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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일상다반사

[에피소드] 자존심이 뭐길래

by 앰코인스토리 - 2016. 6. 16.


아파트로 둘러싸인 도로변에 소공원이 조성되었다. 600평 정도의 넓이에 나무도 심고 여러 모양의 의자도 갖추었다. 개장기념으로 벼룩시장도 열고, 밤에는 무료영화를 상영하기도 한다. 월드컵 중계 때는 응원의 함성이 새벽하늘에 진동했다. 여전히 30도를 오르내리는 요즘, 오후가 되면 열기를 피해 나온 노인네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는다. 개별적으로 나온 할머니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루는데, 할아버지들은 같은 의자에 앉아도 나 몰라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지만 늙어가면서 왜 이렇게 달라지는지가 못내 궁금해서, 할머니들의 옆자리에 앉아 사연을 들어 보았다. 

“무슨 이야기가 그리도 재미있나요?”

올해부터 경로카드를 받아서 전철도 공짜로 타고 다닌다는 할머니는 “이 사람이 방금 손자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어요. 다들 서로 하려고 해서 돈 내고 하라고 다그쳤지요.”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세요?”

“아니요. 생판 모르는 사이지만 비슷한 나이라 금세 친하게 되었지요. 약속 안 해도 이곳에 오면 자연스럽게 만나 수다를 떨게 됩니다.”

“무슨 이야기를 주로 하나요?”

“손자, 손녀의 재롱이 주를 이루지만, 삼 세 끼인 남편 흉도 보고 시월드 이야기가 나오면 모두 한편이 되어서 좋아들 하지요. 어느 여성이든 자식 키우면서 고생한 이야기가 오죽 많아요!” 

옆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던 할머니도 “우리가 젊었던 시절엔 가부장적이었잖아요. 시집와서 시부모, 남편에게서 받은 서러움이 가슴에 꼭 맺혀 있어요. 고생하고 구박받은 이야기는 언제 틀어 놓아도 눈물과 웃음이 교차하지요.”

조금 떨어진 장소에는 할아버지 네 명이 나무를 중심으로 하여 사각으로 배치한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보는 방향은 서로 달랐다. 고독을 즐기는 건지, 먼 곳으로 멍하니 눈길을 주고 있다. 

“옆의 어르신과 인사라도 나누시지요.” 

“인사는 무슨. 더울 때는 조용히 앉아있는 게 최고야. 심심해서 이야길 나누고 싶어도 다들 싫어하는 것 같아. 어렵게 말을 걸어도, 날씨 이야기하고 나면 그게 끝이야. 고향이 다르고 직장생활 한 사람도 사무직과 생산직의 이야기가 다르단 말이지.”

“할머니들처럼 손자 이야기라도 하시지요.”

“그거야 여자들 이야기지. 모르는 처지에 가족 자랑을 한다면 팔불출이 될 거고, 험담을 늘어놓으면 자기 얼굴에 침 뱉기 아니요? 술이라도 한잔하면 몰라도.”


뒷산을 올라봐도 옛 철길을 걸어도 여성들은 짝을 이루고 다니지만, 남성들은 부부동행이 아니면 대다수가 나 홀로다. 자존심이 뭐 길래. 나이 든 여자에게 필요한 다섯 가지는 돈, 건강, 딸, 친구, 강아지인 반면, 할아버지에게는 여자, 와이프, 처, 마누라, 안사람이라는 우스개가 떠오른다. 자식들 다 떠나보내고 빈 둥지에서 마누라나 졸졸 따라다니며 눈치 보는 천덕꾸러기 애물단지가 될 확률이 높아지고 있다는 생각에 서러움이 몰려온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마누라에게 점수 따야지!


글 / 사외독자 이종철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