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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일상다반사

[에피소드] 달력

by 앰코인스토리 - 2017. 12. 29.


올해도 달력을 하나 얻어 왔다. 그리고 곧바로 작년 달력을 걸어 놓았던 그 자리에 내년 달력을 옮겨다 달았다. 뿌듯했다. 내년 한 해 하는 일 모두가 잘 이루어질 거 같은 기대감이 충만했다. 디지털이 대세인 요즈음 달력을 고집하는 나는 어찌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인식될 수도 있겠으나, 달력은 달력 이상의 의미와 추억을 가져다 주었기에 달력에 목을 매는지도 모르겠다.

달력이 참 흔했던 시절이 있었다. 사장님들이 마케팅 차원에서 자신의 회사 혹은 가게를 알리기 위해 명함 대신 연말이면 으레 달력을 내밀던 차에 20여 개의 달력이 들어와 버린 적도 있었다. 한방에 2개씩 달아도 남아도는 바람에 가장 예쁘고 멋진 달력을 찾아 바꿔 다는데 저녁 시간을 소비하기도 했었다.

요즈음 금융회사에서 주는 숫자만 큰 달력은 항상 순번이 뒤로 밀리기 일쑤였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연예인이라면 한 번쯤 달력의 표지 모델로 등장하기도 했었다. 달력을 달고 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한달 한달 넘겨 가며 부모님 생신과 형제자매들의 생일을 까만 볼펜으로 꾹꾹 눌러 가며 적었고, 그 다음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빨간 날 찾기에 열을 올렸었다. 일요일 다음 월요일이 빨간 숫자만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동생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자축을 했었다. 하지만 국경일이 없는 11월이나 국경일이 일요일 겹쳐진 달에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미리 1년을 훑어보고 나면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 여행을 다녀온 느낌을 받았다. 이 방 저 방 다 달고 남은 달력은 장롱 옆으로 한데 몰아넣었다. 달력을 주신 분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고 좋은 종이가 귀했던 때라 그냥 버리기는 무척이나 아까웠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남은 달력의 용도는 책의 표지 쌓는 데 이용되게 되었다. 빠르면 연말에 늦으면 개학 후 새 학년 교과서를 받아 오게 되었다. 긴 시간 동안 동고동락해야 하다 보니 1개월만 지나도 교과서 표지는 너덜너덜해지기 일쑤였다. 그 표지를 싸는 데 달력만큼 좋은 게 없었다.

좋은 그림의 달력이라면 그림이 밖으로 나오도록 숫자로 가득 찬 달력은 숫자가 없는 하얀 뒷면이 앞을 보도록 쌓게 되었다. 10여 권 넘는 교과서를 싸는데 족히 1년 치 달력이 들어가는 셈이었다. 최대한 예쁘게 싸 보겠노라며 자와 가위까지 총동원하여, 교과서 크기를 맞춰가며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온갖 노력을 가했다. 동생들과 누나 그리고 나의 책과 달력으로 방안이 꽉 차 버렸다. 저녁 식사까지 다 끝난 터 TV를 보고 계시던 엄마까지 합세해서 방안은 이야기꽃으로 가득했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막냇동생은 엄마가 잘못 잘랐다고 울음보를 터뜨리면서 울음과 웃음소리가 뒤섞여 난장판으로 변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추운 겨울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지나고 보니 그것도 하나의 추억거리가 되어 버렸다. 달력이 점점 귀해지면서 먼 훗날엔 사라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살짝 들기도 하지만 미디어 시대가 도래하면서 라디오는 도태될 거란 예상이 멋지게 빗나가 버렸듯이 디지털 기기가 주류를 이루는 세상에서도 달력도 꿋꿋이 살아남아 연말이 되면 공짜로 달력을 얻어가는 기쁨을 빼앗아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불어 달력에 대한 추억을 오래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달력은 계속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