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ommunity/일상다반사

[에피소드] 추억의 노래잔치

by 앰코인스토리 - 2015. 9. 24.


에너지가 철철 넘치던 때의 일이다. 추석을 맞아 시골집에 내려가 늦은 저녁을 먹고 있자니 목소리가 울렸다. “아~에~동민 여러분~! 예고해드린 대로 내일 3시부터 한송정에서 노래자랑대회를 개최하오니 동민은 물론 차례를 지내려고 고향에 오신 분들도 빠짐없이 참가해주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부터 이장님께서 확성기로 홍보를 해 와서,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노래자랑이 열릴 날만 기다린 것 같았다.


추석 당일, 점심을 먹고 나니 마을 앞 개천 옆에 있는 한송정에서 새마을 노래가 연이어 들려왔다. 우리 형제도 나락을 팔아 사온 신발과 새 옷들을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벌써 이곳에는 동네 어른, 아이들과 서울이나 대구에서 다니러 온 선남선녀들로 빼곡했다. 우리 동네는 워낙 커서 편담, 가운데 담, 안담으로 나뉘어 은근히 경쟁도 하는 곳이라, 초등학교 사정으로 가을 운동회가 열리지 못할 때 한하여 몇 년에 한 번 열릴까 말까 하는 노래잔치는 그 열기가 대단했다.


“자! 지금부터 기다리고 기다리던 한송정 노래자랑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박수!” 드디어 사회를 맡은 우호아재(휴가를 나와 군복을 깔끔하게 다려 입은 데다 번쩍번쩍 빛이 나는 헌병 파이버를 삐딱하게 쓰고 폼 나게도 허리에는 권총까지 찼다)의 개회선언과 함께 1번 타자로 대구에서 섬유공장 사무원으로 근무한다는 영희가 양장을 쫙 빼입고 등장했다. 곡목은 <섬마을 선생님>.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누굴 찾아 왔던가. 총각선생님~” 당시엔 노래방 기계가 없었던 고로 반주는 신인가수로 등단했다는 안담의 홍기가 기타로 대신했다. 곡조에 맞춘 열창과 연이어 터지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흥을 더해갔다.


다음은 동네에서 노래를 가장 잘한다는 주근깨투성이의 경자네 아줌마가 몸뻬 차림으로 나와서 무엇이 그리도 부끄러운지 시상품들을 진열해놓은 책상 뒤에 쪼그려 앉아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밋자루 내던지고서~”를 구성지게 불러댔다.


노래자랑 중간에 행해진 고고파티는 젊은이들의 무대였다. 대도시에서 다니러 온 총각들이 기타 가락에 맞추어 ‘트위스트 김’ 흉내를 내며 손발과 엉덩이를 신나게 흔들었다. 아가씨들은 총각들이 손을 잡아끄는 대로 한사코 도망친 것은 그때가 60년대였기 때문이리라. 한쪽에서는 차례 음식과 함께 “형!”, “아우!” 하면서 거나하게 막걸리판도 벌어졌다. 20여 명의 열띤 노래와 함께 한없이 밝기만 하던 해가 서쪽에 붉게 기웃거리고 있을 무렵,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됐던 행사가 끝이 났다. 채점이 진행되는 동안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원수의 동요가 고향을 떠나 있는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드디어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예상대로 1등은 가운데 담의 경자네 아주머니. 라디오를 선물로 받았다. 2등은 편담의 영기 형이 남진의 <가슴 아프게>로 설탕 한 박스를 받았으며 3등에게는 밀가루 한 포대씩이 주어졌다. 등외에게도 세탁비누 하나씩 돌아갔다. 그러나 수상자건 등외건 참가자 모두 손뼉 치고 격려하고 축하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웃고 즐기고 행복했으니.


잠시나마 마을 사람들을 한데 묶어주고 고향의 정을 물씬 느끼게 해준 소박하고 순수한 축제였던 고향 마을의 노래잔치는 내게 더없이 아름다운 추억이다. 이제는 수몰로 인하여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의 추석을, 그렇게 가슴에 묻는다.


글 / 사외독자 이선기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