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emiconductor/스마트 Tip

[역사 속 엔지니어] 앨런 튜링, 독 사과를 한 입 베어 문 불행한 천재

by 앰코인스토리 - 2015. 4. 13.

▲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포스터

사진 출처 : http://goo.gl/bAZweQ

 

2015년 2월,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이라는 영화 한 편이 한국 극장가에 걸렸습니다. 해외 드라마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보셨을 《셜록》의 홈즈, 영국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가 주연을 맡았지요.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실존했던 영국의 수학자이자 전산학자인 앨런 튜링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튜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암호 체계인 ‘에니그마(Enigma)’를 해독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고, 《이미테이션 게임》 역시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지금까지 [역사 속 엔지니어]에서는 비행기, 자동차, 그리고 우주선까지 현대 과학기술의 집약체를 탄생시킨 사람들을 만나왔습니다. 이제, 우리 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컴퓨터의 아버지를 등장시킬 차례입니다. 불행했던 천재, 앨런 튜링을 말이지요.

 

 

앨런 튜링(Alan Mathison Turing 1912년 6월 23일 ~ 1954년 6월 7일)은 100년쯤 전인 1912년 영국 잉글랜드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위로 형이 하나 있었고 어린 시절부터 명석한 두뇌를 자랑했습니다. 언어도 빨리 배웠고 퍼즐과 계산에 뛰어났다고 합니다. 20세기 최고의 암호학자, 논리학자, 전산학자가 될 떡잎을 일찍부터 내보였던 것이지요. 만 스무 살이 되기 전해인 1931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킹스 칼리지에 입학한 튜링은 수학을 전공으로 삼았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영국의 대학제도에 대해 잠시 알아볼까요? 영국에서는 여러 개의 칼리지가 하나의 대학교를 구성한다고 합니다. 한국의 대학교에도 단과대학이 있지요. 칼리지는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개념입니다. 한국의 대학교가 종합대학 산하에 단과대학이 종속된 개념이라면, 영국은 칼리지들의 연합체가 종합대학을 이루는 것입니다. 런던대학교에도 킹스 칼리지 런던이 있고, 케임브리지대학교에도 앨런 튜링이 나온 킹스 칼리지가 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나 명문대학이 있지만, 한국처럼 종합대학 간 위계가 꽉 짜인 학벌 국가는 드문 편입니다. 공부하고 싶은 사람만 편히 공부할 수 있는, 서열에서 벗어난 연구 중심 대학이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누구나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어야 하고요. 다시 주인공 앨런 튜링의 이야기로 돌아가지요. 수학 관련 분야에서 천재였던 사람이고, 그에 걸맞은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앨런 튜링은 1936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때 지도교수가 알론조 처치(Alonzo Church)와 존 폰 노이만(John Louis von Neumann)인데 전산학과 게임이론 분야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학자들입니다. 튜링은 학업을 마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a-기계

 

 

앨런 튜링을 소개하면서 그가 만든 ‘튜링 기계’를 빼놓을 수 없겠지요. 그를 엔지니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기계 때문일 테니까요. 요즘은 엔지니어라는 말이 모호하게 쓰이고는 있지만, 이론을 응용해 실제로 무언가를 설계하고 작동시키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앨런 튜링을 엔지니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튜링은 자신이 만든 기계를 ‘에이(a)-기계’라고 이름 지었는데, 후대에는 그의 이름을 따 ‘튜링 기계’라고 합니다. 튜링 기계는 오늘날 컴퓨터의 기본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1945년에 나왔다고 알려졌지만 딱히 언제 만들었다고 특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튜링이 어린 시절부터 낮은 수준이지만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고, 점차 이론을 정교화해내고 연구를 하면서 보완해 나갔기 때문입니다.

 

엔지니어를 다루는 글이다 보니 매번 부딪히는 난관이 있습니다. 관련된 이론이나 기술을 간단하게라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인데요. 해당 분야를 잘 아는 분들에게는 하나마나한 설명이지만, 생소한 분들에게는 어딘가 미흡하고 부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짧고 단순하게 풀어보겠습니다. 튜링 기계는 테이프에 기록된 여러 가지 기호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바꿔주는 장치의 모델입니다. 튜링 자신의 설명을 잠시 들어보시지요.

 

“무한한 저장공간은 무한한 길이의 테이프로 나타나는데, 이 테이프는 하나의 기호를 인쇄할 수 있는 크기의 정사각형들로 쪼개져 있다. 언제든지 기계 속에는 하나의 기호가 들어가 있고 이를 ‘읽힌 기호’라고 한다. 이 기계는 읽힌 기호를 바꿀 수 있는데 그 기계의 행동은 오직 읽힌 기호만이 결정한다. 테이프는 앞뒤로 움직일 수 있어서 모든 기호는 적어도 한 번씩은 기계에 읽힐 것이다.”

 

헉, 어렵지 않나요? 쉽게 상상할 수 있도록 흔히 볼 수 있는 두루마리 휴지로 설명해 드려볼게요. 두루마리 휴지는 세로가 약 10cm고, 상표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개 다 풀어놓으면 30m 정도가 됩니다. 그러면 300개 정도의 정사각형으로 칸을 나눌 수 있겠지요. 이 칸마다 아무 무늬가 없을 수도 있고, 꽃무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 롤러 사이로 두루마리 휴지를 집어넣으면 그것을 해석하고 명령을 수행하는 두루마리 튜링 기계가 있다고 치지요. 이 기계는 ‘42번 칸에 꽃무늬가 있으면 27번 칸으로 간다, 27번 칸에 아무 무늬가 없으면 125번에 가서 꽃무늬를 인쇄한다, 무늬가 있으면 37번의 꽃무늬를 지운다.’ 등등의 일을 하게 됩니다. 총 300칸이니까 어마어마하게 많은 경우의 수가 있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앨런 튜링은 당연히 확률론에서도 천재였습니다. 이 개념을 숫자와 기호로 추상화하여 튜링 기계라는 모델을 만들 수 있는 비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튜링처럼 무한의 영역까지 나가기엔 우리 대부분은 골치가 아파질 테니 이쯤 해서 그만하지요. 튜링 기계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컴퓨터의 작동 원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컴퓨터나 스마트폰은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면 브라우저 창을 이동한다, 하트 모양의 공감을 누르면 숫자에 1을 더해서 표시한다’와 같은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거대하고 정교한 튜링 기계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전쟁에 드리운 빛, 어두운 최후

 

▲ 영화 이미테이션 장면

사진 출처 : http://goo.gl/6rpbhk

 

세계정세는 앨런 튜링을 그저 연구자로 머무르게 두지 않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것이지요. 영국군이 함께한 연합군은 전쟁 초기 독일군의 암호기 ‘에니그마’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이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기계인 ‘봄브(폴란드어라 Bomby로 쓰고 봄브라고 읽습니다)’를 개량한 ‘튜링 봄비(Turing Bombe)’가 튜링의 공적입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앨런 튜링이 가장 많은 이바지를 했지만, 봄브를 만든 폴란드 과학자들과 영국 암호해독팀의 노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에니그마와 튜링 봄비 사이의 재미난 일화 같은 건 없습니다. 암호를 생성하고 해독하는 방식은 튜링 기계 설명보다 더 어려울 수 있거든요. 추리만화처럼 거울에 비추어봤더니 제대로 읽힌다거나, 셜록 홈즈가 나오는 소설처럼 성경책의 몇째 줄에 나오는 단어를 조합했다거나 하는 재미있는 암호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바퀴와 바퀴 회전수, 전기신호, 부호 등등이 동원되어야 하는데요. 제 능력으로는 무리입니다! 

 

연합군의 승리를 앞당긴 튜링은 1945년 종전 후에도 자신의 연구를 계속해 나갑니다. 컴퓨터의 원형을 개발하는 한편, 화학과 생물학 분야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지났지만 컴퓨터과학에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는 그의 이름을 따 ‘튜링상’이 수여되고 있습니다. 생전에도 후에도 앨런 튜링은 수학, 전산학을 중심으로 세상의 인정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영화 이미테이션 장면

사진 출처 : http://goo.gl/vWuihz

 

앨런 튜링의 이야기를 여기서 마무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의 최후는 우리에게 씁쓸함을 남깁니다. 튜링은 동성애자였고 당시 영국은 동성애를 범죄로 규정했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선천적, 후천적 원인과 오해들이 밝혀진 요즘에도 동성애는 자주 범죄나 질병 취급을 받곤 하지요. 괴팍한 성격으로도 유명했던 튜링은 타인의 시선에 굴하지 않았고 스스로 성적 지향을 감추지도 않았습니다. 

 

1951년 체포된 튜링은 화학적 거세형(호르몬 처방)을 받다가 1954년에 청산가리를 주사한 사과를 스스로 먹습니다. 그리고 한참 세월이 지난 2013년에야 영국은 튜링을 사면 복권했지요. 애플 사의 로고인 한 입 베어 문 사과가 튜링의 죽음을 기리는 것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스티브 잡스 본인에게 물었더니 그랬다면 참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아니라고 답했다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 앨런 튜링 탄생 100주년인 지난 2012년, 런던올림픽 성화가 그의 동상앞에서 전해졌다

사진 출처 : http://goo.gl/w9QaEj

 

앨런 튜링이 관용과 자유가 넘치는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래서 인류에게 더 많은 선물을 안겨주었다면, 우리는 오늘 어떤 모습으로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을까요? 고도로 추상화되어 복잡해진 0과 1의 디지털 세상에서도 인간에 대한 편견과 오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숫자와 확률보다 전쟁과 사랑을 이해하는 데에 훨씬 더 많은 재능과 노력이 필요한가 봅니다.

 


이미테이션 게임 (2015)

The Imitation Game 
8.3
감독
모튼 틸덤
출연
베네딕트 컴버배치, 키이라 나이틀리, 매튜 구드, 알렌 리치, 매튜 비어드
정보
드라마, 스릴러 | 영국, 미국 | 114 분 | 2015-02-17
 

 

 

 

글쓴이 김희연은_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자기 과시에 지나지 않는 착한 글이나 빤한 이야기를 피하려고 노력하며 쓰고 있다. 경력에 비해 부족한 솜씨가 부끄럽고, 읽어주는 독자에게는 감사하며 산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