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마지막 주 토요일로 기억한다. 삼청공원에서 ‘BOOK CROSSING’을 연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아침 일찍 신발 끈을 조여 맸다. 인터넷에서는 역을 나와서 15분 거리라고 했는데 초행길이라 묻고 물어가느라 35분이 걸렸다. 더구나 2시에 행사가 끝나야 ‘BOOK CROSSING’이 가능하다고 게시되어 있어서 공원 내를 한 바퀴 돌고는 그냥 돌아왔다.


그 뒤로 날씨가 더워지면서 실내에서 운동을 하기보다는 공원을 다녀오는 게 건강에 더 좋을 것 같아서 비가 오지 않거나 약속이 없으면 토요일이나 일요일 중 하루는 그곳을 다녀오곤 한다. 얼마 전부터 삼식이를 벗어나기 위해 아침 식사를 두유와 빵으로 해결하고 있지만, 공원을 찾는 날은 정식으로 아침 식사를 한다. 칼로리가 부족한지 12시 가까이 되면 허기가 심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7시 10분경, 배낭에 달랑 생수 한 병을 챙겨 넣고 스틱과 챙이 넓은 등산모를 쓰고서 전철역으로 향했다. 종로3가를 거쳐 안국역을 나와 재동초등학교를 지나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는 중앙고등학교까지 오르막길이다. 스틱을 짚어가며 천천히 걷지만, 등에는 땀이 흐르고 숨이 차올라 몇 번을 쉬면서 쓸데없는 걱정까지 – 등교 시간에 학생들이 고생깨나 하겠네 - 하다가도 ‘나는 늙은이고 그들은 한창때 아닌가!’로 마음을 바꾸어 먹는다. 젊어 봤으니 이 정도 경사는 ‘식은 죽 먹기’였다는 생각에 쓴웃음이 절로 나오는 것이다. 이곳을 정점으로 감사원 쪽으로 내려가면 북촌과 북악산의 경계인 삼청공원이다.


공원을 들어서니 수목원 같은 공원의 고운 속살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수목원 같지만 속살을 깊이 들어가면 수목원 분위기는 울림으로 변화하고, 산 내음과 솔 내음이 청정한 기운을 품어 내면서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져준다. 이른 시간인데도 공원 내에 힐링, 건강, 인문학으로 특색 있게 구분된 세 개의 열린 서가에서 책을 골라 읽는 중년여성도 보이고, 체력장에서는 단체체조를 하는 젊은이들의 함성 속에 나이든 이의 거친 숨소리가 건강하게 들려온다.


오늘은 큰맘 먹고 여기서 680m 거리라는 말바위 조망대를 목표로 발걸음을 옮겼으나 너무나 숨이 가빠오고 돌아가느냐 마느냐로 고심하면서 쉬다 가다를 반복했다. 하산하는 또래에게 기운을 얻어 왼쪽으로 이어지는 성곽에 손을 짚으며 오르니 37분이나 걸렸다. 별로 높지 않은 전망대에서는 저 멀리 길상사도 보이고 삼청각은 코앞이다. 서울의 중심지는 미세먼지로 탁탁해 보이지만, 이곳은 맑은 공기와 산들바람에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 이 기분에 산에 오르는 거지 싶다.


올라갈 때는 숨차게 참 오래 걸렸는데 내려오는 것은 순식간이다. 삼청공원을 나와서는 올라갈 때와는 반대 방향인 베트남대사관을 끼고 북촌 한옥마을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곳은 무엇보다 사람들이 실생활공간으로 삼고 있는 생활 한옥촌이라는 점과 수백 채가 붙어있는 것이 특색인 것 같다. 축대를 사이에 두고 뒷동네는 한옥마을이 아랫동네는 현대식 거리가 어우러져 현대와 과거의 정다운 공존을 체험할 수 있으니, 이것이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요인이리라. 한 무리의 관광객은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중이고, 그 뒤로 한복을 차려입은 모습이 예쁜 중국여성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려주었다. 베트남인들과 히잡을 두른 중동인도 사진 찍기에 바쁘다.


집에 도착하니 11시가 조금 넘었다. 보통 3시간 코스인데 전망대까지 오르다 보니 한 시간가량 더 걸렸지만, 피곤하기는커녕 상쾌한 아침이었다. 개미 쳇바퀴 돌 듯하는 일과에서 벗어나 보니, 왠지 오늘따라 즐겁고 평안한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글 / 사외독자 이종철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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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오전, 하필이면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태풍이 남해까지 다가와서 내일까지 많은 비가 오리라는 예보다. 우비를 걸치고 장화를 신고서 동생 뒤를 따랐다. 동네를 휘도니 오랜만에 보는 맨드라미며 샐비어가 반긴다.

하지만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간단한 벌초가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부모님의 쌍분을 찾아 동생이 예초기와 낫으로 깎아 놓으면, 나와 조카는 갈퀴로 끌어서 한쪽으로 모으는 일을 한다. 가까이 있는 조부 묘역까지 끝내고는 준비해간 술과 다과를 차려놓고 절을 올린다.

작은할머니 산소는 멀기도 하다. 할머니가 두 분이라 할아버지 묘를 중심에 두고 양쪽으로 떨어져 모시다 보니 그렇게 되었단다. 그냥 걷기에도 힘이 든다. 앞서가는 동생이 낫으로 우거진 잡초와 칡넝쿨을 쳐내고 가지를 자르지만 작년에 간 곳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맨다. 등산에 서툰 나는 비가 내려서 미끄러운 언덕과 바위 때문에 네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어댔다.

내려오면서 우리 형제들에게 각별했던 아주머니 묘소까지 벌초하고는, 올해가 유사라는 아저씨 댁에서 점심을 먹었다. 본동은 물론 여러 곳에서 찾아온 피붙이를 만나는 기쁨이 쏠쏠하다. 항렬은 낮지만 나이가 많은 종손을 두 손으로 잡으며 안부를 묻고 노고에 감사드린다.

오늘은 그분의 주도로 우리 씨족 중 같은 파에 속하는 30여 명이 모여 오전에는 개별적으로 2대조까지 벌초를 하고 오후에는 공동으로 60여 기의 봉분을 벌초하는 행사다. 조상들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명당을 찾아서 이 산자락, 저 산등성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해는 가지만 후손들은 죽을 맛이다. 능선을 타면서 묘를 옮겨 다니다 보니 정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이 일을 싫어하는데 신세대인 자식까지는 물려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진 게 오래전이다.

나부터는 화장을 하라고 자식에게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내는 “죽은 다음에야 어떻게 할 것인가는 자식들 마음이지, 당신이 무슨 상관이람.”이란 말을 한다. 그러고 보면 아내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일까?

집안끼리의 모임이니 뒤풀이가 없을 리 없다. 문중에서 가장 어른 집에 준비해둔 돼지 한 마리 분으로 술잔을 기울이며 그간의 궁금증을 풀어본다. 예년과는 달리 댐 공사 문제로 10년을 끌어오다가 작년에야 확정된 수몰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평년이면 9월에 하는 벌초도 보상이 시작되어 타지로 이주하는 가정이 생기면서 한 달이나 앞당긴 것이 한여름이 되었음을 미안해한다. 장손은 수몰 뒤 벌초하기의 어려움과 자금 사정으로 걱정이 태산이다.

갑작스러운 목돈에 가족 간, 친척 간에 불화가 있는 집도 있지만, 첩첩 산골인 데다 재래식 방법으로 하는 농사라 소득이 적었던 탓인지, 보상금에 만족하는 표정이다. 도시에서 퇴직을 하고 이곳에 정착한 옛친구는 만날 때마다 ‘로또 당첨된 기분’이라며 민심을 전했다. 100여 가구 중 16가구는 산등성이에 집을 지을 예정이고, 다수의 친인척도 가까운 시내로 나가서 같은 아파트에 둥지를 트는 모양이다. 다행히도 우리 동네는 수몰 지역의 최상단이라 선산은 그대로 보존되고 집만 철거되었을 뿐, 집터도 볼 수 있기에 애써서 아쉬움을 달랜 하루였다.


글 / 사외독자 이수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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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엄마와 가까운 마트에 갈 기회가 생겼다. 이것저것 살 것이 많아서 짐꾼으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엄마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집까지 걸어오게 되었는데, 마침 양말이 여러 켤레가 놓인 상점을 지나게 되었다. “양말도 사야 하는데….” 말꼬리를 흐리며 이 양말 저 양말을 훑어보셨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것이 없으셨는지 오래 머물지 않으셨다.


그리고 며칠 후, 엄마가 잘 가시던 전통시장을 지나게 되었다. 그리고 엄마의 단골 양말가게를 지나게 될 때쯤 ‘양말을 사야 하는데….’하던 엄마의 혼잣말이 떠올랐다. 지갑에서 2,000원을 꺼내 손에 쥐고 양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때는 여름이라 통풍이 잘되는 양말이면 좋겠다 싶어 발등이 시원한 양말로 몇 가지를 골랐다. “누구 주려고?” 후덕한 인상을 하신 할머니의 물음에 “엄마께 드리려고요.” 하니 “그러면 그거 괜찮아. 좋아하실 거야.” 하신다. 여자 양말은 처음 골라 보는 거라 고민이 되었는데 주인 할머니의 그 말에 꽤 안심이 되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엄마는 때마침 방문을 열고 나오셨고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양말을 건넸다. “이게 뭐야?” “양말이요. 시장 지나다 엄마 생각나서 몇 개 사 봤어요.” 까만 봉지 안에 있는 양말을 꺼내 보시며 “양말이 시원하겠는걸!” 얼굴 가득 환하게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비싸지는 않지만 선물이었음에 기분이 좋으셨을 것이고, 또 하나 엄마 마음에 드는 양말로 골라 왔다는 데에 한 번 더 기쁘셨을 것이리라.


문득 옛 생각이 떠올랐다. 나의 생일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이 많지 않았다. 어느 날, 나의 생일을 며칠 앞두고 친구 집으로 놀러 가게 되었다. 친구 부모님이 장사하러 나가신 탓에 집은 나와 친구만의 차지가 되었다. 라면도 끓여 먹고 과자도 사서 같이 먹으며 오후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친구가 대뜸 “너 생일이 며칠 안 남았지?” 한다. 전혀 예상 밖의 질문에 당황을 하면서 답을 하게 되었다. “응!” 친한 친구도 아니었기에 나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선물 줄게.” 책상 서랍을 뒤지더니 작은 물병을 꺼내 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비싼 건 아닌데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다. 오래 간직해!” “알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바지 주머니에 넣은 그 물병을 만지작만지작하며 왔다. 만지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알라딘의 요술 램프처럼 여러 번 비비고 나면 짠 하고 지니가 나타나 원하는 소원을 모두 들어줄 것만 같았다.

선물이라는 개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게 되었다. 친구한테 받았던 작은 물병이 한동안 나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듯, 엄마에게 건넨 양말도 꽤 오랜 시간 엄마에게 행복감을 가져다줄 거라 생각한다. 시대가 변하면서 비싸고 좋은 물건만이 좋은 선물로 기억되는 요즈음, 진정한 선물은 마음이 담기고 사랑을 전하는 매개체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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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간이나 처제 집에서 놀다 오는 아내를 맞으러 딸과 함께 공항에 갔다. 막내동서가 안식년을 맞았다는 소식에 일사천리로 수속을 밟아서 처가 쪽 식구 일곱 명이 켄터키주 루이빌을 다녀오는 길이다. 나이아가라 폭포와 애틀랜타를 2박 3일간씩 다녀온 것 말고는 세탁소 일을 거들면서도 하루하루가 즐거웠다니, 남다른 피붙이의 정에 놀랄 뿐이다.


그사이, 세월이 참으로 빠르다는 사실, 혼밥을 먹기에 불편할 게 없는 세상으로 변했다는 사실, 젊은 시절에는 이틀도 혼자 있기가 싫었는데 이제는 견딜 만한 세태로 변모했다는 현실이 많이도 혼란스러웠다. 거기다가 사정은 제각각이지만, 1년이면 반 정도를 지방에 내려가서 혼밥을 먹는 동기생을 둘이나 발견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나만 삼식이로 다른 세상에 살았나! 요사이 시대가 좋아진 탓인가. 그보다는 나라가 부자인 덕으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해외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게 현실이다. 어려운 시대를 몸으로 때웠지만, 이 나라에 태어난 게 자랑스럽다.


근래에 와서 우리 가족은 매년 해외를 드나든다. 올해도 제일 먼저 스타트를 끊었더니, 아들 가족이 여름휴가를 이용하여 괌을 다녀왔다. 여덟 살인 손자 녀석이 네 번째 해외여행을 다녀왔는데도 친인척 간에 별 뉴스가 아닌 나라가 된 것이 꿈만 같다. 내가 70년대에 처음으로 해외 출장을 다녀왔었는데, 그 당시엔 회사는 물론이고 동네가 떠들썩했다.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비행기를 탄 경험이 꽤 있는데도 여행객들을 보고 있자니 여전히 마음이 부푼다. 아웃도어에 가방 하나 달랑 메고 손에는 항공권을 들고 설레는 표정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 끼여 어디론가 떠나기 전의 그 기분 좋은 긴장감이라니. 뭔가를 사지 않아도 즐거운 면세점 구경과 기내식에 대한 기대감은 또 어떠한가. 다녀온 곳을 TV와 신문을 통하여 반추하는 것은 또 하나의 덤이다.


가끔 길을 오가다가 공항버스를 본다. 유독 공허한 날, 마주치면 만사 제쳐 놓고 훌쩍 올라타고 싶은 충동에 몸이 근질근질하다. 그럴 때면 집에 도착하자마자, 여행사의 긴급 모객 사이트를 뒤지며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꿈꾼다. 내일이라도 동행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는, 사람마다 개성과 사정이 다르기에 기대를 접은 지가 오래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저서 「공항에서 일주일을」에서 “화성인을 데리고 우리 문명을 관통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깔끔하게 포착한 단 하나의 장소에 가야 한다면 공항밖에 없을 것”이라고 썼다. 일상과 일탈,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낭만의 장소이자 누군가의 생업 현장이고 최첨단 항공기술이 가동되는 현대 문명의 집결지인 공항. 이번 휴가철에도 인천공항 이용객이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고 하니, 또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하긴 굳이 어디를 가지 않아도 공항 로비에 앉아 오가는 여행객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료함을 이기지 않을까 싶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목적지에 도착하여 상상을 초월하는 자연경관과 마주치거나 책으로만 알고 있던 진귀한 예술품이 눈앞에 나타나면 잠자고 있던 세포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는 기분을 앞으로도 여러 번 만끽하고 싶다. 


글 / 사외독자 이선기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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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한여름 아이들에게는 특권이 주어진다. 여름방학! 물놀이도 마음대로 갈 수 있고, 엄마와 아빠와 해수욕장도 갈 수 있으며, 시원한 계곡에 발 담그고 맛있는 수박을 먹을 기회가 주어진다. 이런 신나는 여름방학 나와 친구들은 특별한 모험을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중2가 되어 맞이한 여름방학이었다. 중3이 되면 고등학교 입시 준비로 여름방학을 책상과 씨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시간을 비교적 여유롭게 쓸 수 있는 중2의 여름방학을 이용하기로 했다. 친구 두 명과 나는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과연 무얼 해보면 좋을까, 고민에 빠졌다. 내린 결론은, 강화도 한 바퀴 완주였다. 섬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5대 섬으로 크기가 꽤 큰 편에 속했던 터라, 도보로 도는 것은 무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자전거였다. 우리 셋은 모두 동의하고 부모님의 승낙을 받아오기로 했다. 나도 부모님께 우리의 의지와 기백을 알리고 우리가 하고픈 일에 동의를 구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완강히 반대를 하셨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첫째, 2차선을 따라 중학생 셋이서 자전거를 타고 먼 곳까지 여행한다는 것에 찬성을 할 수 없고 위험이 뒤따른다는 것이었다. 둘째,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강화도 해안도로가 깔리기 전이었기에 도로 편이 녹록지 않았다. 행여 폭우를 만나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으니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우리의 뜨거운 열정이 만들어 냈던 특별한 여름방학 계획이 그렇게 사그라들어갈 때쯤, 한 친구가 이런 제안을 했다.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러 가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어떤 친구의 이름이 호명될지 귀를 쫑긋 세워 보았다. ‘ET’ 손가락으로 유명했던 친구의 이름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전학을 가서 다른 곳에서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친구. 그때야 나도 다른 친구도 그 전학 간 친구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친구였다. ET 손가락 친구의 전화번호는 자신에게 있다며 전화를 걸어보고 찾아가도 되는지 의견을 묻겠다고 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그 친구가 있는 집으로 향했다. 고맙게도 그 친구와 친구 어머니께서 놀러 오는 것을 흔쾌히 승낙하셨고, 반나절 자전거 여행으로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놓여 있어 나를 포함한 친구 두 명도 부모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완행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라고 했지만, 시골이다 보니 한 정거장의 거리는 마을 두세 개를 지나야 나오는 거리라 만만히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등하교를 위해 밟았던 페달이 그렇게 가벼웠던 적은 없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기분이 드는 것만으로도 이미 우리에겐 특별한 여름방학이 되어버렸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 때문에 평탄한 길을 달릴 때보다 두 배는 힘들었고,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 시간 동안 자전거를 타다 보니 체력이 바닥날 지경이었다. 온몸은 땀범벅이 되어버렸고, 연신 땀이 흘러내렸다. 어디 쉬어 갈 곳이 없을까 하여 여기저기 찾고 있는데, 학교가 보였다. 아담한 초등학교였다. 군 글짓기 대회에 나갔다가 들어보았던 학교 이름이었다. 직접 볼 수 있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일단 수돗가를 찾았다. 시원한 수돗물을 틀어 땀범벅이 되어버린 머리에 시원하게 물 한 바가지를 끼얹고 싶었다.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 찾은 수돗가는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살맛 난다’는 기분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수도꼭지를 열자 시원한 물줄기가 사정없이 쏟아졌다. 36. 5도 이상 뻘뻘 끓던 온몸이 빠르게 냉각되는 기분이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머리카락을 말리지도 않고 다시 길을 떠났다. 요깃거리로 가져온 초콜릿은 녹아서 흐물흐물해졌고, 어머니가 가면서 먹으라고 싸주신 달달한 참외 한 개씩을 손에 들었다. 또 한 시간 동안 쉼 없이 달렸다. 오랜 시간 동안 여행으로 말수도 줄었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자연의 향기와 꽃나무, 그리고 사람들의 풍경은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방향을 꺾어 왼쪽으로 10여 분 더 달려서 드디어 초등학교 옛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친구는 큰 길가까지 나와 반겨주었다. 시원한 얼음이 담긴 물병을 옆에 들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 특별한 여름방학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학창시절에 한 번쯤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누비는 것은 누구에게나 로망이다. 비록 전국을 달리지는 못했지만, 용기를 내서 먼 길까지 친구들과 함께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크나큰 추억이 되었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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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가 뜬금없이 "할아버지, 속담 이어가기 하자. 내가 먼저 할게." 한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 갑자기 머리가 멍멍한 게 아무것도 생각나질 않는다. "할아버지 뭐하는 거야. 심심해! 딱지치기하면 안 될까?" 꾸물대는 내 손을 잡아 끌고 작은방으로 들어간다.


여러 번 해본 숙달된 솜씨인지라 능숙하게 두꺼운 패드를 깔고 딱지를 10장씩 두 패로 나누는 손자에게 “학교서 받은 상장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가져왔냐?” 하니 며느리 가방을 뒤지더니 비닐커버 속에 넣은 상장과 금장트로피를 끄집어내어 보여준다. 표창장 1장과 상장이 2장, 그리고 공차는 소년모형의 최우수선수상이라고 찍힌 트로피가 하나다. 조금 전에 며느리가 “지난번에는 4강에 들어서 누구나 똑같은 상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4팀이 경기를 했는데 ○○네가 1등 상을 받았어요.”하더니 그 상인가 보다.


“할아버지가 기분 좋게 보았으니 상장마다 만 원씩, 4만 원을 주는 거야.”하면서 건넸더니 잽싸게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그 돈 가지고 뭐할 거야?” “저금해야지요.” “저금도 좋지만, 3,000원은 가지고 다니면서 친구가 군것질할 때 너도 사 먹는 거야. 돈 받은 것은 차 타고 갈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그 뒤로 딱지치기에다 오목 두기와 팽이 돌리기를 하다가 8시에 헤어졌다. 월요일 아침, 아들의 안부전화를 받는 아내의 목소리가 심상찮다.


“너의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잖아.” 헤어질 때 지하주차장에서 아내가 손자를 유도해서 돈 받은 사실을 모두가 알았나 보다. 다음날인 일요일, 손자가 사전 허락도 받질 않고 2만 원대의 장난감을 산 게 화근이 되어 ‘아버님 때문에 애 버릇 나빠진다.’는 불평이 있었나 보다. 그게 걱정이라면, 저금한다고 했으면 좋았을 것을.


내 할아버지는 부지깽이에게도 도움을 청한다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수확기에 놀아달라고 보채면 하던 일도 팽개치고 장독대 옆으로 갔다. 탈곡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한 그곳을 벗어나서 나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서울 봤나’와 내 겨드랑이를 부여잡고 좌우로 흔들며 ‘불무불무 불무야’를 부르면서 놀아주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라서 그 분을 잊지 못하고 있다.


손자가 나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며 시작한 것이, 설과 추석에 차례를 지내고 나서 10만 원을 묻어두고 3패로 나누어서 하는 윷놀이가 있다. 일회성 이벤트로는 손녀 생일잔치를 마치고 남녀노소가 지켜보는 가운데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벌린 딱지치기다. 이번에 야심작으로 시도한 것이 상장 하나에 선물 하나였는데, 예상치 못한 악재가 발생하여 중단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지난 토요일, 다음 달 초에 아내가 미국에 가게 되어 생일을 2주나 앞당겨 외식을 했다. 샤부샤부 요리를 맛있게 먹고 돌아오는 차내에서, 아들과 손자가 학교생활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며느리가 끼어들어서 부부간의 대화로 바뀌었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손자가 “속담처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네.” 갑작스러운 항의에 아들은 웃으면서 “아버지, 잡문 하나 쓰게 생겼네요.” 뜻도 모르면서 달달 외운 줄로만 알았는데, 그건 아날로그 세대의 착각이었나.


글 / 사외독자 이성재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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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가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특히, 치과는 가장 싫어한다. 한때는 큰 비용 때문에 주저하는 이가 많았다. 의료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라 치과에 가면 다 돈이라는 생각으로 아픈 것을 참고 참다가 결국 못 버텨서 어쩔 수 없이 가게 된다. 요즈음은 과거와는 달리 생각도 많이 달라지고 비용도 많이 절약할 수 있어, 치과에 대한 극도의 공포가 엄습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시끄러운 기계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오금이 저리는 것은 매한가지다.


한때 나는 치과와 문을 닫고 살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치과를 처음 찾았던 것이 고등학교 때였으니, 나의 치아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꼭 좋은 것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건강을 자신하던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큰 병을 진단받고 망연자실하듯, 나 역시도 심한 치통으로 치과를 찾고 나서야 나의 치아 상태를 올바로 인식할 수 있었다. 유난히 초콜릿을 좋아해서 자주 간식으로 먹었던 것이 큰 화근이 되었다. 양치질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어금니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었다. 엑스레이를 찍고 나서 결과를 알려주는 의사 선생님의 얼굴이 많이 굳어 있었다. 어금니의 한쪽 뿌리가 다 녹아 있고, 염증이 심하다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저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더욱더 문제가 되었던 것은 비용이었다. 100만 원을 훌쩍 넘는다는 말씀에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수없이 먹었던 초콜릿들이 원망스럽기까지 느껴졌다. 어금니 한쪽 뿌리가 없어지기 전에 빨리 치료를 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 소견을 내놓은 터라, 그 해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치과를 찾아야 했다. 어금니를 최대한 살려 보겠다는 의사선생님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힘들고 아팠지만 견뎌낼 수 있었다.


이후 10년을 버텨 내고는, 드디어 어제 어금니와 이별을 고하게 되었다. 인공 뼈를 삽입하다 보니 큰 힘을 줄 수 없어 되도록 반대편 어금니를 사용하여 음식물을 씹기 위해 노력했고, 딱딱한 음식을 최대한 피하려고 애를 썼다. 처음 의사선생님은 오래 쓸 수는 없을 거라는 의견을 피력했지만, 나름대로 있는 것을 최대한 오래 쓰기 위해 노력한 덕분이었다.


머지않아, 어금니가 빠진 빈자리에는 임플란트 인공치아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거라는 얘기를 해주셨다. 부모님이 주신 신체를 절대 자를 수 없다며, 머리카락마저도 자르지 않고 소중히 간직했던 그 선조들의 마음이 어금니를 뽑으면서 그 서운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남은 이들을 최대한 잘 보전하여 이가 아파서 치과를 찾는 일이 없도록 가슴속 깊이 새겨본다.

 

/ 사외독자 한상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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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7.24 13:35 Address Modify/Delete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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