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생전 릴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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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깃을 파고드는 바람과 더불어 마음이 괜스레 시린 늦가을이 왔다. 빡빡한 일상에 얼마 남지 않은 감수성을 쥐어짜서 시라도 한 수 읊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시를 즐기지 않아도 누구나 알만한 두 시인의 작품을 잠시 인용해 본다. 194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2014년 현재도 한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윤동주와 백석이다.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윤동주 ‘별 헤는 밤’ 부분)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 초승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 그리고 또 ‘프랑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부분)


눈치 빠른 독자라면 짐작했겠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다. 백석과 윤동주뿐 아니라 김수영, 김춘수와 같은 한국의 유명 시인들이 아스라이 멀게 불렀던 이름, 시인이자 작가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내 피가 당신을 실어 나를 거예요."


1875년, 체코 프라하가 아직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보헤미아왕국이던 시기에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이름은 ‘르네 카를 빌헬름 요한 요세프 마리아 릴케(René Karl Wilhelm Johann Josef Maria Rilke)’. 


르네의 부모는 서로 극과 극이었고 아이가 열 살이 되기 전에 이혼했다. 어머니 조피아는 일찍 죽은 첫딸을 그리워한 나머지, 아들 르네를 여자아이처럼 키웠다. 한편 아버지 요세프는 아들이 자기 대신 군인으로 성공하기를 바랐고, 그 바람대로 르네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훗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되는 르네의 시를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군사학교는 그의 감수성에 어울리지 않았다. 이 무렵부터 르네는 괴로움을 밑천 삼아 시를 썼고, 건강상의 문제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설득해 학교를 그만둘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프라하 대학 등지에서 문학, 역사, 미술 관련한 강의를 들었다.


▲<사진 2> 1900년 경의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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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본격적인 작가 생활은 루 살로메와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이름도 그녀가 권유한 것이었다. 1897년, 청년 릴케는 14살 연상의 여인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부인과 사랑에 빠진다. 루 살로메는 그녀 자신도 작가이자 정신분석학자로서 지성을 갖추고 있었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구혼을 거절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루 살로메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교류는 두 사람 각자의 결혼생활과 관계없이 오래도록 이어진다.


내 눈을 감겨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어요. / 내 귀를 막아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들을 수 있어요. /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 입이 없어도 당신을 부를 수 있어요. / 내 팔을 꺾어요. 그래도 나는 손으로 잡듯이, 당신을 심장으로 잡을 거예요. / 내 심장을 멎게 하세요, 그러면 뇌가 고동칠 거예요. / 당신이 내 뇌에 불을 지르면, / 그때는 내 피가 당신을 실어 나르겠지요.

(라이너 마리아 릴케, 루 살로메에게 헌정한 ‘기도시집’ 중에서)


▲<사진 3> 독일 라이프치하에서 출판된 <기도시집>의 표지 (릴케의 종교적 치열성을 담고 있는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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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싼 감정에서 벗어나 자연 앞에


릴케는 루 살로메 외에도 평생에 걸쳐 여러 여인과 연애를 했다. 아내와 딸도 있었다. 1901년 릴케와 결혼한 클라라 베스트호프는 화가이자 조각가였다. 릴케도 한때 건실한 결혼생활을 하려 했으나 아버지에게서 경제적 지원이 끊기면서 궁핍하게 살아야 했다. 얼마 안 가 아내와 딸을 처가에 맡기게 되었고 제대로 된 가장 노릇을 해보지 못했다. 가정을 건사하려던 시기의 릴케는 조각가 로댕의 비서로 일했고, 나중에 ‘로댕론’을 집필하기도 한다. 로댕과는 사소한 오해로 잠깐 절교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릴케가 ‘신시집 별권’을 로댕에게 헌정한 것에서 보듯, 두 사람의 교류는 이후에도 각별했다.


▲<사진 4> 화가 파올라 모데르존 베커가 그린 릴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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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이 넘은 거장 로댕의 작업은 서른 살의 릴케를 감화시켰다. 릴케는 로댕을 지켜보며 “값싼 감정에서 벗어나 화가나 조각가처럼 자연 앞에서 일하며 대상을 엄격하게 파악하고 묘사하는 것”을 작가의 기본 태도로 삼는다. 당시에는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예술가란 으레 일순간 영감을 받아 작업을 하는 천재와 같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대작가 로댕은 영감을 기다리지 않고 성실하고 꾸준하게 작업을 해나갔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영감마저도 창조했다고 해야 할까. 이러한 로댕에게 영향을 받은 이후 릴케의 시에도 변화가 찾아왔고, 시집 외에도 평론 ‘로댕론’, 소설 ‘말테의 수기’가 탄생하게 된다.



오, 장미여 기쁨이여


릴케는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물론 릴케가 장미를 사랑했지만, 이 사망설은 사실이 아니다. 릴케의 실제 사인은 백혈병이다. 말년에 장미를 따다가 가시에 찔린 적이 있는데, 병 때문에 피가 쉽게 멈추지 않아 어디선가 소문이 와전된 것 같다. 1926년, 쉰을 갓 넘긴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병상에서 숨을 거둔다. 릴케의 묘비명은 본인의 유언에 따라 새겨졌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 그 누구의 잠도 아닌 기쁨이여.”


▲<사진 5> 스위스의 라롱에 있는 릴케의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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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는 평생에 걸쳐 시집, 소설, 평론을 다수 남겼고, 아내와 애인, 당대의 대표 작가들과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릴케 생전에 그와 교류를 했거나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가장 위대한 작가와 사상가들이었다. 이 편지들도 대부분 책으로 묶여 나와 있으니 더 추워지기 전에 한 권쯤 읽어보시기를 추천한다. 마지막으로 달아두는 시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운데 가장 멀리 애송되는 ‘가을날’ 전문이다.


동영상 <김후란 시인이 읽어주는 릴케의 가을날 (50초~1분 55초)>

영상 출처 : 유튜브 (http://youtu.be/PRjieIiOS-Q)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무르익도록 명(命)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날을 베푸시어

열매들이 무르익기를 재촉하시고,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못합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기나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를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맬 것입니다.


동영상 <릴케의 인생 (낭송 : 이지아)>

영상 출처 : 유튜브 (http://youtu.be/4yJO_ba1Dqk)



글쓴이 김희연은 _ 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사회, 문화, 경제 분야에 두루 걸쳐 갖가지 종류의 글을 쓴다. 글쓰기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어서 늘 고마운 마음을 품은 한편으로, 쓸데없는 글로 인해 웹이나 인쇄매체에 들어가는 종이와 바이트, 그리고 독자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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