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이상을 무위도식했지만, 평일과 공휴일은 많이도 다르다. 아파트 창을 통해 바라보는 거리의 모습에서부터 분위기가 판이하다. 인적과 차량도 드물어 활기까지 다운시킨다. 신문이 오지 않으니 긴 새벽을 견디느라 마음은 허탈해지고, 볼만한 TV프로는 한밤중에 몰려 있고, 주식시장도 폐쇄되니 죽을 맛이다.

추석이라고 아들 가족은 하루, 사위 가족은 이틀간 다녀갔지만 예전과는 달랐다. 지난 추석까지만 해도 윷놀이로 웃음보가 터졌고 손자가 심심하다고 하여 딱지치기나 팽이 놀이를 하느라 피곤했지만, 이젠 그리운 과거사가 되어버렸다. “○○야, 윷놀이 준비하자.”며 한판이 끝날 때마다 주라고 준비한 봉투를 내밀었지만 “할아버지, 윷놀이는 설에 하는 놀이야.”라며 일언지하로 퇴짜다. 온종일 같이 있었건만, 방에 들어가서 동생이나 고모하고 놀거나 TV를 보느라 우리 늙은이가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았다. 어느새 짝사랑 상대로만 바라보아야 할 때가 되었나 보다.

직장생활 때는 교통체증에 시달리면서 부모님을 찾았다. 다섯 형제가 나름대로 준비한 선물들을 보면서 흐뭇해하시던 그분들이 새삼 눈앞에 어른거린다. 차례를 지내고 나면 누군가가 들고 온 갈비를 뜯고, 구두상품권을 돌리면서 삼 대에 걸친 스물두 명이 푸짐한 명절을 보냈었다. 그날 오후면 다들 처가로 가서 백년손님 대접도 받고 귀가 때는 양가 어머님이 알뜰살뜰 모아둔 농산물들로 룸미러를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4일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는데 10일이라니. 더구나 2박 3일은 아내가 사위와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훌쩍 떠나서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되었다.

하루는 같은 처지의 친구와 덕수궁 근처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식당마다 손님이 많아서 여러 곳을 수소문하고 다녔지만 ‘동병상련’이라고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마침 10여 년간 일반인의 통행이 제한되었던 덕수궁 돌담길의 일부 구간이 개방되었다는 뉴스가 생각나서 그곳을 돌아보기로 했다. 서울시가 영국대사관과 논의하여 개방되었다는 이 길은 대한문 옆을 지나 정동극장까지 이어지는 기존의 덕수궁 돌담길보다 더 아름답고 고즈넉한 매력을 품고 있었다. 가을 공기를 느끼며 느릿느릿 거닐어 본 이 길은 돌담과 마주 보는 영국식 붉은 담장과 단풍, 낙엽으로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담장이 낮고 곡선이 흐르는 모양으로 구성된 게 우리와는 달라서 걸으면서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집에 오니 예상대로 아내는 있었지만, 이야기 상대인 사위가 보이지 않았다. 구순인 장모님이 손수 가꾸신 먹을거리를 강남에 사는 아들집에 갖다 주라고 서둘러 보냈다고 한다. 조금 있으니 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짐만 주고 가려고 했는데 오빠가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라고 해서 현관을 들어서니 오빠와 언니가 반가이 맞아주는데, ○○는 오빠를 쳐다보면서 ‘조금 전에는 그냥 가지, 귀찮게 왜 오려고 하는지 몰라라고 하더니 그렇게 반가워?’ 오빠가 민망한지 ‘내가 언제 그랬어.’ ‘아빠는 거짓말쟁이야!’ ○○는 화를 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는 내가 간다고 해도 나오지도 않아.”

딸이 섭섭할 만도 한데 “나는 오빠 마음을 이해해.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치워야 할 것이 많아서 언니 들으라고 한 말이잖아.” 그러고 보니 어제 라디오에서 들은 통계치가 떠오른다. ‘네덜란드에서 6세부터 77세까지의 남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하루 중 거짓말 횟수가 가장 많은 연령대는 10대로 2.9회고 가장 적은 연령은 6~8세로 0.9회라니 바로 손자의 연령대다.’ 젊으나 늙으나 ‘말하기 전에 두 번 생각하라.’가 금언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긴 연휴였다.


글 / 사외독자 이성재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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