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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요리와 친해지기

[와인과 친해지기] 와인 잔 이야기

by 미스터 반 2016. 9. 30.


[와인과 친해지기] 와인 잔 이야기


취미생활을 하면서 그 깊이가 더해질수록 더 나은 도구를 찾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배드민턴에 입문할 때는 배드민턴 채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다가, 레벨이 올라가게 되면 원하는 샷을 구사하기 위해 더 좋은 배드민턴 채를 찾게 되듯, 와인도 그러하다. 처음에는 아무 잔에나 마셔도 그 차이를 모르지만, 좀 더 섬세한 부분까지 느끼게 되는 레벨로 올라가게 되면 잔이 정말 중요한 요소인 것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포도에 따라 특징적인 맛과 향이 다르고 그 특징을 잘 전달하고자 하여 만들어진 것이 와인 잔이기 때문이다. 


와인 잔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보르도, 부르고뉴, 화이트, 샴페인 잔이 그것이다.


보르노 레드와인 잔은 전형적인 튤립 모양을 하고 있다. 타닌이 강한 와인(예를 들어 프랑스 보르도 스타일 와인)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 특이한 곡선 모양은 타닌 성분 특유의 텁텁한 느낌을 최대한 덜 느끼게 하고 와인에서 풍기는 과일 향과 잘 조화를 이루도록 고안되었다. 입구 경사각이 작아 입안에 고루 퍼지며, 아로마(와인이 1차 숙성되면서 나오는 향을 ‘아로마’라고 하는데 포도가 내는 향을 칭한다고 이해하면 쉽다. 과일 향, 검은 과실 향 등을 말한다)와 부케(와인이 2차 숙성되면서 나오는 향을 ‘부케’라고 한다. 가죽 냄새, 연필심 냄새, 낙엽 냄새 등 포도 본연의 향이 아니라 숙성되면서 나오는 향이라고 생각하면 쉽다)를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부르고뉴 레드와인 잔은 보르노 레드와인 잔보다 볼 부분이 불룩한 편이다. 볼이 넓을수록 와인이 공기와 접촉하는 면적이 넓어져, 그 향을 더욱 잘 맡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정상급 와인들을 마실 때 가장 그 풍미가 잘 느껴진다. 부르고뉴 포도 품종 중 피노 누아는 카베르네 소비뇽보다 타닌은 적고 신맛이 강해서 와인 잔의 볼이 좀 커야 하는데, 이럴 때 안성맞춤이다.


화이트와인 잔은 타닌 성분이 없어서 볼이 작아도 괜찮다. (참고로 볼이 큰잔에 값싼 와인을 마시면 향이 너무 부족해진다) 그래서 화이트와인 잔은 보통 레드와인 잔보다 작고 용량이 적다. 차게 마시는 특성 때문에 그 상큼함을 잘 느끼도록 혀 앞부분이 잘 닿도록 디자인되었다.


스파클링 와인 잔은 기다란 튤립 혹은 플루트 모양을 하고 있다. 와인에 담긴 탄산이 좀 더 오래 보존되고 거품이 올라오는 것을 잘 관찰할 수 있게 되어있다. 품질이 괜찮은 와인일수록 기포(거품)가 지속적으로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보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참고문헌 : 마이클 슈스터의 와인 테이스팅의 이해, 다사키 신야의 와인생활백서)



▲ 보르도 레드와인 잔, 부르고뉴 레드와인 잔, 화이트와인 잔, 스파클링 와인 잔

사진출처 : 리델(Riedel)


그럼 와인 잔을 고를 때 어떤 기준이 있는 걸까? 


필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두 가지다. 잔의 두께와 내구성. 두께가 두꺼운 잔은 무겁기도 하고 입술에 닿았을 때 둔탁한 느낌은 와인의 섬세함을 느끼는데 장애가 된다. 얇은 잔은 와인을 좀 더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해주어서 좋다.


그런데 너무 얇아도 문제가 된다. 잔의 내구성 때문. 와인을 즐긴 후 와인 잔을 깨끗이 씻어 놓으려 할 때 스템이 긴 잔은 잔을 헹구는 과정에서 싱크대 수도꼭지에 부딪혀 깨지기 쉬우므로 주의해야 한다. 필자도 와인 초보 시절, 설거지하다가 잔을 깨트렸을 때가 있다. 그 안타까움이란! 언제는 TV를 보며 와인을 마시다가 우연히 와인 잔 입구를 두 손가락으로 오므려보았다가 와인 잔이 깨지는 일도 있었다. 얇은 와인 잔은 탄력이 있어서 입구를 누르면 오므려진다. 그게 재미있어서 조금 더 조금 더 눌러봤는데 정말 깜짝 놀랄만한 큰 소리로 잔이 깨지고 만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아주 날카롭고 잘게 깨진 파편이 온 방 안으로 퍼진다는 것이다. 절대 그런 장난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결과적으로, 와인 잔을 고를 때는 두께가 얇으면서 내구성이 강한 와인 글라스를 찾는 것을 추천한다.


와인 잔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예술이 된다. 레스토랑에 갔을 때 와인 렉에 거꾸로 걸려있는 와인 잔들이나 테이블에 예쁘게 놓인 와인 잔은 필자를 설레게 만드는 소품이기도 하다. 필자는 레스토랑에 가면 와인 잔을 먼저 보는데, 그 모양이 예쁠 때는 사진으로 남기곤 한다. 아래 사진은 태즈메이니아(Tasmania) 여행 때 들른 MONA미술관 옆 The Source라는 레스토랑에서 찍은 사진이다. 테이블에 깔끔하게 놓인 와인 잔은 보고만 있어도 흐뭇해진다.



또 와인 잔은 그 자체로 예술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와인 모임을 통해 알게 되어 친하게 지내는 미술작가가 있는데 그의 작품 대상은 바로 와인 잔이다. 평범하게만 보이는 와인 잔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서 만든 작품인 <The chosen person>, 그리고 최근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아름다운 구속> 시리즈도 참 멋지다.


▲ 유용상 작가의 <The Chosen person> 116.8x72.7cm Oil on canvas 2011


▲ 유용상 작가의 <아름다운 구속> (Time capsule – Beautiful Restraint) 194x97cm Oil on canvas 2016


▲ 유용상 작가의 <아름다운 구속-4계> (Beautiful Curb – four seasons) 194x112cm oil canvas 2016


이제 레드와인의 계절, 가을이 왔다. 와인에 더 다가갈 수 있도록 이번 기회에 괜찮은 와인 잔을 장만하는 것은 어떨까. 필자는 부담 없는 가격에 두께도 어느 정도 얇고 잘 깨지지 않는 쇼트즈위젤 제품이나, 와인 잔에 대한 틀에 박힌 관념을 통쾌하게 날려버린, 지극히 실용적인 리델 O시리즈를 추천한다. 아마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 될 것이다.





WRITTEN BY 정형근

우연히 만난 프랑스 그랑크뤼 와인 한 잔으로 와인의 세계에 푹 빠져들었다. 주위에 와인 애호가가 늘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으로 사보에 글을 연재하게 되었으며, ‘와인에는 귀천이 없다.’라는 마음으로 와인을 신중히 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