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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엔지니어] 조지 워싱턴 카버, 신분의 한계를 넘어 기적을 일군 땅콩박사

by 앰코인스토리 - 2017. 8. 9.


조지 워싱턴 카버(George Washington Carver, 1864~1943)는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당시 물건처럼 취급되던 흑인 노예의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남북전쟁이 북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노예해방이 되었으나 흑인들의 삶이 금방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지요. 삶의 기반이 없었던 흑인들은 전보다도 더 혹독해진 상황에서 견뎌야 했고 백인들은 이를 이용해 더욱 흑인들을 교묘하게 괴롭혔습니다. 흑인들의 소유를 약탈해가는 무장폭도가 생겨나고 흑인들을 납치해 팔아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FihTh7


조지의 어머니 메리는 사고로 남편을 잃고 미주리 주 개척지대에서 온유한 성품의 카버라고 하는 백인 부부 밑에서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여느 백인들과는 달리 집에서 부리는 흑인들에게 매우 인간적인 부부였다고 전해집니다. 어느 겨울밤, 메리와 어린 조지가 무장폭도들에게 납치를 당하게 됩니다. 흑인 모자의 목숨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게 여겨지던 그 당시의 상황이었지만, 카버 부부는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조지의 어머니 메리는 어디론가 또다시 팔려간 뒤였고, 어린 조지만 겨우 폭도들로부터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조지는 카버 내외의 보살핌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9XiD8J


당시 미주리 주는 흑인들의 교육을 허락지 않았지만, 수도 네오쇼에 가면 흑인들을 가르치는 링컨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가게 됩니다. 조지는 그곳에서 신앙심이 깊었던 마리아 왓킨스라는 흑인 부인을 만나게 되고, 그녀의 집에서 기거하며 허드렛일을 도우며 공부하게 됩니다. 언젠가 미국의 한 상원의원이 카버 박사에게 ‘당신은 도대체 그 모든 아이디어를 어디서 배웠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카버박사는 ‘책입니다'라고 답했고 곧이어 상원의원이 ‘무슨 책이지요?’라고 되묻자 카버박사는 빙그레 웃으며 ‘하나님의 말씀, 성경책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녀와 함께 살았던 이 시기에 어린 카버는 더욱 신앙심이 깊어졌고, 특별히 평소에 그녀가 했던 말, ‘조지, 너는 언젠가 가난한 동족들에게 네가 배운 것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말을 마음 깊이 새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hB2CSS


온갖 잡일을 하며 학비를 벌어 공부하던 카버는 1880년 20세가 되어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그 후 우수한 성적으로 하일랜드의 한 대학교를 지원하게 되었는데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입학을 거부당합니다. 그러나 상심해 있던 카버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888년 여름, 침례교회에서 만난 존이라는 의사 부부가 그에게 학교를 하나 소개해주었는데, 감리교 목사 매튜 심슨이 설립자로 그는 하나님 안에서 만인의 평등권을 주장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카버는 그의 인생에 중요한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요. 미술을 가르치는 버드라는 선생은 카버가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식물과 자연에 대한 카버의 관심과 자질이 남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이오와 주립대학 교수로 있었던 자신의 아버지에게 카버를 소개하고 입학시킵니다. 예상대로 그는 이 학교를 졸업할 때 수석으로 졸업하는 인재가 되었고, 당시 가장 저명한 식물학자였던 루이스 파멜 교수의 조수로 일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카버는 원예작물 접목법을 개발하여 세균에 대한 과일나무와 식물의 저항력을 크게 높이게 되고, 세균학을 공부하여 2만 가지가 넘는 표본을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점점 명성을 쌓아가며 농업 응용화학 분야에서 권위자가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항상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불쌍한 흑인 동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었지요.


사진출처 : https://goo.gl/Vrn1C7


그러던 중, 카버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편지 한 통을 받게 됩니다. 1896년 당시, 흑인을 위한 학교를 세워 흑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부커 교수에게서 온 편지였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돈이나 지위, 명예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단념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타락하고 가난하여 버려질 운명에 처한 우리의 동족들을 위해 함께해달라는 부탁을 하려는 것입니다. 앨라배마의 터스키지 학원에 농학부를 설치하고 부커는 카버에게 자신과 함께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고, 카버는 그곳이 자신이 가야 할 자리라는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된 것이지요. 연구소는커녕 실험도구 하나 변변히 없는 열악한 환경의 창고에서 그의 위대한 발명과 연구는 시작되었습니다.


한때 남부지방은 면화 재배로 유명했는데, 땅의 질소를 빼앗아가는 면화 재배 때문에 남부의 모든 땅이 척박해지고 이는 계속 악순환이 되어 남부 경제가 위기에 처할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일을 하던 흑인들에게는 이중고를 겪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커버박사는 질소를 잃은 황폐한 땅에 땅콩을 심으면 땅콩에도 좋을 뿐 아니라 땅이 다시 비옥해진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남부 농장마다 이제 땅콩을 재배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대성공을 거두었지요. 그러나 문제는 또다시 찾아왔습니다. 해마다 너무나 많이 쌓여가는 땅콩을 해소할 길이 없어 썩어가고 다시 농민들의 삶은 막막해졌습니다. 다시 카버박사의 깊은 고민과 기도는 시작되었습니다. 밤낮으로 땅콩을 들고 연구한 결과, 땅콩을 이용하여 마가린, 비누, 요리기름, 인조사탕, 잉크, 물감, 접착제, 연고 등과 우리가 잘 아는 땅콩버터까지 100여 가지가 넘는 종류의 음식과 200여 가지의 실용품을 개발해내었습니다.


사진출처 : https://goo.gl/x5EXNG


훗날 카버의 명성과 실력에 에디슨 연구소에서 연봉 10만 달러를 제의하며 초빙했지만 카버는 조용히 거절했고, 허름한 터스키지 학교 실험실에 남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정식 수입이라곤 말년까지 1896년 부커 교장이 정했던 월 125달러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의 불행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신앙 안에서 오히려 기적적인 삶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었던 그는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큰 울림이 되는 사람입니다. 사방이 넘어설 수 없는 벽으로 둘러싸였지만,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겸손과 지혜를 가진 그였습니다.




글쓴이 한지숙

글에도 다양한 표정이 있다고 믿는 자유기고가.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 인터넷 공간이라 할지라도 글을 통해 많은 이들과 마음을 나누기를 희망한다. 이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거울 대신 키보드로 표정 연습에 열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