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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엔지니어] 정약용, 시대 개혁을 이끈 조선의 발명가

by 앰코인스토리 - 2017. 6. 8.


시대 개혁을 이끈 조선의 발명가, 정약용


성호 이익의 학통을 이어받아 각종 사회개혁 사상을 제시했던 인물 정약용(1762~1836)은 방대한 저술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가 태어난 ‘양근’이라는 곳은 지금의 남양주 지역으로,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들이 존중하던 성리학설과는 대조되는 학문적 성향을 키워 나가던 곳이었습니다. 18세기 후반에 당쟁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정치 참여에 소외되었던 근교 지방 남인들을 중심으로 선진유학에 기초한 실학적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약용이 훗날 서양문물을 연구하고 서학을 받아들이고 개혁에 적극적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분위기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학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정약용

사진출처 : https://goo.gl/1i1oa5


정약용은 23세 때 진사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뛰어난 학문과 재능으로 성균관 시절부터 정조(正祖)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28세 때 비로소 문과에 급제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그 후로 사간원정언, 경기암행어사, 곡산부사,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하며 효율적인 정부조직과 개편을 위하여 혁신적인 개혁안을 내놓으며 고군분투하였습니다. 또한 ‘중국으로부터 선진기술을 받아들이고 선박과 수레 제조기술을 장려하기 위해 이를 관장하는 관청이 중앙정부에 설치되어야 하며 정부의 적극적인 주도로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발명과 기술은 시간이 갈수록 사회발전의 중요한 영향력을 끼칠 것이라 일찌감치 깨닫고, 농업기술, 방직기술, 군사기술, 의료기술 등 사회 다방면에 걸친 기술 혁신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 수원화성

사진출처 : https://goo.gl/VgcShX


그가 임기 중에 이루었던 업적 중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바로 정조의 분부로 시작된 수원화성 축조가 아닐까 싶습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에서 비롯된 건축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영조의 아버지였던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지금의 경기도 화성)으로 옮기면서 이곳에 이미 살던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옮겨야만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조정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노론파를 견제하고 강한 왕권을 확립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정조는 팔달산 아래 신도시 화성을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화성건설을 통해 개혁정치를 실시하고, 실학파 등 고른 인재 등용에 박차를 가하기 위함이었지요. 이때 정조의 뜻을 잘 받들었던 핵심 인재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정약용입니다. 중국을 통해 들여온 책을 보며 그는 전통적인 방법을 기초로 서양의 여러 도시의 특성을 연구하며 화성을 설계하였습니다. 1년 남짓 되어 도시의 기본 틀과 구체적인 건축방법까지 꼼꼼하게 적어 만든 보고서 「성설」을 완성하여 정조에게 바쳤습니다. 특히 정약용은 정조가 전해준 중국책 「기기도설」, 「제기도설」을 참고해 거중기를 고안해 내었습니다. 유형거나 녹로와 더불어 거중기의 활약은 화성건축 현장에서 단연 돋보이는 기기였지요.


▲ 녹로

사진출처 : https://goo.gl/E7nH43


거중기는 위아래 네 개씩의 도르래를 끈으로 연결하고 물체를 달아매어 물레형식으로 돌리면서 무거운 물건을 손쉽게 위로 올릴 수 있도록 고안된 기기였습니다. 이로 인해 건축경비를 크게 줄였을 뿐만 아니라 10년을 예상하던 공사 기간이 크게 단축되어 2년 9개월 만에 완공되었다고 하니 놀라운 혁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역에 참여하는 백성들에게 정확한 품삯을 쳐주어 열심히 일할 수 있게 만든 것도 성공적으로 건축이 마무리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 거중기

사진출처 : https://goo.gl/GjxJpc


그때 당시 공사에 쓰였던 기기들이나 사용된 자재, 공사 기간, 동원된 인원, 건설 방법 등 성곽을 건설하는 전 과정이 글과 그림으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책이 바로 「화성성역의궤」입니다. 이 책 덕분에 훗날 전쟁 등으로 많은 부분 소실되었던 화성의 모습들을 복원할 수 있었지요.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은 주거기능은 물론 군사 기능과 상업 기능을 동시에 갖춘 보기 드문 복합적 기능의 성곽 도시형태로 지형의 능선을 잘 살려 과학적이고도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편, 정약용은 이때 잠깐 천주교에 관심을 두고 입교하게 되는 일이 있었는데요, 당시 천주교 신앙은 집권층의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도전하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기에 강력한 반발을 사게 됩니다. 더군다나 정약용을 총애했던 정조마저 병으로 세상을 뜨고, 결국 1801년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박해가 일어나 유배를 당하게 됩니다. 이 일을 기점으로 사실상 중앙 정치와는 멀어지는 결과가 되었고, 관료로서의 삶은 마감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실학사상의 학문적 집대성은 바로 이 유배 시절에 꽃을 피웠습니다.


▲ (좌)목민심서, 경세유표/(우)흠흠신서

사진출처 : https://goo.gl/Oq7xEC


이 기간에 정약용은 조선왕조 사회현실의 반성과 유학 경전 연구를 통해 개혁안들을 정리 집필하였습니다.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이 바로 그런 책들이지요. 그의 저서는 연구서들을 비롯해 경집에 해당하는 것이 232권, 문집이 260여 권에 이르는데, 대부분 저서가 바로 유배 시기에 쓰였다고 합니다. 500여 권에 이르는 자신의 저서들을 모아 정리한 것이 바로 「여유당전서」이지요. 관료 시절에는 행동하는 실학자로서, 유배 시절과 그 후에는 실학적 사상의 학문적 체계 정립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던 지식인으로서 정약용의 탐구 정신은 계속되었습니다. 기술을 천하게 여기던 통념을 거슬러, 그 시대에 보기 드문 사회에 대한 성찰과 개혁안을 통해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던 조선 후기 사회의 대표적 지성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글쓴이 한지숙

글에도 다양한 표정이 있다고 믿는 자유기고가.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 인터넷 공간이라 할지라도 글을 통해 많은 이들과 마음을 나누기를 희망한다. 이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거울 대신 키보드로 표정 연습에 열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