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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conductor/스마트 Tip

[역사 속 엔지니어] 안토니오 무치, 미 의회가 인정한 최초 전화기 발명가

by 앰코인스토리 - 2016. 9. 1.


[역사 속 엔지니어] 전화기 최초 발명은 벨이 아니다?! 미 의회가 인정한 최초 전화기 발명가, 안토니오 무치


▲ 안토니오 무치 (Antonio Meucci)

사진출처 : http://goo.gl/hmpH2r


예전부터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사실이 진실이 아니라고 판정이 난다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드시나요? 놀라움과 함께 그동안 속아왔다는 생각에 당황스럽기도 할 텐데요, 그렇게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전화기 최초 발명가라고 알려져 왔던 그레이엄 벨 (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입니다. 전화기를 통해 벨이 처음 그의 조수 왓슨에게 했던 말, “왓슨, 이리 와주게. 자네가 필요하네.” 이 유명한 대화 내용은 우리에게 그동안 위대한 발명가의 명언과도 같이 여겨졌고, 전화기 최초발명자라는 명예와 함께 우리 머릿속에 각인되어 왔습니다.


▲ 그레이엄 벨 (Alexander Graham Bell)

사진출처 : http://goo.gl/rbktWN


그러나 벨의 전화기 발명과 관련, 생전에 600여 건 이상의 끊임없는 특허분쟁에 시달렸다는 점과 남의 발명을 도용했다는 여러 가지 의혹이 계속 제기되어 왔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요. 결국 2002년, 미국의회 하원에서 전화기 최초발명가는 ‘벨’이 아니고 이탈리아 출신의 안토니오 무치 (Antonio Meucci, 1808~1889)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안토니오 무치는 벨보다 무려 16년 이상이나 앞서서 전화기 개발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보다 훨씬 뒤의 벨이 100여 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전화기 최초발명가로 알려지게 된 걸까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난 무치는 1850년 미국에 이민, 한 양초공장에 자신의 돈 상당 부분을 투자하며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양초공장이 도산하게 되고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면서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 가운데도 그는 평소 전기의 의학적 사용에 대해 큰 관심을 두고, 여러 종류의 병들을 전기충격요법으로 치료할 방법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가 처음 음성전송이라는 전화기의 원리에 대해 영감을 얻게 되는 큰 계기가 됩니다. 구리 스패툴라 (copper spatula)를 통해 전기로 다른 방에 있던 환자를 치료하던 중, 환자의 비명이 구리선을 따라 들리게 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지요. 무치는 이 장치를 Telegrafo Parlante라고 불렀습니다. 무치의 아내가 지독한 류마치스 관절염으로 방에서 꼼작 못하고 있을 때, 아내 방과 자신의 작업실을 연결해주는 전화기를 설치해 아내의 안부를 묻곤 했다고 전해집니다.


▲ 안토니오 무치의 Telegrafo Parlante

사진출처 : http://goo.gl/kR9zjT


가난에 허덕였던 무치에게 전화기 원리의 발명은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영구적인 특허권 취득을 위해서는 약 250달러의 비용이 필요했는데, 무치에게 그런 큰돈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10불씩 돈을 내고 해마다 갱신해야 하는 임시특허를 신청(1871년)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마저도 낼 돈이 없어 특허신청을 중단하기에 이릅니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웨스턴유니온 전신회사에 자신의 전화기 상용화를 의뢰해보았지만, 전신회사는 무치가 발명한 전화기의 잠재능력을 미처 깨닫지 못했지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치는 전화기 모델과 설계도까지 잃어버리고(혹자는 도난당했다고 주장함) 말았습니다.


그러던 중, 1876년에 그레이엄 벨이 무치의 전화기 구조와 거의 흡사한 설계도를 가지고 나타나, 자신의 이름으로 특허등록을 해버린 것이지요. 무치는 당연히 항의했고 법적소송도 해보았지만, 재정적 뒷받침이 필요한 기나긴 소송에서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무치는 특허분쟁에서 패소하여 쓸쓸하고 힘들게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전화기의 발명자는 그레이엄 벨로 알려지게 된 것이지요.


벨은 무치 이외에도 동시대를 산 다른 사람들과도 전화기 특허분쟁으로 마찰이 끊임없이 있었습니다. 벨보다 두 시간 늦게 특허를 접수한 바람에 역사 속 주인공과 막대한 부를 거머쥘 기회를 놓친 안타까운 인물로 회자되는 엘리사 그레이 (Elisha Gray, 1835~1901)도 있었고, 과학전문기자인 세스슐만은 「지상최대의 과학사기극」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벨이 특허신청을 낸 날은 1876년 2월 14일이다. 그런데 전화기 음성송신에 성공한 날은 3월 19일이다. 어떻게 만들지도 않은 물건을 먼저 특허신청할 수 있단 말인가. 벨의 실험노트를 보면 엘리사가 발명한 액체 송화기 도안과 전화기 핵심기술인 가변저항 개념을 노골적으로 베끼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엘리사 그레이 (Elisha Gray)

사진출처 : http://goo.gl/rzkiId


▲ 벨의 실험 노트 (가운데 흰색 박스는 그레이 도안)

사진출처 : http://goo.gl/ODnGUC


다행인지 불행인지 엘리사는 그때 당시 전화기 발명에 대한 열망보다는 다중 산업 전신기 발명에 더 큰 관심을 쏟고 있었던 때라, 벨의 행동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우연이라 생각하고 적당한 타협점을 찾았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특허가 나오려면 통상적으로 몇 달이 걸려야 하는 그 시절에 단 몇 주 만에 벨의 특허가 인정되었다는 것, 심지어 발명품을 갖고 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특허를 내주었다는 특허청 관리의 진실고백 사건, 때마침 상원에서는 발명품을 가져오지 않아도 되는 입법이 추진되고, 이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다는 것 등은 우연이라고만 생각하기엔 너무나 의심스러운 일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전화기 최초 발명자에 대한 진실공방은 2002년 미국의회에 의해서 일단락 지어졌습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독일출신 필립 라이스 (1834~1874, 1860년 ’인공 귀‘라는 장치발명), 안토니오 무치, 엘리사 그레이 세 명이 전화기 발명의 유력한 후보로 인정받고 있는데요. 미 의회는 안토니오 무치를 전화기 최초발명가로 인정한 것입니다. 이제, 제대로 전화기 최초 발명가를 찾아낸 것일까요?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겠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생겨나니까요. 진실은 언젠가 꼭 밝혀진다고 믿고 싶습니다.




글쓴이 한지숙

글에도 다양한 표정이 있다고 믿는 자유기고가.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 인터넷 공간이라 할지라도 글을 통해 많은 이들과 마음을 나누기를 희망한다. 이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거울 대신 키보드로 표정 연습에 열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