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하다가 이 나이가 되었지만, 오늘도 그러다가 10분 늦게 63빌딩의 프런트에 도착했다. 마음이 급했지만, 승강기 앞에서 중견 탤런트 임○○ 씨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80대 부부를 에스코트하여 57층으로 오르던 그분은 깔끔하게 생긴 외모답게 친절하게도 58층을 눌러주고 축하 인사도 해주었다.

사돈과 인사를 나누기도 바쁘게 사회자는 잃어버린 10분을 되찾으려는 듯 단상의 의자로 몰아세웠다. 우리 앞으로는 회갑연이나 돌잔치에서 익히 보아왔던 과일과 케이크 등 장식품이 사진발을 좋게 받도록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머리와 옷매무새를 챙길 시간도 없이 사진기 셔터를 누르는 소리는 요란하고, 난생처음으로 권총처럼 생긴 것으로 불을 붙이고 끄느라 여러 번을 반복했다. 축하 노래를 듣고 자식들의 삼 배도 받았다.

손주 차례가 되니 그새 지루했던지 머리를 숙이고 몸을 꼬면서 “절을 어떻게 하라는 말이야.”며 며느리 주위를 맴돈다. 어르고 달래서 겨우 한 번의 절을 받았다. 사회자가 말하는 삼 배는 ‘일 배는 낳아주어서 고맙다는 뜻이고, 이 배는 키워주신 데 대한 보답이며, 마지막은 효도하며 모시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절한 후에 받은 축하인사 답례로 아들 부부에게는 “100살이 아니라 120살까지는 사시라고 해야지.”하고, 딸 부부에게는 “손주 하나 안겨주면 더 바랄 게 없다.”고 했다. 가끔 아내에게 “오늘 밤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는데, 120살이라니.” 앞으로 두고두고 책잡힐 생각을 하니 후회막급이다.

올 초에 며느리가 “아버님, 칠순 준비를 어떻게 할까요?” 묻기에 “여행 경비는 한 푼도 안 받을 것이니 잔치는 30명을 생각하고 호텔에서 하는 게 좋겠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100시대라고 해서 그런지 칠순 잔치를 하는 분들이 적어서 사돈 부부만 초청한 조촐한 행사가 되었으나, 태생이 음주와 가무에는 끼도 흥도 없는 몸이라 나쁘지는 않다. 아들은 서울과 세종시를 오가는 피곤한 몸이라 행사를 준비하기에는 무리고, 며느리도 직장과 애들을 챙기느라 시간이 부족할 터인데도 명소를 골랐으니 고맙고 사랑스럽다. 사돈께서 “칠순을 축하하며, 건강과 장수를 위하여!”를 외치면서 와인 잔을 부딪치며 중식을 시작했다. 주식으로는 스테이크와 바닷가재가 나왔다.

흥겨운 분위기 속에 연회를 즐기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내리던 비가 그치고 맑게 갠 하늘 아래 비친 한강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면서, 손자손녀와 태권도 겨루기를 끝으로 추억으로 남을 한 페이지를 접었다.


글 / 사외독자 이선기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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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딸랑! 주머니 안에서 백 원짜리들이 부딪치면서 소리를 내고 있다.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발걸음과 보조를 맞추듯 울리는 소리는 꽤 상쾌하다. 지금은 무겁다는 이유만으로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동전이지만, 주머니 가득 100원, 500원짜리가 있으면 행복감이 절로 생길 때가 있었다. 지금이야 100원짜리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버스를 한번 타려고 해도 100원짜리 가지고는 엄두를 낼 수 없고, 슈퍼에서 과자 한 봉지를 집으려 해도 100원짜리 한 주먹 가득 계산대 점원에서 내밀어야 한다.

하지만 100원짜리도 한때 참 귀하신 몸일 때가 있었다. 1원, 5원짜리 동전이 있을 때는 더더욱 큰 형님 대접을 받기 일쑤였다. 어린 꼬마들에게 100원짜리 서너 개면 종일 오락실에서 진을 칠 수 있었다. 엄마, 아빠 심부름을 하고 받은 몇 개의 100원짜리는 문방구에 가면 많은 것을 해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사야 할지 사방을 둘러보고 또 둘러보면, 조바심 난 문방구 주인아주머니는 “요즈음 인기 있는 로봇이다.” 은근슬쩍 들이밀었고 그 짧은 순간 갈등과 고민이 반복되었다. ‘과연 뭘 사지?’ 미적거리는 것이 미안해서 더 미루지 못하고 주인아주머니가 골라준 장난감을 집고 나서 100원짜리 몇 개를 건넬 때면 끝없이 아쉬움이 파도처럼 밀려 왔다. ‘내 돈 100원짜리….’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고 학년이 올라가면 엄마는 우리 사 남매에게 연초에 선물을 주셨다. 빨간색 돼지저금통. 큰 돼지저금통은 꽉 채우는 게 지루할 수 있다는 소신이 있으신 엄마 덕분에 중간 크기의 돼지저금통을 선물로 받곤 했다. 가장 먼저 돼지저금통을 꽉 채운 사람에게는 100원짜리 몇 개의 보너스도 있을 것이라 하셨다. 지폐가 귀했던 때라 대부분이 100원짜리 동전이 주를 이루었다. 처음 100원짜리가 돼지저금통 바닥에 떨어지면 참 큰소리를 냈다. “땡그랑! 땡그랑!”

언제 저 넓고 깊은 저금통 안을 꽉 채우지! 한숨이 절로 나오기도 했지만, 명절 때 받은 용돈을 넣고, 심부름으로 받은 100원짜리 넣고, 참고서 사고 남은 동전을 넣다 보니 돼지저금통도 점점 배가 불러 올랐다. 돼지저금통을 반 정도 채우고 나서는 흔들어 보면서 참 기뻤던 때도 있었다. 동생 몰래 동생 돼지저금통을 보며 어느 정도 채워졌나? 눈대중을 해보기도 했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가을바람이 불어올 때쯤 가득 찬 돼지저금통의 배를 가르게 되었을 때 벅차오르는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쏟아지는 동전들을 보며 큰 부자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참 열심히 노력했던 땀과 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사 남매의 가득 쌓인 동전들을 보면서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셨던 엄마의 얼굴은 아직도 선하다.

이제는 동전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편의점에서도 남은 동전은 포인트로 적립되고, 모바일 페이가 일상화되면서 동전을 딱히 지니고 다닐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으면 뭔가 쥘 수 없는 허전함은 남아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땡그랑 울리던 그 동전들의 소리는 자꾸만 그리워진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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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륜과 경험이 도움이 된 여행이었다. 쿠알라룸푸르공항은 여러 번이나 해외여행을 다녀온 우리 부부에게도 당혹스러운 곳이었다. 기내를 나서자, 반겨준 곳은 면세점이었다. 그곳을 지나니 드램이 기다리고 있어서 출국장으로 향한다는 사인을 확인하고서야 탑승을 했고, 내리니 다시 면세점들이었다. 걱정하면서 Luggage Claim이라는 글자를 따랐더니 드디어 입국장이 나왔다.

늦었다는 미안함으로 가이드를 만나니 열여덟의 일행 중 선착이었다. 30분이 지나서야 두 명이 합류했고, 한 시간이 지나도 20대 아가씨 두 명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가이드가 다가오더니 “짐이 보이지 않아서 찾는 중”이라기에 “싱가포르로 짐을 부쳤을 것”이라고 했더니 그게 정답이었다. 1시간 반이나 늦은 탓에 백만 불 야경이라고 선전한 ‘푸트라 자야’ 감상시간은 대폭 축소되었고, 환상적이라는 ‘반딧불 축제’도 이미 문을 닫은 후였다.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고속도로와 역사도시인 ‘말라카’를 왕복하는 네 시간여 정도 야자수 사촌인 팜나무가 뒤덮인 숲속이어서 힐링의 시간이었다. 농가도 농작물도 볼 수가 없다는 것이 의아했는데, 이 나라에서 농작물에 종사하는 인구는 10% 미만이란다. 석유 매장량이 많아서 개발도상국이라지만, 화장실마다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물도 잘 안 나와서 우리보다 한참이나 뒤졌음을 알렸다. 경주와 비견할 만하다는 고도 ‘말라카’ 여행에 하루를 할당받았지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차이나타운은 여느 나라와 다를 바 없었고, 식민지 시대의 건물들도 작고 낡아서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해, 못내 서운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다 힌두교 최대성지인 바투동굴에서는 50도 경사의 272개의 죄악을 고해하며 걷는다는 계단을 오르내렸고, 눈에 담은 거대한 황금동상도 신비했지만 웅장한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내부에서 작은 구멍을 통해 올려다본 햇살이 경이로워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힘든 계단 오름을 원숭이가 여행객의 콜라 캔을 낚아채 가는 묘기(?)를 보여서 피로를 잊기도 했다.

이 나라의 가장 긴 교량과 트윈타워를 비롯하여 대형 빌딩 대다수를 국내 5대 건설사가 건축했고, 네일아트를 포함한 미장원이 부유한 화교여성들을 매혹하고 있으며, 수학학원이 성업 중이라 한국인을 존중한단다. 왕궁 뒤로 보이는 가장 비싼 아파트의 주인도 교포라며 가이드는 자부심에 넘쳤다.

One Day Tour인 싱가포르는 이곳과는 많이도 달랐다. 말레이시아가 정적이라면 이곳은 동적이었다. 기내에서 내려다본 해상에는 무역선들로 가득 찼고, 수많은 나라의 국적기들을 보면서 무역과 관광업의 나라임을 한눈에 인식할 수 있었다. 하늘을 찌르는 고층건물이나 아파트도 같은 형태의 모습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인답게 축구장 50배 면적에 60만여 종의 식물이 있다는 Botanic 정원과 37m 높이의 Merlion 상이 ‘고요한 동방의 나라’에서 온 여행객의 기를 꺾어 놓았다. ‘Jurong 새 공원’은 세계 최대 규모의 새 테마파크로 400여 종 5,000마리 이상의 새가 서식하고 있다지만, 모노레일을 타고 도는 중에 앵무새와 홍학만 눈에 띄어서 마음이 편했다. 야심작이라고 선보인 ‘All Star Bird Show'는 에버랜드와 비교하면 한 수 아래였다. 화려한 야경 투어는 싱가포르의 부유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원주에서 동참한 50대 부부가 실수를 거듭하는 것을 목격하고 여행 팁을 알려주었더니 식사 시 테이블도 공유하고 헤어질 때는 전화번호를 물으면서 “원주로 한번 오세요. 거하게 대접하겠습니다.”로 우리 부부를 즐겁게 했다. 아직도 패키지 투어로 다른 나라, 다른 마을로 떠나는 일차적인 여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자신을 더 이해하고 누군가의 마음을 더 깊이 탐험하기 위해, 관계와 사람으로 떠나는 인간다운 장기간의 자유여행을 하고 싶다.                              


글 / 사외독자 이종철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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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을 읽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에서 대출받은 책으로 대출기한이 가까이 다가오다 보니, 겸사겸사 도서관에 오게 된 것이다.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것만 하다 보니 열람실을 굳이 찾을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책을 읽기 위해 찾은 열람실은 생각한 것보다 아름다웠다. 한동안 뚝딱뚝딱 소리를 내며 공사를 했었는데, 정말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열람실의 이미지라면 긴 다리 책상에 칸막이와 딱딱한 나무 의자가 있는 공간이었는데, 카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모습이었다. 좌석표도 따로 없어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노트북을 켜고 자신의 공부에 몰두하였다.

커다란 카페에 홀로 앉아 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 음악을 들으며 노트북에 푹 빠져 있던 친구의 모습이 참 아름답게 보였던 기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문을 열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찾아보았다. 중앙 약간 왼쪽에 탁자와 의자가 비어있었다. 대부분 홀로 공부를 하기 위해 찾다 보니 1인 테이블이 더 인기 있는 모양이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오리진」 2권 하반기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노트북 키보드 소리와 책장을 넘기는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고요한 적막을 수시로 깰 뿐이었다.

집에서 읽을 때보다 몰입도가 높아서인지 읽는 속도를 빨리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모든 것을 잊고 책에만 푹 빠져 있을 수 있었다. 한 30여 페이지를 남겨두고 책에서 눈을 떼었다. 같은 자세로 장시간 있다 보니 어깨와 허리가 결리는 기분이 들어 열람실을 잠시 빠져나온 것이었다.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했고 어둠이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복도에는 학교를 파하고 도서관을 찾은 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계단을 오르는 혹은 내려가는 학생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문득, 공부에 열정을 갖고 대들던 학창시절이 생각났다. 그때는 도서관이 놀이터이다시피 했다. 거대한 포부와 희망을 품고 주말이면 가까운 도서관을 찾아 도서관 문이 닫힐 때까지 정말 열심히 공부했었다. 친구와 안 풀리는 수학문제 하나를 가지고 이리저리 풀어보면서 대여섯 시간을 씨름하면서 고민고민을 하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많은 학생 틈바구니에서 마음속으로 좋아하던 여학생과 마주치며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아무 말 못 하던 그때가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순수했을 때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도서관 매점의 라면은 유난히 맛이 있어서 친구보다 한 젓가락이라도 더 먹기 위해 뜨거운 라면을 쉼 없이 흡입했던 그 결기는 지금 돌아보면 부럽기만 하다. 세월이 지나 도서관의 풍경은 많이 변해 버렸지만 자신과의 싸움을 펼쳐 보고자 하는 열정과 열의는 지금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아무리 어려웠던 순간 속에서도 도서관을 찾으면 새로운 힘이 샘솟았고, 꿈 하나만을 좇아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행복감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느낄 수 없었다.

2권의 책을 다 읽고 기분 좋게 반납을 하고 도서관 문을 나섰다. 두 권의 책을 비워낸 가방은 새털만큼 가벼웠다. 하지만 마음만은 지식으로 가득 채울 수 있었고, 도서관에 대한 추억으로 더 많은 행복을 대출받아 나올 수 있었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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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의 일이다. 아내한테는 하루가 멀다고 안부전화가 오지만, 내게는 그런 행운이 드문 편인데 아들한테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 세종시에 집을 계약했습니다. 손자도 같이 가기로 했고요.” “수고했다. 이제 정상으로 돌아가는구나!”

아들 가족이 여러 조건이 갖추어졌다는 지역에 살고 있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황금기를 헛되게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아들은 세종시에서 출퇴근하고 며느리는 서울 소재 금융회사에 다니다 보니, 손자 손녀를 돌보아줄 사돈댁 옆에서 엉거주춤 사는 것이 벌써 7년 차다.

재작년 말에 며느리가 공채 합격으로 아들이 있는 곳으로 출퇴근하게 되었다. 며느리의 합격은 그 분야에선 드문 일로 잠시나마 검색어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는지라 불편과 어려움이 뒤따랐다. 아들이야 여전히 주말부부 신세지만, 며느리는 새벽 6시에 통근버스를 타거나 7시에 출발하는 SRT를 이용하느라 고생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가까이에 산다고는 하지만, 사부인도 같은 시간대에 며느리와 맞교대를 해서 손자 손녀를 돌봐야만 했다. 처가 신세를 지는 게 우리 때와는 다르다지만, 그분이 받는 피곤과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우리라.

언제인가 라디오에서 40대의 흙수저가 한 말이 생생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봐도 대학을 나왔다면, 아버지 세대가 역사상 가장 행복할 것 같아요. 소수인지라 주위의 부러움도 받았을 거고, 혼자 벌어도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었으니까요. 우리는 그런 조건을 다 갖추고 맞벌이를 해도 허겁지겁하는 세대 아닌가요. 미래는 더욱더 불안하고요.” 휴일도 없이 뼈 빠지게 일한 우리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으니 얼핏 생각해선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아파트를 재계약할 시기가 다가오고 손자는 안 가겠다고 버텨서 고민 중인 시간이 꽤 길었나 보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손자는 외할머니가 할마 역할을 해주기로 하고 손녀만 데리고 이주하는 것으로 알려와서 가슴 한쪽에는 커다란 돌덩이가 걸려있었다. 그러던 것이 신학기를 한 달여 앞두고 손자가 “가 보고 안 좋으면 다녔던 학교로 되돌아갈 거야.”라는 조건부 동참이라지만,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희소식이다. 이주 예정인 아파트를 검색해보았더니 손자가 다닐 초등학교는 횡단보도만 건너면 되고, 손녀는 며느리가 출근길에 데려가서 1층에 있는 유치원에 맡기고 퇴근 시에 동참한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초등학교 홈페이지에는 ‘학부모 돌봄 모임’이 잘 구성되어 있어서 맞벌이에게도 적잖은 도움이 될 것 같아 한결 마음이 편하다.

다음에 만나면 며느리에게 이 말만은 꼭 해주고 싶다. “그동안 고생 많았고 대견한 며느리를 두어서 자랑스럽구나. 사부인에게도 우리 부부는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전해라.”


글 / 사외독자 이수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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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다인과 채아라는 예쁜 조카가 있다. 한 명은 초등학생 또 다른 한 명은 유치원생. 부모님들이 가장 예뻐할 때가 그 시기란 말처럼, 정말 순수 그 자체의 아이들이다. 가끔 얘기를 들어보면 세 살 터울의 언니와 동생답지 않게 잘 싸운다고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끔찍이 아껴 줄 때가 많다. 며칠 전 대전에 갈 일이 있었다. 이 두 아이에게 무슨 선물을 해줄까 고민하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이 났다. 때마침 동생 내외가 시내로 쇼핑을 하러 나가야 한다고 하기에 자연스레 두 아이를 봐주게 되었다. 자주 보는 얼굴이 아니라 서먹서먹한 시간이 10여 분 흐를 때쯤, 아이 둘을 모아 놓고 옛날이야기를 해주게 되었다. 낯설어 말도 붙이지 못하고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기를 반복하던 아이들은, 나의 얘기가 시작되자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금세 바뀌었다.

“옛날옛날에 다인이와 채아라는 자매가 엄마 아빠와 행복하게 살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네 식구는 야외로 캠핑을 나가게 되었지요. 엄마와 아빠가 짐을 푸는 사이, 두 아이는 밖으로 나가게 되었답니다. 따스한 햇볕이 비추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새들, 나무들, 그리고 시원한 바람이 두 아이를 무척 행복하게 만들었지요. 그런 와중에 다람쥐와 마주치게 되었고 다람쥐를 따라 달려가던 아이들은 길을 잃어버리게 되었어요. 날은 점점 어두워져 사방이 깜깜해질 때쯤, 아이들은 불빛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버려 몹시 배가 고팠던 자매는 그 집으로 향했답니다.”

어느새 다인과 채아는 이야기 속에 쏙 빠져 버린 듯 나의 이야기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한 호흡 쉬고 뜸을 약간 들이자 “그래서 삼촌 어떻게 되었어?” 채아가 졸라댔다.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하면서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집은 과자와 초콜릿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벽으로 된 과자를 잘라 먹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문이 슬그머니 열리고 안에서 누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누구냐? 코가 큰 한 할머니가 나왔던 것이었습니다.”

다인이가 물었다. “삼촌, 그 할머니가 혹시 마귀할멈이야?” 채아도 거들었다. “까만 망토의 할머니 맞지?” “그래, 엄청 무서운 할머니. 채아와 다인이는 막 울었을까? 안 울었을까?” “음, 나는 울었을 거 같아.” 겁이 많은 다인이가 대답했다. 이야기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갔다.

“할머니가 큰 가마솥 물을 끓이고 있는 틈에 용기 있는 다인이가 마귀할멈을 펑 차고 나서 채아와 다인이는 손을 잡고 그 집을 빠져나왔데요.”

“와! 만세!” 아이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헨젤과 그레텔의 이야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삼촌이 해준 얘기가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다인이와 채아에게 물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느낀 점 하나씩 말해봐.” 채아가 먼저 말을 했다. “응, 발차기 연습을 열심히 하자.” “그래, 매일매일 발차기 연습하기로 하자. 약속!” 채아는 빙그레 웃었다. “그럼 다인이는?” 초등학생인 언니답게 “어디 나갈 때는 엄마 아빠한테 말하고 나가야 해요.” “그래, 엄마아빠가 걱정할 수 있으니까.” 짝짝짝 손뼉 치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지금은 중학생이 된 조카에게 유치원 시절에 처음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를 현대판으로 각색해서 들려준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아이가 그 이야기를 자신의 아빠에게 그대로 얘기해줬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헨젤과 그레텔을 어린 조카들에게 들려주는 이유는, 둘이 힘을 모으면 어떤 역경과 고난도 이겨 낼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어서다. 불투명한 미래를 안고 살아가야 하지만, 형제, 남매 혹은 자매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의지한다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게 하는 것이다. 옛날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아이들은 나와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다. 다음에 만나면 좀 더 재미있는 얘기를 해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어본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이미지 출처:  wikimedia.org  (by. Arthur Rackham, <Hansel und Gre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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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시즌이다. 이맘때면 초등학교 졸업식 때 진학하지 못하는 서러움으로 눈물바다를 이루었던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로 이어지던 졸업식 노래가 이별의 노래로 둔갑하였고, 나는 그때를 못 잊어서 부지불식간에 흥얼거린다. 아울러 새로운 동문을 맞이하는 동창회장님께서 “부모와 마찬가지로 모교도 바꿀 수 없는 인연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나 역시 사회생활을 영위하면서 숱하게 부딪히는 난제들을 동문이라는 울타리를 치고, 더 쉽게 편하게 해결할 수 있었음을 여러 번이나 경험했다.


과거 타이어 회사에 근무하던 중, 종합상사를 꿈꾸는 집안 형님의 부름에 의해 회사를 옮겼다. 예기치 못한 과분한 대우를 받았지만 이직한 지 49개월 만에 무리한 확장을 이기지 못하고 부도가 났다. 몇 년을 방황하다가 중견 자동차 부품 회사의 품질담당 부서장으로 입사했다. 생산품목이 전장품이라 불량이 나면 직접 운전자에게 영향을 주는지라, 타사 제품보다 사소한 불량이라도 클레임이 제기되는 횟수가 잦았다. 입사 한 달도 못 되어서 기다렸다는 듯이 자동차 회사로부터 품질문제 건으로 불려가게 되었다. 이번 건은 2년 전부터 반복되는 문제로 완전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아 소비자의 불만이 이어지는 상태였다.


며칠에 걸쳐 세운 대책이었지만, 잔뜩 긴장해서 약속된 회의실에 도착했다. 10여 명이 두 시간이나 얼굴을 맞대고 대책을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고 을의 처지에서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데, 주관 부서장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게 누군가! 공식적인 자리라 정식인사는 못 했지만 눈인사를 나눈 그는 군에 입대하기 전 1년여를 같은 하숙방에서 희로애락을 나누던 3년 후배였다. 회의 결과, 우리가 제시한 대책에 문제가 없음이 판명 나고 그대로 수용하기로 하였다. 물론 우리 측에서도 전보다는 빠르고 알찬 대책으로 대응을 했다.

전공이 달라서 학창시절에는 얼굴만 기억할 뿐인 졸업동기 P학형은 “솔직히 말해서 지방대학 출신들이 서로를 배려하지 않으면 누가 할 거냐?’면서 중역실을 개방하여 커피타임도 갖고 식사도 나누면서 가족, 학교, 직장관계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주고받았다. 지금도 가끔 전화로 서로가 ‘눈물 나게 고마운 동문’이라고 추켜세운다. 그도 차량판매 캠페인 때 도와주었던 일을 두고두고 고마워했다.


나는 행운아였다. 자동차 회사뿐만 아니라 품질마크 등을 취득할 때도 인연들을 만나 해결책을 찾았다. IMF로 그 회사를 나와 소기업 부사장으로 경영을 책임지고 있을 때도 동문의 열성과 후원 덕분에 상당한 물량을 거래할 수 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 돕고 돕는 마음이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지금도 그러한 인연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글 / 사외독자 이종철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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