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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요리와 친해지기

[와인과 친해지기] 와인 라벨 이야기, 기억에 남는 라벨 Harlan Estate

by 앰코인스토리 - 2017. 4. 30.

사진출처 : https://goo.gl/XCWh92


지난 호 동안 살펴보았던 와인 라벨들은 대부분 와이너리를 대표하는 그림과 와인 정보(빈티지, 지역, 품종등)를 담고 있다. 반면에 어떤 와인들은 화가의 그림이나 독특한 사진 등으로 소비자들에게 다가서는 와인 라벨도 있다. 특히 미국 컬트와인이 더욱더 그렇다. (참고로 컬트와인이란 생산량이 극히 제한되고 품질이 뛰어난 와인을 일컫는데, 회원들에게만 대부분 판매를 하므로 일반인들이 쉽게 구하기 힘들어 와인 애호가들에게 숭배(Cult)의 대상이 될 정도의 와인을 일컫는다) 이번 호에서는 필자의 기억에 남아있는 할란 이스테이트의 와인 라벨 이야기를 공유하고자 한다.


할란 이스테이트의 와인 라벨 이야기


미국 최고의 컬트 와인 중 하나를 꼽으라면 누구든 주저 없이 할란 이스테이트(Harlan Estate)를 얘기할 것이다. Bill Harlan이 최고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 나파밸리에 세운 와이너로 로버트 파커(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와인 평론가)로부터 “할란 이스테이트는 단 하나의 가장 심오한 레드와인일 것입니다. 단지 나파밸리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요”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와인이다.


▲ Bill Harlan

사진출처 : http://www.worth.com/master-of-vine/


“Harlan Estate might be the single most profound red wine made not just in California, but in the world.” 

- Robert M. Parker, Jr.


와인의 품질뿐만 아니라 라벨도 굉장히 우아한데, 라벨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면 아마도 Bill Harlan이 가지고 있는 와인에 대한 열정을 잘 알 수 있다. Bill은 어렸을 때 열렬한 우표수집가였고, 특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나왔던 음각 기술로 표현된 우표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Bill은 옛날 20달러 지폐 뒷면처럼 섬세하고 우아한 문양과 아이콘이 음각기술로 표현된 라벨을 만들고 싶어했다. 특히 라벨을 통해서 할란 이스테이트의 문화, 포도밭의 특성, 그리고 소비자와의 관계를 하나의 이미지로 나타내고 싶어했다.


▲ 20달러 지폐 뒷면


그가 와이너리를 설립하고자 했던 1984년부터 많은 예술가를 고용하여 라벨작업을 시켰지만 결국 원하는 라벨을 만드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던 Bill은 옛날 20달러 지폐를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던 기술자들에 대해서 알아보았으나 1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일한 생존자인 Herbert Francis Fichter (1941년 당시 21세로 조폐 제작국에서 수습생으로 있던) 씨의 전화번호를 어렵게 알게 된 Bill은 Fichter 씨에게 전화를 걸었고, 자신이 왜 그러한 라벨을 만들려 하는지 자세한 설명과 함께 간곡한 부탁을 해서 그를 나파밸리 사무실로 불러올 수 있었다.


포도밭을 둘러보고, Bill이 원하는 라벨에 대해서 더욱 자세한 설명을 들은 후 Fitcher 씨는 자신은 기술자였을 뿐이지 그러한 디자인을 창작하는 일의 적임자가 아니라고 제안을 거절했지만, 그는 America Bank Note Company(미국 초창기부터 시작해서 미국 남북전쟁 전까지 미국 화폐와 우표를 만들던 회사)를 소개해줌으로써 Bill에게 일의 실마리를 풀 수 있게 해주었다. Bill은 여러 번의 요청 끝에 펜실베이니아 주 외곽에 있는 ABN을 방문할 수 있었고 회사를 방문했을 때 어떤 다소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이때 ABN 관계자는 Bill에게 닳아져 불룩해진 엄청난 양의 낡은 책들을 훑어보도록 허락해줬는데, 이것은 대략 200년 동안의 보안 음각기술(우표, 지폐 등에 쓰였거나 쓰기 위해 축적된 sample 그림들)에 관한 책들이었다. Bill은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는데, 모든 페이지가 정말 아름다웠다. 독수리, 범선, 기관차, 은행장 초상화 등의 묘사가 페이지마다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것이었다. 책들을 다 훑어보려면 적어도 몇 주 아니 몇 달은 충분히 걸릴 만한 분량이었다.


그렇게 책장을 넘기던 순간, 갑자기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있었다. 우화적인 여성 인물이 목가적인 풍경 속에서 풍성한 포도송이를 향해 팔을 뻗치는 모습의 작품이었다. Bill이 표현하고자 했던 할란의 비전과 문화, 그리고 포도밭의 특성이 이미 다 표현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 작품은 Alonzo Earl Foringer에 의해 디자인된 것이었고, 그는 당시 최고의 지폐 디자이너였다. 그 오리지널 작품은 크기가 매우 컸는데 아마도 맨해튼에 있는 어떤 큰 회사 벽에 걸려있거나 1990년대 크리스티 경매에서 낙찰될 법한 작품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 원작을 찾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그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그 후로부터 3년이 흐른 어느 날, 전혀 뜻밖에도 뉴욕에서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그 편지는 변호사이면서 역사가이자 낡은 주권 수집을 취미로 하는 사람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는 Bill이 찾고 있는 원작은 1961년에 파괴되었다고 설명했으며, 대신 그가 가지고 있는 원작을 찍었던 사진을 보내주었다. 결국, 원본 작품을 찾아내어 할란 이스테이트 본사의 벽에 걸어두려고 했던 꿈은 무너졌지만, ABN에서 찾아낸 작품을 토대로 Fitcher 씨의 감독 아래 와인 라벨 작업이 진행되었고, 원하는 라벨을 찾아 나선 지 10년이 걸려서야 결국 라벨이 완성되었다. 안타깝게도 Fitcher 씨는 와인이 출시되기 3개월 전에 운명했지만, Bill은 Fitcher 씨가 아주 자랑스러워 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Bill은 “와인 라벨은 훌륭한 수제품의 품질을 가졌고, 가게 선반이 아닌 촛불이 켜진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에 어울리도록 디자인되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할란 이스테이트 라벨 들여다 보기


자, 그럼 할란 이스테이트 와인에 실제로 붙어있는 라벨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아래 보이는 사진은 필자의 와인 셀러에 보관하고 있는 2009년 빈티지(할란 설립 25주년 기념 빈) 라벨 사진이다. 컬러사진보다는 때로는 흑백사진이 깊은 여운을 남기듯, 할란 와인의 라벨은 지폐를 만들 때 사용되었던 음각기술을 이용해서 표현한 흑백 이미지를 통해, 다른 와인에서 볼 수 없는 멋과 깊이를 느끼게 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라벨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여신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먹고 싶어 할 정도의 뛰어난 품질의 포도(와인)임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 필자가 직접 촬영한 2009년 빈티지 라벨 모습 & 시중에 있는 2012년 빈티지 라벨 사진 비교


2012년 빈티지 와인부터는 현대 기술을 접목해 더 섬세한 와인 라벨을 완성했다고 한다. 위조방지 배경 그림이 추가되었고 여신의 얼굴과 손목 부분도 더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소비자들이 빈티지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글자도 조금 크게 하였다고 한다.


할란 이스테이트 와인은 20~30년의 세월은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장기 숙성용 와인으로, 오래 묵힐수록 더 심오한 맛을 선사하는 레드와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3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 컴퓨터와 로봇의 도움으로 아주 깜짝 놀랄만하게 변해버린 그런 세상이 왔을지라도, 촛불이 켜진 테이블에서 다시 만나는 이 라벨은 전혀 촌스럽지 않고 오히려 시공을 초월한 그윽한 우아함으로 우리에게 큰 행복을 선사할 것 같다.


▲ 할란 이스테이트 와이너리 전경

사진출처 : https://harlanestate.com/purpose/




WRITTEN BY 정형근

우연히 만난 프랑스 그랑크뤼 와인 한 잔으로 와인의 세계에 푹 빠져들었다. 주위에 와인 애호가가 늘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으로 사보에 글을 연재하게 되었으며, ‘와인에는 귀천이 없다.’라는 마음으로 와인을 신중히 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