생에게 사고가 날 경우 아버지에게 문책을 받는 일을 피한 것이라고 하네요. 100년 전 미국에서도 형이 동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압력은 똑같았나 봅니다. 형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형제 모두에게 좋지 않다고 하니, 육아를 하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더 재미있는 것은 동생 오빌이 조종을 하게 된 이후에도 두 형제가 같은 비행기를 타는 일은 단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또한 둘 중 하나는 비행기 개발을 이어가야 한다는 아버지 때문이었는데, 그 아들들에 그 아버지 같습니다.

 

두려움을 버리고 형제 날다

 

▲ Wright Brothers Flight, 1903

사진 출처 : War Images

 

인류 최초의 비행은 1903년 12월 17일 ‘플라이어 1호’가 한 것입니다. 3m 높이에 거리 36m, 체공 시간은 단 12초였습니다. 그러나 동력기를 단,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를 사람이 조종한 첫 사건이었고, 그 사람은 바로 라이트 형제의 동생인 오빌이었습니다. 사흘 전, 시험 비행에서는 동전 던지기로 윌버가 먼저 조종대를 잡았는데, 정작 비행이 성공한 것은 오빌이 탄 두 번째 시험 비행이었습니다. 글라이더에서 출발해 비행에 성공하기까지 라이트 형제는 무수한 실험과 비행을 반복했습니다. 형제가 돌아가며 심한 부상도 입었습니다. 그들은 다음 비행 때까지 몸이 낫지 않는 것을 두려워했을 뿐, 추락을 걱정하지는 않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개발 과정을 소개하려면 3축 조종 시스템, 무동력 비행, 무게 중심, 날개 비틀기, 양력, 풍동 등의 용어를 나열해야 합니다. 어떤 독자들에게는 무척 지루할 수 있을 이 과정은 과감히 생략하겠습니다. 이 과정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미욱한 필자보다 훨씬 더 기계공학 지식이 많으실 것이니 각자 찾아보시길 권하며 양해를 구합니다. 

 

▲ Invented and built by Wilbur and Orville Wright. Flown by them at Kitty Hawk, North Carolina December 17, 1903

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개발 과정은 라이트 형제의 인생에도 인류 역사에도 중요한 부분이며, 이들 역시 좌절을 겪었다는 점입니다. 숱한 실패를 하던 어느 날에는 형 윌버가 오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인간은 분명 날겠지만,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아닐 거야.”  

 

인간은 분명 날았고, 최초의 인간은 라이트 형제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라이트 형제에게는 비행 개발과 조종 기술이 첫 난관이었지만, 특허 관련한 분쟁도 그에 못지않게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유럽과 미국에서 항공기 개발에 나름대로 힘을 쏟고 있던 엔지니어와 연구소들은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라이트 형제를 일제히 비난했습니다. 특허에 눈독을 들였던 미군과 프랑스 기업들은 라이트 형제가 사실은 비행에 성공하지도 못했다는 소문을 내기도 했지요. 미국의 영웅이었던 라이트 형제가 각종 법정 소송에 휘말리면서,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미국 내 여론도 나빠졌습니다. 그럼에도 형제는 비밀스럽게 시험 비행에 나섰고, 비행기를 사겠다는 사람에게만 비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 Wilbur's logbook showing diagram and data for first circle flight on September 20, 1904

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의심과 분쟁의 와중에 라이트 형제는 1906년 특허권을 받아 1909년 설립한 라이트 사에 팔았습니다. 특허를 판 금액, 주식의 3분의 1, 그리고 항공기 판매에 따른 로열티가 그들의 몫이었고 윌버는 회장, 오빌은 부회장이 됩니다. 라이트 사는 공장, 사무실, 조종 훈련 학교와 시험장을 세웠습니다. 회사 설립 이후에도 특허 분쟁은 미국과 유럽에서 계속되어 제1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집니다.

 

결혼하지 않고 비행기에 평생을 바친 형제 가운데 “부인과 항공기 모두를 위한 시간은 없다.”고 한 형 윌버가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1912년 장티푸스형 열로 인해 45세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은 것입니다. 오빌은 형의 뒤를 이어 라이트 사의 회장에 올랐다가 1915년 회사를 매각하고 은퇴합니다. 평온하게 사회활동을 하며 지내던 오빌은 1948년에 눈을 감았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미국 오하이오 주 데이튼에 가족들과 함께 안장되어 있습니다.

 

1867년 윌버 라이트가 태어나기 불과 5년 전만 해도 미군은 남북전쟁에서 열기구를 사용했습니다. 오빌 라이트가 세상을 떠난 1948년에는 이미 제트 엔진이 발명되어 인류는 음속 돌파 비행에 성공해 있었습니다. 라이트 형제가 없어도 인류는 언젠가 날았겠지요. 하지만 비행기는 오늘날과 다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라이트 형제는 사후에 재평가를 받아 꿈을 현실에서 구체화해내는 인간 의지의 전형으로 오래 남아 있습니다.

 

 

글쓴이 김희연은_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자기 과시에 지나지 않는 착한 글이나 빤한 이야기를 피하려고 노력하며 쓰고 있다. 경력에 비해 부족한 솜씨가 부끄럽고, 읽어주는 독자에게는 감사하며 산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