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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리엘모 마르코니, 무선통신의 발전! 과학과 윤리의 관계를 묻다

by 앰코인스토리 - 2015. 12. 7.


2015년 노벨물리학상은 일본의 가지타 다카아키와 캐나다의 아서 B. 맥도널드가 공동 수상했습니다. 중성미자에 관한 연구 덕분인데요, 한국 국적을 가진 과학자 중에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는 언제 나올 것인지 걱정하는 목소리가 큽니다. 인간이 이룩한 업적은 천재가 홀로 노력해서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사 속 엔지니어] 칼럼을 통해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현대물리학은 작은 원자 속이나 우주 저 너머와 같은 차원을 다룹니다. 때문에, 이론 물리학자들만 노벨물리학상을 타곤 하지요. 하지만 초창기에는 엔지니어들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인류에게 공헌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라는 의도에는 후자가 더 어울린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909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굴리엘모 마르코니(Guglielmo Giovanni Maria Marconi, 1874~1937)가 전기공학자, 다시 말해 엔지니어였던 것처럼 말이지요.


▲ 굴리엘모 마르코니 초상, 1874년

사진출처 : https://goo.gl/Oagx0p


무선전신을 실용화한 것으로 알려진 마르코니의 공식 이름은 ‘제1대 마르코니 후작 굴리엘모 조반니 마리아 마르코니’입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이탈리아 왕국의 볼로냐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명을 다했습니다. 마르코니가 태어난 해는 1874년, 이탈리아가 통일왕국을 이룬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아버지 주세페 마르코니는 대지주였고, 어머니 애니 제임슨은 영국의 귀족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마르코니는 어릴 때부터 과학에 소질이 있었고, 그 소질을 지원해줄 부모도 있었지요. 13세에 레그혼(Leghorn) 기술학교에 들어가 과학공부를 했습니다.

어머니 쪽의 교육열이 대단한 나머지, 마르코니가 19세가 되었을 때 볼로냐대학의 물리학 교수인 어거스트 리기(Augusto Righi)를 초빙해 개인지도를 받게 했습니다. 전자기(電磁氣)에 정통한 리기 교수의 지도로 마르코니는 각종 전자기 실험을 해볼 수 있었지요. 만 20세인 1894년에는 볼로냐 근처 사유지에 일종의 개인 실험실을 두고 연구에 돌입합니다. 아버지가 대지주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환상, 에테르라는 매질


잠시, 물리 이야기를 해볼까요. 당시 과학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에테르(ether)라는 물질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빛은 파동의 형태로 전달되는데, 이 우주는 파동을 전달하는 매질인 에테르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지요. 에테르는 무게도, 빛깔도, 냄새도 없어서 느낄 수는 없지만 아주 중요한 매개체입니다. 에테르라는 말의 유래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나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이 흙, 공기, 불, 물의 4원소로 이루어져 있고, 비어 있는 곳을 제5원소 에테르가 채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철학적 관점에서나 물리학에서 보나 참 거친 설명입니다만,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둘 것은 빛을 전달하는 매개체인 에테르를 발견하기 위해 당대 과학자들이 열과 성을 다했다는 점입니다.


▲ BT센터 외벽에 새겨진 기념문구

사진출처 : https://goo.gl/f1eXaw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상대성이론에 이르러 에테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빛은 입자이자 파동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러나 에테르가 있다고 믿고 그 성질을 추측하여 모형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과학이 급속하게 발전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마르코니는 맥스웰(James Clerk Maxwell)의 이론에서 영향을 받았는데요. 맥스웰은 전자기 현상이 일어날 때 에테르가 변형되고 이때의 변형력에 의해 전기력과 자기력이 전달된다는 이론을 정립했습니다. 마르코니는 에테르를 통해 전파를 전달하려고 한 것이지요.

다시 볼로냐 근처 마르코니 집안의 사유지로 돌아갑니다. 마르코니의 실험을 설명하려면 전압, 코일, 송수신기, 방전기, 안테나 등등을 이용한 무선장치를 묘사해 드려야 할 텐데요, 넘어가는 게 좋겠지요? (^^) 전파를 멀리 보낼 수 있도록 전신주에 금속판을 설치하고 다른 한쪽은 땅에 묻었다는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르코니는 1895년 9월 2.4km 떨어진 곳까지 무선신호를 보내는 데 성공하고 1896년 6월에는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무선전신 기술특허를 받았습니다.


이탈리아와 영국, 영광의 나날들


당시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보기에 마르코니는 갓 스무 살을 넘긴 아마추어 과학자였습니다. 마르코니의 무선전신 기술을 인정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았지요. 이것은 시기와 질투만은 아니었습니다.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Rudolf Hertz)가 전파 발생 장치와 수신 장치가 있으면 무선통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후, 대서양 이쪽저쪽에서 수많은 과학자가 무선통신에 매진하고 있었으니까요. 마르코니는 ‘뚜뚜’하는 전신을 송수신하는 것에 먼저 성공한 것이지만 나아가 사람의 음성 전달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더욱 발전시킨 과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처음에 이탈리아 당국은 마르코니의 기술에 흥미를 갖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마르코니는 어머니의 나라인 영국으로 건너가 특허를 취득했습니다.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투자를 받아 회사를 차리자, 무선기술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탈리아가 마르코니를 다시 모셔옵니다.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 무선통신 기술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각국 정부는 마르코니의 도움을 구합니다. 마르코니는 자신의 송수신기를 거듭 개량하여 무선통신을 발달시킵니다. 그러던 1901년에는 대서양을 건너 영국과 캐나다를 무선으로 연결하고, 1909년에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된 것이지요.


▲. 미국 엔지니어 알프레드 노튼 골드 스미스와 함께, 1922년

사진출처 : https://goo.gl/9Blbv2


마르코니의 무선통신 기술은 바다에 나간 배들이 육지에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에 힘입어 벨기에-캐나다 간 증기선을 타고 도망친 살인자를 선장과 경찰이 무선신호를 주고받아 체포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 시에는 무선구조 요청 때문에 30%의 승객이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사건사고 이후에 마르코니는 부와 명예를 더 많이 누렸습니다. 1914년에는 이탈리아 원로원 의원이 되고, 1929년에는 후작 작위를 받습니다. 마르코니의 인기는 세계적이어서 일본 식민지 시기 한반도 서울에 방문한 적도 있습니다. 1933년 11월의 일이었지요.

1937년 7월 20일 마르코니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의 죽음은 이탈리아뿐 아니라 주변국의 추모를 받았습니다. 7월 22일 오후 6시 영국 라디오 방송은 2분 동안 아무 소리도 내보내지 않는 것으로 애도를 표했습니다. 그의 사후인 1943년 미국 대법원은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가 마르코니보다 7년 먼저 무선기술 특허를 획득했다는 판결을 내립니다. 노벨상 수상도, 상업적 성공도 마르코니가 다 거머쥐고 세상을 떠난 후에야 말이지요.


엔지니어인가, 파시스트인가


▲. 워싱턴 D.C의 굴리엘모 마르코니 기념관

사진출처 : https://goo.gl/g1jz4f


마르코니는 과학자들과의 교류 없이 무선전신 기술을 개발할 정도로 타고난 운과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기술 개량과 사업 확장을 계속해 나간 것을 보면 과학자와 기업가 양면에서 훌륭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마르코니에게는 씻을 수 없는 인생의 오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의 당원이었다는 점이지요.

앞서 말했던 대로, 마르코니가 살던 시기의 이탈리아는 공화국이 아니라 왕국이었습니다. 이탈리아를 통일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왕위에 있었으나 정치와 경제 상황은 불안했습니다. 바깥으로는 아직 독일이 아니었던 프로이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랑스 등이 뒤엉켜 빈번하게 전쟁을 벌였지요. 1914~1917년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는 전승국이 되고도 별다른 떡고물을 얻지 못합니다. 전쟁 후에 인플레이션만 심해져서 국민의 불만만 더욱 높아졌지요. 이때 ‘검은셔츠단’이라는 우익단체를 이끌고 나타난 무솔리니는 보수층을 집결시켜 파시스트당을 만듭니다. 파시스트당이 이탈리아 유일당이 된 1923년부터 마르코니는 파시스트당의 당원이었습니다. 1930년에는 이탈리아 왕립학회장이자 파시스트 대평의회 의원이 됩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은 1939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나치당과 손잡았지만 끝내 패전하게 되지요. 그러나 전쟁 전에 마르코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험한 꼴은 보지 않았습니다.


마르코니가 누린 영광의 나날들은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과학이나 예술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사람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요. 과학은 정치와 무관하게 중립적일 수 있을까요. 현대과학은 국가적 지원을 받아 여러 명이 연구 개발을 진행하는 형태로 이뤄집니다. 그 영향력은 측정 불가능할 정도지요. 우리 사회는 마르코니의 삶에서 끄집어낸 이 질문들에 제대로 된 답을 내놓아야만 합니다.



글쓴이 김희연은_사보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자유기고가다. 자기 과시에 지나지 않는 착한 글이나 빤한 이야기를 피하려고 노력하며 쓰고 있다. 경력에 비해 부족한 솜씨가 부끄럽고, 읽어주는 독자에게는 감사하며 산다.


※ 외부필자에 의해 작성된 기고문의 내용은 앰코인스토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