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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이야기] 소설의 어원, 세 번째

by 앰코인스토리 - 2018. 3. 19.

소설의 어원,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최초 의미는 ‘부스러기의 작은 말’이지만 취할 바가 있는 일종의 ‘잡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소설가’의 출현과 함께 당시의 소설이라는 개념의 연변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공니 恐泥의 소설


小说家者流, 盖出于稗官, 街谈巷语, 道听途说者之所造也。

Xiǎoshuōjiāzhěliú, gàichūyúbàiguān, jiētánxiàngyǔ, dàotīngtúshuōzhězhīsuǒzàoyě。

소설가의 무리는 대개 패관에서 나왔으며, 길거리와 골목의 이야기나 길에서 듣고 말한 것으로 짓는다.


班固这里说的“稗官”, 是汉代朝廷设置的一种小官职。

Bāngùzhèlǐshuōde“bàiguān”, shìhàndàicháotíngshèzhì deyìzhǒngxiǎoguānzhí。

반고가 여기서 말한 ‘패관’은 한대 조정에서 설치한 일종의 작은 관직이다.


专门负责到街巷闾里, 搜集民间谈话, 将其整理出来作为在上者了解民情的资料。

Zhuānménfùzédàojiēxiànglǘlǐ, sōujímínjiāntánhuà, jiāngqízhěnglǐchūláizuòwéi zàishàngzhěliǎojiěmínqíngdezīliào。

길거리, 골목에 가서 민간의 담화를 수집하는 것을 전문적으로 담당하였으며, 그것을 정리하여 윗사람(황제)으로 하여금 민정을 이해하는 자료로 삼게 하였다.


这种经过稗官整理的言说, 范围广大, 内容庞杂。神话, 传说, 故事, 闲谈, 杂说, 真真假假, 虚虚实实都有。

Zhèzhǒngjīngguòbàiguānzhěnglǐdeyánshuō, fànwéiguǎngdà, nèiróngpángzá。shénhuà, huánshuō, gùshi, xiántán, záshuō, zhēnzhēnjiǎjiǎ, xūxūshíshídōuyǒu。

패관에 의해 정리된 이런 언설은 범위가 방대하고, 내용이 잡다하였다. 신화, 전설, 고사, 한담, 잡설의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 허구와 실재 등이 모두 있었다.


后来的人将小说称为“稗官”或“稗官野史”, 就是从这里来的。

Hòuláiderénjiāngxiǎoshuōchēngwéi “bàiguān” huò “bàiguānyěshǐ”, jiùshìcóngzhèlǐláide。

나중에 사람들은 소설을 ‘패관’ 혹은 ‘패관야사’라고 불렀는데,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总之, 唐代以前, “小说” 的概念基本上就是指民间的和私下流传的琐语, 杂事, 异闻等, 它形成于民间, 存在于口头, 虽然不成体统, 却也颇能反映出当时的民情, 风俗, 社会心理, 所以班固引用孔子的话, 孔子曰 :“ 雖小道, 必有可觀者焉, 致遠恐泥。是以君子弗爲也。”

Zǒngzhī, tángdàiyǐqián, “xiǎoshuō” degàiniànjīběnshàng jiùshìzhǐmínjiāndehésīxiàliúchuándesuǒyǔ, záshì, yìwénděng, tāxíngchéngyúmínjiān, cúnzàiyúkǒutóu, suīránbùchéngtǐtǒng, quèyěpōnéngfǎnyìngchūdāngshídemínqíng, fēngsú, shèhuìxīnlǐ, suǒyǐbāngùyǐnyòngkǒngzǐdehuà, kǒngzǐyuē :“suīxiǎodào, bìyǒukěguānzhěyān, zhìyuǎnkǒngní。 shìyǐjūnzǐfúwéiyě。”

요컨대, 당대 이전 “소설”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민간이나, 암암리에 전해지는 자질구레한 말, 잡사, 이문 등을 지칭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것은 민간에서 형성되어, 구전으로 존재하였는데, 비록 격식은 갖추어지지 않았으나, 오히려 당시의 민정, 풍속, 사회심리를 상당히 반영한 것이었으며, 그래서 ‘반고’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였다. 공자 왈 : “비록 소도라 할지라도, 반드시 볼만한 것이 있지만, 원대하게 나아감에 막힘이 있을까 염려하여 군자는 ‘이를’ 하지 않는다.”

[주석] 본문 원문 : 《中国现代小说导论》四川大学出版社 2004 杨联芬 著 4쪽에서 인용。

《중국 고전소설사의 이해》 전남대학교출판부 2011 张国风 著 이등연ㆍ정영호 편역, 원문 중 “ 雖小道, 必有可觀者焉, 致遠恐泥。是以君子弗爲也。”은 이 책의 312쪽 원문, 번역문 참고함.


사진출처 : 바이두 莺莺传 百度百科 https://baike.baidu.com/item/


소설과 Novel


위와 같이 중국 소설의 연변을 대략 살펴보았습니다. 정리하자면, 작다는 의미의 ‘小’와 즐거움이나 말의 의미의 ‘說’에 이어, 부스러기의 작은 말이나 취할 바가 있는 것의 의미인 ‘小說’, 그리고 당대(唐代, 618~907) 이전까지의 개념인 ‘소설가’인 ‘패관’에 의해 수집된 민정을 반영한 여러 가지 방대하고 잡다한 것들을 의미하는 소설이었습니다. 즉, 소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소설, Novel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Novel의 개념이 어떻게 중국 소설에 이입되었는지 짧게 살펴보고 중국 소설과의 차이점을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소설이라는 말은 사실 19세기 말 서구 문명의 진입에 따른 동양의 근대화 과정에서 ‘새롭게’ 부각된 용어이다. ‘새롭게’ 부각되었다는 뜻은 한ㆍ중ㆍ일 등 한자 문화권의 경우, 각국의 사정은 조금씩 달랐다 하더라도 고전문학 속에서 이미 정착된 바 있는 ‘小說’이라는 한자 용어를 새롭게 들어온 서구 소설을 지칭하는 데 끌어들였고, 그 결과 소설은 서구의 roman, novel, narrative 등 여러 형태의 서사 작품 및 이런 형식에 따른 자국의 작품을 가리키는 용어로 ‘탈바꿈’하여 정착해 버리고 말았다는 의미이다. 이런 일은 동양에서 서구 문화를 먼저 받아들였던 일본에서 이루어져 중국과 한국으로 전입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다른 분야의 여러 용어에서도 비슷한 예는 수없이 많다. 중국의 경우, 고전문학 속의 소설도 소설로, 현대문학에서 새롭게 시작된 ‘서구형 소설’도 소설로 혼용하여 부르게 되었다. 물론 중국 고전소설이나 새로 시작된 현대 소설의 장르적 특징이 같거나 유사하다면 소설이라는 큰 범주 안에 ‘고전소설’과 ‘현대소설’을 다 아울러 담는다 하더라도 그리 문제 될 게 없겠는데, 불행하게도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고전소설’과 ‘현대소설’은 기본 구성 형식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너무나 낯선 관계였다. 서구 소설의 개념은 서구 문학사에 등장했던 소설 작품을 대상으로 삼아 연구, 축적된 이론적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던 중국 고전소설을 그러한 개념 규정의 틀에 올려놓고 시비를 벌인다는 자체가 ‘발을 깎아 신발에 맞추는(削足適履) 꼴을 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석] 《중국 고전소설사의 이해》 전남대학교출판부 2011 张国风 著 이등연ㆍ정영호 편역, 부록 308~309쪽 일부 인용.


부연하자면, 중국의 소설이라는 고유명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일반적 소설의 개념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으며, 18~19세기의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으로 인한 개념의 재정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서양의 Novel이라는 고유명사를 받아들임에 있어 자국에 걸맞게 번역어를 찾을 수밖에 없는데, 그 과정에 발생한 일종의 ‘형용모순(形容矛盾)’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중국 고전 소설이 서양의 현대적 의미의 소설과 완전히 다르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는 내용 측면에서 보면 ‘이야기’라는 형태로 어느 정도의 공통점을 갖추고 있으며, ‘소설가’의 개념 역시 소설을 직접 저작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수집했다는 측면에서는 현재의 ‘소설가’ 개념과 상당한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패관’이라는 수집가의 처지에서 보면 비록 단순히 ‘수집’한다는 개념도 있겠지만, 그 수집하는 과정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는 여러 이야기를 자신이 받아 적을 때 일정 정도의 개인적 문화 정도나 표현 방식이 들어간다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이 또한 소소하게나마 소설 창작의 개념과 부합된다 볼 수 있습니다. ‘창작(創作)’에 있어서 이런 개인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전에 ‘구양여릉(欧阳庐陵)’은 몇 명의 벗들과 함께 시내에 간 적이 있었는데 길에서 내달리는 말이 행인과 충돌하여 죽는 사람까지 생겨 시가지 전체가 들끓어 오르는 장면을 목격했다. 여릉과 친구는 돌아와 그 일을 함께 기록하자고 약속했다. 친구들이 기록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수십 글자로 짓고 어떤 사람은 수백 글자로 지었다. 여릉이 기록한 바를 보면 겨우 ‘달리는 말이 길에서 사람을 죽이다’라는 여섯 글자뿐이었는데, 이것은 열 마디를 한마디의 말로 개괄한 것이다.”

[주석] 원문 : “昔欧阳庐陵偕数友行市中, 见有马驰掷于路, 冲突行人, 至有死者, 全市鼎沸。庐陵与友归, 相约同记其事。诸友记者, 或累数十言, 或累数百言, 视庐陵所记, 则仅有“逸马杀人于道”六字。此括十语为一语之说也。” 

《中国历代小说论著选(下)》作者 : 黄霖 / 韩同文 ‘论文学上小说之位置’116쪽 원문 인용.

‘欧阳庐陵’, 即宋代文学家欧阳修, 因他是吉州庐陵(今江西吉安县)人, 故称。구양여릉, 즉 송대의 문학가 ‘구양수’이며, 그는 길주 여릉(지금의 길안현)사람이어서 그렇게 불리었다. 《中国历代小说论著选(下)》作者 : 黄霖 / 韩同文 ‘论文学上小说之位置’ 119쪽 원문 인용.


이렇듯 한 사건을 두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생각은 제각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것을 글로써 남긴다는 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과 자신의 역량이 반드시 반영된다 볼 수 있고 때로는 그것의 쓰임이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서도 상당한 차이가 발생하는데, 종국에는 오롯이 작가 자신의 붓으로 써내어지므로 ‘패관’은 결코 현대적 의미의 ‘소설가’가 아니라는 완전 부정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따로 서양 소설은 ‘신화-서사시-로맨스’로 발전해 와서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소설의 구체적인 형태 즉, 인물, 사건과 플롯의 유기적인 결합, 이른바 ‘현대적 의미의 소설’이 되었고 중국 소설의 발전과정과는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은 서로 직접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첫째, 소설과 Novel의 근본 개념 자체가 서로 많은 차이가 있고, 둘째, 시대적으로 보면 아직도 중국의 서양식 현대적 소설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것인가, 그리고 단편, 중편, 장편의 구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 명제가 명확히 해결이 안 되어 있으며, 셋째는 가장 중요한 필자 본인의 짧은 지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중국은 고대의 신화, 전설, 고사, 한담, 잡설의 부스러기 말을 소설로 최초로 정의한 이래 이를 바탕으로 시대가 바뀌면서 다양한 형태의 소설이 출현하였고, 근현대에 들어서 서양의 Novel과 만나면서 그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문학에서 소설의 개념과 출현은 이번 호까지 마무리하는 것으로 하겠으며, 다음 호에는 중국 고대 소설의 시작인 신화(神話)의 대표작 산해경(山海經)과 그 내용을 일부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앞으로는 소설이라는 범주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작품을 번역하고 분석해 봄으로써 좀 더 흥미 있는 이야기로 전개해 가고자 합니다. 다음은 개인적으로 그 소설 작품 속에 기억에 남아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시를 하나 먼저 첨부합니다.


“그래서 받아보니 한 편의 시였는데, 그 제목이 ‘달 밝은 보름날 밤’이라 되어 있고, 내용은 이러했다.”


서상(西廂) 아래에서 달빛을 기다리며 待月西廂下

바람을 쐬려고 문을 반쯤 열었도다. 金風戶半開

담장에 어른거려 움직이는 꽃 그림자를, 拂墻花影動

그리운 임 오신 걸로 의심을 했었지요. 疑是玉人來

[주석] 《중국 전기 소설선》 도서출판 박이정 2005 김현룡 책임감수, 김종군 편역저, 《앵앵전鶯鶯傳》 61쪽 번역문 인용


중국 전기소설의 대표작 앵앵전(鶯鶯傳)에 나오는 내용 중 ‘최앵앵’이 ‘장생’에게 보낸 시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당대(唐代) 전기소설(傳記小說)을 이야기하면서 다시 한번 다루어지겠지만 이처럼 중국 소설에는 서양 소설과 다른 매우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너무도 많습니다. 조금 더 기대해 주시기 바라며, 근데 문득 이 시를 읽다 보니 떠오르는 유사한 시가 있는데 우리 조선 중기에 너무도 잘 알려진 ‘서경덕’과‘ ‘황진이’ 둘 간의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담은 시가 바로 그것입니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내 언제 신(信)이 없어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하리오.

[주석] 황진이와 서경덕의 사랑(갈지) 에서 인용함.


오늘 기억해두기, 恐泥 


《단어》

词语 (어휘) : 恐泥

拼音 (병음) : kǒng ní, nì

释义 (해석) : : 害怕, 畏惧 (무서워하다, 두려워하다) Hàipà, wèijù

: 土和水合成的东西 (흙과 물이 합쳐진 것) Tǔ hé shuǐ héchéng de dōngxi


《예문》

例句 (예문) : 孔子曰 : 雖小道, 必有可觀者焉, 致遠恐泥。是以君子弗爲也。

kǒngzǐyuē :“suīxiǎodào, bìyǒukěguānzhěyān, zhìyuǎnkǒngní。 shìyǐjūnzǐfúwéiyě。”

공자 왈 : 비록 소도라 할지라도, 반드시 볼만한 것이 있지만, 원대하게 나아감에 막힘이 있을까 염려하여 군자는 이를 하지 않는다. (위 본문 인용 참고)


중국 소설사에서 공자(孔子)의 영향은 그것의 발전과정에 있어 결코 간과할 수 없는데, 특히 한(漢) 고조 유방(劉邦)이 유교(儒教)를 정치 이데올로기로 삼은 이래 공자의 恐泥(“그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까 두려워하다.”로 의역할 수 있음)의 말처럼, 당시의 문인들에게 있어서 소설은 그저 ‘소도’일 따름이며 일종의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이를 반대로 해석하면 그만큼 당시에 이미 소설은 일정 정도의 영향력이 있었고, 때로는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의 흡입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공자가 그것을 경계하였는지에 대한 자세한 것을 여기에 나열할 수는 없지만, 소설에 대한 이런 ‘공자’와 ‘유교’의 영향은 앞서 언급된 중국의 19세기 말 서양의 이른바 Novel의 이입과 1919년 5ㆍ4 신문화 운동 전까지 지속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WRITTEN BY 송희건

“君子以文會友, 以友輔仁.”
“군자는 배움으로 친구를 사귀고, 그 친구로써 인의를 다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